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동빈은 또다시 지구대를 방문했다.
확인서를 끊어 주며 다시는 오지 말라던 장 순경의 부탁을 정면으로 거부한 행위였다.
“안녕하십니까, 장 순경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뭐, 뭐야? 또 온 거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던 장 순경은 주춤했다. 크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동빈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번에 청소를 못 한 곳이 있어서 마음에 걸렸고… 이왕 시작했으니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니, 내 허락도 없이 봉사 활동을 나온 것은 둘째 치고… 오늘은 왜 이리 일찍 온 거야? 학교 안 가?”
지금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무리 봉사 활동이 중요해도 수업까지 빠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개교기념일입니다. 더 일찍 올 수도 있었는데… 오전에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왔습니다. 뭐… 4시간 이상은 잘 끊어 주지 않기에 일부러 이 시간에 찾아온 건 아닙니다.”
“진짜 골치 아픈 놈이네…….”
장 순경에겐 4시간이나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벌써 복장까지 챙겨 입은 것을 보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좋아… 한 번만 눈감아 주는데… 대신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다.”
“네, 알겠습니다.”
동빈은 거수경례까지 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본격적으로 청소할 태세로 접어들었다.
“이봐. 다 좋은데 빨간 고무장갑은 뭐야?”
“이거 말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빨간 고무장갑은 너무 어색해 보였다. 당당한 체구와 전혀 맞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진짜 청소부도 아니고 말이야…….”
“저도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분홍하고 빨강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분홍보다는 빨강이…….”
“아니다. 그냥 청소나 열심히 해라.”
장 순경은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든 모양이다.
곧바로 초연한 표정을 짓고는 동빈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자기 자리로 향했다.
강진고등학교 인근은 말썽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대놓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많았고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장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짭쌔 둥지… 오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또 뭘 하려고?”
철없는 중학생들이 지구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빈에게 아지트를 빼앗긴 놈들이었다.
“학교에서 뭔 일만 생기면 우리를 의심하고 말이야… 졸라 빠른 고딩에게 당하고 짭쌔한테 당하고… 우리가 동네북이야?”
“그만 하자. 짭쌔 건드려 좋을 거 없잖아.”
“너희는 분하지도 않냐? 허접한 새끼들까지 우습게보잖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보여 줘야지.”
“파출소에 낙서하는 게 뭘 보여 주는 거냐?”
철없는 중학생들은 대놓고 난동을 부리지는 못했다.
낙서나 쓰레기 투척 같은 방법으로 지구대를 괴롭혔다. 경찰에게 반항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려는 수작이었다.
“오늘은 단단히 준비해. 마침 좋은 목표를 발견했다.”
“뭐야? 파출소 쓰레기 훔치려고?”
그들이 노려보는 것은 지구대 측면에 쌓인 쓰레기봉투였다. 훔쳐 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경찰을 돕는 행동에 가까웠다.
“미쳤냐? 남의 쓰레기를 왜 가져가냐? 짐만 되게시리…….”
“그럼 뭐 하게?”
“파출소를 쓰레기 천지로 만드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좋은 생각이야. 오늘은 확실히 뭔가를 보여 주자.”
철없는 중학생들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이었다. 목표가 정해지자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살금살금 지구대 측면으로 돌아가서 쓰레기봉투에 접근했다.
“모두 준비됐지?”
“응.”
속이 꽉 찬 쓰레기봉투를 일렬로 세워 놓고 전의를 불태웠다.
엄청난 사건을 벌일 분위기였는데…….
“졸라 밟아!”
“아자! 아자! 아자!”
퍽퍽퍽퍽-!
철없는 중학생들은 죄 없는 쓰레기봉투에 화풀이를 했다.
봉투가 터지면서 온갖 쓰레기들이 쏟아진 것이다. 그들의 의도대로 지구대는 쓰레기의 천국이 되었다.
“뭐 하는 놈들이야!”
“이만하면 성공이야. 졸라 튀어!”
우르르.
고함이 들리자 중학생들은 줄행랑을 놓았다.
세찬 바람이 불면서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휘날렸다. 예상보다 훨씬 엄청난 효과에 중학생들은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우와! 속이 다 후련하다!”
“짭쌔들아! 졸라 고생 좀 할 거다!”
아무리 세게 달려도 전혀 힘이 들지 않다. 휘날리는 쓰레기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 흐뭇해졌다. 지구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이 들자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헉헉… 청소 아저씨… 무지 화났나 보다.”
“우, 웃기지도 않네… 헉헉… 저런 덩치에… 빠, 빨간 고무장갑이나 끼고 말이야.”
철없는 중학생들은 숨을 고르며 지구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청소부로 추정되는 남자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빨간 장갑이 유난히 거슬리는 사람이었다.
“어라? 졸라 열 받았나 보다. 쫓아오는데?”
“파출소나 청소하는 주제에 쫓아와 봤자… 그, 그런데… 뛰는 모습이 어째 낯설지 않다?”
“그러게? 빠, 빨간 고무장갑이… 엄청 빠르다!”
뛰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육상 선수도 울고 갈 속도였다.
허들 선수를 건드린 것인가? 웬만한 장애물을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기운차게 달려왔다.
“마, 마, 마, 말도 안 돼… 설마 졸라 빠른 고딩은 아니겠지?”
“씨발! 뭘 보고 있어! 졸라 튀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동빈의 얼굴을 확인한 중학생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뭐야! 죽고 싶지 않으면 뛰어!”
“미치겠다. 바, 발이 왜 이리 무거워.”
“정신 차려! 신발에 휴지 붙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럼 빨리 떼어 내!”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린 상태다. 신발에 묻은 휴지가 얼마나 무겁다고…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 휴지를 떼어 내려 안달을 했다. 그만큼 당황했다는 증거였고 동빈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또 네놈들이구나!”
화들짝!
급하게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대부분은 포기하고 고개를 떨어트렸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놈이 있었다.
“뭔 놈의 휴지가 이렇게 안 떨어져!”
휴지와 사투를 벌이는 중학생… 양쪽 발에 번갈아 가며 휴지를 붙이는 꼴이었다. 떼어 내려고 밟은 발에 계속 휴지가 붙으니 짜증나 죽으려 했다.
“그만 해라… 휴지가 무슨 죄가 있겠냐.”
“씨발! 거의 다 됐어!”
“미안하지만 졸라 빠른 고딩은… 거의가 아니고 완전히 다 왔거든!”
“……!”
후앙-.
동빈이 거센 바람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던 휴지들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얼마나 가속도를 높였는지 철없는 중학생들을 한참이나 지나서야 정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이리 재수가 없냐…….”
멈춰 선 동빈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분해서 씩씩거리는 행동이 분명했다.
화악-.
“……!”
동빈이 고개를 돌리자 중학생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흔들흔들.
작은 비닐봉지들이 길가에 떨어져 있다. 미세한 바람 덕택인지 허공에 흩날리지 않고 조금씩 흔들리는 정도였다.
“제발… 도망가지 마… 제발…….”
철없는 중학생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땀이 흥건한 얼굴로 보아 심하게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그래… 거의 다 됐어… 그래…….”
어느 정도 다가가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서서히 내밀었다.
자신의 움직임 때문에 비닐이 날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행동이었다.
“조금만 더 접근하면…….”
중학생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비닐을 손에 넣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는데, 그때였다.
부웅-.
“조, 졸라!”
갑자기 나타난 자동차가 모든 일을 망쳐 놓았다.
조금씩 흔들리던 비닐 봉투는 멀리멀리 달아나 버렸다.
“저놈의 똥차를 그냥! 어이구…….”
중학생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없이 멀어지는 비닐봉지를 바라보았다.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사방에 흩어진 쓰레기를 보면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조금만 쉬었다가…….”
잠시 땀이라도 식힐 요량인가? 중학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오랜만의 휴식이었지만 이마저도 용납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뭐 하고 있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화들짝.
나지막한 동빈의 목소리에 중학생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열심히 치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의아할 정도로 기운찬 모습이었다.
“쓰레기 하나라도 놓치면 알아서 해.”
“아, 알겠습니다!”
난장판으로 변했던 지구대는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하염없이 날리던 쓰레기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끼이익.
철없는 중학생을 감시하던 동빈이 다시 지구대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비운 동안 새로운 사건이 터진 모양이다. 강진고 교복을 입은 두 학생이 한 순경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장 순경님. 쟤들은 또 뭡니까?”
“보면 모르냐? 치고받고 싸운 거지.”
동빈도 대충의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치고받고 싸웠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상황 아닌가요?”
“글쎄? 나도 지켜보고 있는 중이야.”
조사를 받는 두 학생은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척 보기에도 불량스러운 학생과 바싹 말라서 연약하게 보이는 학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싹 마른 학생의 얼굴만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최대수, 네가 먼저 때린 거 아니야?”
한 순경도 불량스러운 학생을 먼저 의심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미치겠네. 몇 번을 말해야 돼요? 이놈이 먼저 때렸다고요. 증인도 많으니까 제발 좀 물어보세요. 조용히 길 가고 있는데 이놈이 갑자기 뛰어들더니…….”
“정말이야?”
“한 순경님. 저 최대수예요. 제 성격 모릅니까? 내가 먼저 때리고 비겁하게 오리발 내밀 것 같아요?”
대수는 한껏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너무나 당당한 행동이라 한 순경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못했다.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바싹 마른 학생에게 질문을 돌렸다.
“학생 이름이 이원석이라고 했지?”
“네.”
“저놈 말이 사실이야? 원석 학생이 먼저 덤볐다고 하는데?”
“사실입니다.”
“…….”
한 순경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자신이 먼저 덤볐다고 시인한 것이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야. 저놈한테 겁먹을 필요 없어. 진짜로 학생이 먼저 저놈한데 덤빈 거야? 똑바로 말해 봐.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몇 번을 물으셔도 똑같습니다. 제가 먼저 때렸습니다.”
한 순경은 다시 한 번 확인차 물었지만 원석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대수가 무서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 보세요, 한 순경님. 이놈이 덤비기에 나는 몇 대 때린 것밖에 없어요. 믿어 주세요.”
“시끄러. 네놈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어.”
한 순경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정황을 파악하려 했다.
“양 순경이 이놈들 데려왔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른 학생이 먼저 때렸답니다.”
“진짜 골치 아프네…….”
한 순경은 조사를 잠시 중단했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만날 당하기만 했던 학생이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좋아!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괜히 문제를 키울 필요는 없잖아?”
“무슨 소리예요? 저 새끼가 날 먼저 때렸다고요! 난 피해자예요, 피해자!”
“누가 먼저 때렸든 네놈은 멀쩡하잖아? 그동안 얼마나 괴롭혔으면 이런 학생이 다 덤볐겠어? 진짜 네놈이 떳떳하면 제대로 한번 조사해 볼까?”
“우와! 공부 못하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공부가 아니라 인생을 똑바로 살란 말이야. 아직도 일진회인가 뭔가 만들어서 설치고 있잖아.”
“일진회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래요. 조용히 넘어갈 테니까 제발 그만 하시죠.”
대수는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깊게 들어가 봤자 자신에게 이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원석 학생도 잘한 건 없어. 이런 놈들과 싸워 봤자 몸만 축난단 말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이런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라고. 알았지?”
“네.”
한 순경은 차분한 목소리로 원석을 위로했다. 학창 시절은 짧고 사회생활은 길다는 진리를 설명한 것이다.
“학교에 연락했으니 선생님이 곧 도착하실 거야. 그때 보내 줄 테니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감사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은 좋게 해결되는 분위기였다.
양쪽 모두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미묘한 앙금은 남아 있었다. 대수가 잡아먹을 듯 원석을 노려보는 상황이었다. 가끔은 한 순경의 눈을 피해서 주먹질하는 자세까지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