경찰서에 끌려간 동빈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싸움을 말렸다는 사실은 입증되었지만 박 형사의 부담스러운 눈길은 피할 수 없었다.
“쯧쯧쯧… 봉사 활동 하라고 지구대까지 소개시켜 줬더니 말이야… 패싸움에나 휘말리고. 차암! 잘하는 짓이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동빈은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안 좋은 일로 경찰서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 목격자 진술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라.”
“저기… 이번 일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곳에 소개 좀 시켜…….”
“우와!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도 봉사 활동 소개시켜 달라는 소리가 나오냐?”
“…….”
동빈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꺼낸 게 실수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했다. 박 형사의 살기는 점점 강해졌고 동빈의 몸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는데,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박 형사님.”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윤 기자님 아닙니까?”
“휴우∼.”
동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운이 좋다. 뜻밖의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활기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 형사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동안 안 보여서 시집이라도 가셨나 했습니다.”
“시집은 무슨 시집이에요. 그냥 조금 바빴어요.”
“그래 우리 서에는 웬일로…….”
“웬일은요? 좋은 기삿거리가 떴다고 해서요.”
“좋은 기사라니요? 어떻게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학생들이 패싸움한 게 좋은 일입니까?”
“호호호. 썰렁한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어라? 귀에 익은 목소린데?’
간드러지게 웃는 여자의 목소리… 매우 친숙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는 사람이었다.
“기자 누나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머나! 동빈이 아니야?”
뜻밖의 구세주는 윤지나였다.
그동안 연락을 못 했는데 경찰서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두, 둘이… 아는 사이?”
박 형사는 동빈과 윤지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지 궁금한 눈빛이었다.
윤지나가 오랜만에 만난 동빈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동빈을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조용한 카페로 데려갔다. 창가 자리에 앉은 윤지나와 동빈은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동빈이는 어떻게 지냈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말이네?”
“저야 뭐… 그런데 기자 누나는 왜…….”
딩딩딩딩.
동빈이 중요한 질문을 하는 찰나, 윤지나의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만…….”
“네, 전화받으세요.”
반가운 사람인가?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 윤지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할 일이 없어진 동빈은 탁자 위에 있는 물 잔에 저절로 손이 갔다.
“네, 현철 씨.”
“켁… 현, 현철 씨?”
동빈은 사레가 들린 반응을 보였다.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고서 윤지나를 쳐다보았다. 현철? 매우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니에요. 동빈이 알죠? 진짜 사촌 동생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알았어요. 네… 거기서 봐요.”
딸각.
동빈이 때문인가? 윤지나는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고도 미소가 끊이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수상했다.
“뭘 그렇게 봐?”
“기자 누나. 호, 혹시…….”
동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계속 흐렸지만 그녀는 동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맞아, 공현철 사범. 우리 진짜 사귀기로 했거든.”
“네에?”
이래서 남녀 관계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이다. 동빈은 뜻하지 않게 중매쟁이 역할을 한 셈이었다.
“사람이 참 괜찮아. 성실하고 몸도 건강하고… 생활력도 강해서 밥 굶을 걱정도 없고… 참! 동빈이 너 오면 관비를 반으로 깎아 준대. 어때? 생각 있어?”
“바, 반요…….”
둘 사이를 엮어 주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동빈 아니던가? 비싼 옷은 고사하고 겨우 관비 50” 할인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생활력 강한 건 인정해야 했다.
“이번에 꼭 등록해야 돼. 도복도 공짜로 나오거든?”
“전 도복 많은데요. 게다가 강남까지 가려면…….”
“괜찮아. 괜찮아. 주말반도 있어. 오늘 현철씨 만나서 내가 잘 말해 줄게. 한 달 정도는 공짜로 해 달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등록하는 거다. 알았지?”
“…….”
윤지나가 조금 변했다. 싱긋 웃는 모습이 공현철 사범의 미소와 상당히 많이 닮았다.
“중요한 일은 됐고… 그런데 아까 뭘 물으려고 했지?”
“…….”
동빈은 계속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말한 중요한 일이란, 동빈이 도장에 등록하는 것이 분명했다.
동빈은 괜히 섭섭한 마음을 꾹 참고 본론을 꺼냈다.
“왜 경찰서에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요즘 학원 폭력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거든.”
“죄송한데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뜻밖이네? 동빈이도 관심이 있어?”
윤지나는 학원 폭력과 이상하게 얽혀서 고생한 동빈의 전적을 알고 있었다. 병적으로 피하려 했던 동빈이 이런 반응을 보이자 의아한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원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정도는 알려 줄게. 우선은 전국 연합이라는 조직이 있어. 한참 잘나가다가 큰 내분이 생겨서 잠시 주춤했지. 그러나 여전히 학원 폭력을 대표하는 그룹이지.”
‘주철이가 있었던 조직이구나. 내분이 생겼다는 것은 주철이가 난리를 친 것을 말하겠지…….’
“그리고 성인 조직 폭력배와 연계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놈들이 있는데. 저번에 이것을 취재하다가 큰일 날 뻔했지. 동빈이가 구해 줘서 다행이었지.”
‘저번에 만난 경기 연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전국전인 네트워크라면… 또 다른 놈들이 있다는 소리잖아.’
윤지나가 설명을 할 동안 동빈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녀의 설명에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결부시켜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전국 연합과 학생 조폭들의 싸움이 심했는데, 요즘에는 학생 경찰이라는 조직까지 결성되었어. 동빈이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학원 폭력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야.”
“상당히 복잡하네요.”
“복잡하지. 한마디로 고교 삼국지라 할 수 있을 정도야.”
“흠…….”
동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늘 직접 경험한 일이기에 이해가 빨랐다. 궁금했던 것이 풀리자 가장 시급하게 해결할 과제가 불연 듯 떠올랐다.
“참! 봉사 활동 할 수 있는 곳 좀 알려 주세요.”
“봉사 활동?”
조금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학원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봉사 활동을 묻다니? 그녀가 반문하는 것도 당연했다.
“박 형사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봉사할 마음은 있는데 봉사할 곳이 없다는 현실이 참으로…….”
“아, 알았어. 내가 좋은 곳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런 이상한 말투 좀 쓰지 마.”
말투가 어찌 되었든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동빈은 꾸벅 인사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아무리 학교 폭력이 심해진다고 해도 대부분 학생들의 심성은 착한 것 같아. 동빈이가 봉사 활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야.”
“네.”
동빈이 봉사 활동을 결심했기 때문인가? 윤지나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경찰서에 오던 길에 열심히 쓰레기를 줍는 학생들도 봤어.”
“네?”
“얼마나 열심히 쓰레기를 줍던지…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로 기사 낼 예정이야. 사진도 찍어 왔는데 볼래?”
‘서, 설마…….’
동빈은 주춤거리며 윤지나가 꺼낸 디지털 카메라를 보았다.
열심히가 아니가 거의 필사적으로 휴지를 줍는 학생들… 이번에도 역시 동빈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기사 내지 마세요. 진짜 큰일 나요.”
“……?”
화면 속에 등장한 인물이 누군지는 뻔했다. 가슴이 따듯한 이야기는 절대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