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삼국지
강진고 선생님과 원석은 후미진 길을 올랐다.
경사는 점점 가팔라졌고 정년이 가까워진 선생님은 숨을 심하게 헐떡거렸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됐습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원석은 깎아지른 듯한 계단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이 든 선생님이 더 이상 오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그래… 저 계단만 오르면… 거, 거의 다 온 거 맞지?”
“네.”
선생님도 제자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았다. 벅찬 숨을 고르며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가 사 준 약은 꼭 발라야 한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어머님이 걱정하시지 않게, 선생인 내가 직접 말씀드려야 하는데 말이야.”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아직 어머니가 들어오실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은 더 늦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내가 저녁 늦게라도 전화드리마. 그냥 넘어졌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그래야 어머님이 안심하실 테니까.”
나이 든 선생은 이런 일로 원석이 학업에 전념하지 못할까 내심 걱정이었다.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돕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마우면 다시 이런 짓 하지 마라. 그리고 내일 학교에 꼭 나오너라. 대수 놈은 내가 잘 타이를 것이야.”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너도 어서 올라가거라.”
선생님은 원석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야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던 원석도 중간에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힘들게 내려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휴우∼.”
무슨 이유 때문일까? 원석의 입에서는 기나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땅에 시선을 두고서 묵묵히 걸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가파른 계단도 몇 개를 남겨 놓지 않았는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씹새야.”
“……!”
원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진고의 일진회였다. 험상궂은 얼굴로 원석의 등장을 환영했다.
“씨발… 존나 꾸진 데 살고 있네. 여기까지 오면서 힘들어 죽는지 알았다.”
“…….”
원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포위한 학생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어쭈구리? 노려보면 어쩔 거야?”
“이 새끼가 진짜로 미쳤나 본데? 어디서 도끼눈을 뜨고…….”
짝!
대수는 원석의 따귀를 때렸다.
가볍게 쳤다고는 하지만 원석이 감당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좀 전에 맞은 상처 때문인지 입술에서 진한 피가 흘러내렸다.
“어쭈? 눈깔 안 깔아?”
짝짝!
대수는 말보다 손이 빨랐다. 원석의 차가운 눈빛이 변하지 않자 계속 따귀를 때리며 몰아붙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오늘 단단히 버릇을 고쳐 줘야지.”
대수는 우악스럽게 원석의 멱살을 잡아챘다.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였지만 원석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화악.
“이거 놔. 내 발로 갈 거야.”
대수의 팔을 뿌리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위축되거나 겁먹은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요놈 봐라?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지?”
“너희들이 원하는 장소는 내가 알고 있다. 안내해 줄 테니까 조용히 따라와라.”
원석은 전혀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는 강진고 일진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장소로 직접 안내하겠다는 뜻이었다.
“저 싸가지를 그냥!”
“대수야, 참아라. 여기서 소란 피울 필요 없잖아.”
강진고 부짱이 대수를 막았다. 그러고는 다른 동료에게 눈짓하여 원석을 따라가게 했다. 도망치지 않게 잘 감시하라는 의미였다.
“씨발. 이게 무슨 황당한 꼴이냐?”
“조용히 걸으라고 했지.”
대수는 원석의 뒤를 따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걸었다.
“뭐야? 힘들게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잖아?”
“어차피 내려갈 거잖아. 제발 입 좀 다물고 따라가자.”
원석과 강진고 일진은 반대편 길로 내려갔다.
멀리서 보면 연약해 보이는 원석이 덩치 큰 놈들을 끌고 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들이 완만하게 꺾인 골목으로 들어서자 동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석이란 애가 왜 저러지? 내가 따라가는 것을 알고 있었나?”
동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죽지 않고 일진을 상대하는 모습은 좋았지만 현실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점점 실력이 늘어나는 동빈의 미행을 알아챘을 가능성도 거의 희박했다.
“원석이가 무슨 잘못이냐… 강진고 일진들이 문제지.”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었다. 동빈은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동작으로 강진고 일진회를 따랐다.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골목.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변 환경이 더욱 삭막해졌다. 재개발을 하려는지 여기저기 부서진 집들이 점점 늘어났다.
“진짜로 으슥하네. 저놈 무덤 자리로는 딱이야.”
“입 다물라고 했지.”
“너 왜 이러냐?”
괜히 무안을 당한 대수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부짱의 표정이 계속 좋지 않았다.
“왜 저런 새끼를 건드려서 골치 아프게 만들어.”
“저런 새끼가 기어오르는데 보고만 있어? 범생이 때렸다고 선생들이 지랄할 것 같아서 그래? 존나! 짤려도 내가 짤리면 되잖아!”
“내가 선생들 무서워하는 거 봤냐?”
“그럼 왜 이러는 거야? 저 새끼가 독종이라 그러냐? 기어오를 때마다 존나 밟아 주면 된다니까?”
“이 미련한 새끼야. 개념 없이 덤비는 놈은 밟으면 그만이지만 공부 잘하는 새끼들은 돌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알아? 머리만 좋다고 다 공부 잘하는 것 같아? 저런 놈들이 더 독종이야.”
부짱은 원석이 이렇듯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 머리 좋고 끈질긴 놈들과 싸워서 이득될 건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골치 아프면 빠져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잖아. 저 새끼 죽이든 말든,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대수는 씩씩대며 성큼성큼 걸었다. 부짱의 충고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래서 공부 못하는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부짱은 짜증 섞인 푸념과 함께 걷는 속도를 높였다. 솔직히 강진고 부짱이 모범생 하나 처리하려고 직접 나선 건 아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애들이 큰 사고 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었다.
원석과 다른 놈들은 반쯤 무너진 건물 내부로 사라졌다.
잔뜩 열 받은 대수도 씩씩거리며 코너를 돌았고 부짱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살금살금.
몰래 뒤를 밟는 동빈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접근해서는 살며시 건물 내부를 살펴보았다.
갸웃?
동빈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다.
방금 들어간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건물 안에 있었다.
‘으응? 저놈들은 또 뭐지?’
동빈처럼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들이 꽤나 되었다. 강진고 일진들과 정체불명의 무리가 대치 상태를 형성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군. 대체 어디 놈들이야?”
뜻밖의 장면이었지만 강진고 부짱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우리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놈들이 선량한 학생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문제지.”
일진회와 작정을 하고 맞설 정도라면 보통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중에서 벙거지 모자가 리더인 모양이다. 강진고 부짱과 가시 돋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떳떳한 놈들이 왜 정체를 감추지? 어디 소속이야?”
‘진짜 저놈들은 누구지?’
동빈도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부짱과 벙거지의 대화를 경청했다.
“강진고 일진회. 소문보다 상당히 말이 많은 편이군. 아니면… 겁이 많은 건가?”
“나도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아. 그냥 때려눕히고 묻는 게 빠를 거 같거든.”
대화는 생각보다 짧게 끝나고 말았다.
마침내 실력대결로 들어선 것이다. 일부러 숫자를 맞춘 것인가? 원석을 제외하고 공평하게 오 대 오의 대결이었다.
“준호야. 어떤 실력인지 대충 알아봐라.”
“이 새끼들아! 강진고 일진을 뭐로 보고!”
강진고 부짱이 눈짓하자 육중한 체구의 학생이 뛰어들었다. 기합이 확실히 들어간 모습이었다.
“침착하게 상대해.”
“알았어.”
정체불명의 무리에서도 하얀 모자를 쓴 사람이 튀어나오면서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후웅.
하얀 모자는 준호의 주먹을 살짝 피했다.
날렵한 체구만큼이나 빠른 몸놀림이었다. 상대의 중심이 흩어지자 곧바로 발차기를 시도했다.
퍼억.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준호는 팔목으로 하얀 모자의 발차기를 막았다. 연속 공격을 시도하려 했던 하얀 모자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공격이 막힐 줄은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으응? 특공 무술?’
하얀 모자는 특공 무술을 배운 것이 확실했다. 전체적인 몸놀림이나 공수 방어 동작이 깨끗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실전 경험은 별로 없는 모양인데?’
하얀 모자의 기술은 웬만큼 완성되었지만 강진고 준호의 막싸움에 밀렸다. 체격과 경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푸악.
준호는 발차기를 그냥 맞으면서 주먹을 작렬시켰다.
하얀 모자의 어설픈 발차기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상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어딜 까불어!”
퍽퍽퍽!
준호는 기술에서 뒤졌으나 실전 경험과 힘에서는 압도적인 우세를 지켰다. 하얀 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깊게 눌러쓴 모자가 벗겨졌기에 확실한 표정이 드러났다.
‘저놈들도 학생 같은데?’
아무리 잘 쳐줘도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 동빈은 한 발 가까이 다가서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곧 끝나겠군… 저렇게 불완전한 실력으로 왜 덤빈 거야?’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렀다. 준호가 파상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며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정체불명의 무리도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 네가 도와줘야겠다.”
“알았어.”
동료가 위기에 처하자 감색 모자가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진고에서도 한 놈이 튀어나왔다.
두 번째 대결 역시 강진고의 압승이나 다름없었다. 감색 모자는 시작과 동시에 난타를 당하는 형편이었다.
‘저놈들 모든 면에서 강진고에게 딸리잖아? 경험도 부족하고… 패기도 부족하고…….’
뜻밖의 등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대결의 결과는 참혹했다. 이제는 벙거지 모자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혼자서 다섯과 붙어야 하는 불리한 처지였다.
“그만! 모두 수고들 했으니 들어와라.”
우르르.
벙거지 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신나게 얻어터지던 놈들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분주했다. 흐르는 피를 닦으며 벙거지 모자의 뒤쪽에 몸을 숨겼다.
“진짜 재미없네… 그런 실력으로 덤빈 거냐?”
강진고 부짱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형편없다는 놀림이었다.
“역시 강진고 일진이야… 강북에서 제법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허접한 일진회하고는 차원이 달라…….”
“아! 이제 생각났다. 네놈들이 요즘 한창 날치고 다닌다는 놈들이지? 요상한 모자 쓰고 전국에 있는 일진회와 붙는다고 하던데?”
부짱은 뭔가 생각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와 비슷한 싸움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우리 소문이 벌써 그렇게 퍼졌나?”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야. 소문보다 형편없는 게 밝혀졌잖아. 벙거지 네놈이 리더인거 같은 데… 어때? 나랑 한번 붙어 볼까?”
강진고 부짱은 직접 나설 기세였다. 확실히 싸움을 매듭짓겠다는 행동이었고 벙거지 모자는 한술 더 뜨는 반응을 보였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혼자는 안 될 거야. 한꺼번에 모두 상대해 주지. 참! 대수란 놈은 빼고… 저놈은 우리 원석이 상대니까 말이야.”
“뭐, 뭐라고? 이 새끼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벙거지 모자의 대답은 강진고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대수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벙거지 모자의 정면으로 우악스럽게 파고든 것이다.
“힘만 믿고 깝치는 놈이군.”
벙거지는 아무런 방어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가 뛰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폼만 잡는 새끼들! 구라나 존나 까고 다니고!”
“소문을 믿으라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잖아?”
파팍-.
벙거지가 움직인 것인가? 사납게 뛰어들던 대수는 주춤했다.
눈앞에서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잔뜩 움켜쥔 주먹이 무색해지는 상황이었는데…….
“마구잡이 싸움에는 한계가 있지.”
“……!”
대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벙거지가 어느새 자신의 목을 쥐고 있었다. 서둘러 물러서려 했지만 갑자기 손목이 시큰해졌다.
으득.
뼈 부러지는 소리.
벙거지가 대수의 오른손을 완전히 꺾어 버린 것이다.
“크악!”
대수의 뒤늦은 비명이 터졌다. 부지불식간에 당해서 축 늘어진 팔을 보고야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벙거지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빠각빠각.
강력한 팔꿈치 공격이 연이어 대수의 관자놀이에 쏟아졌다.
얼굴이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심하게 비틀거리던 대수는 엎어치기까지 당하고 말았다.
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