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90/224)

부릉-.

반장의 차가 석진의 집 근처에 멈춰 섰다.

촬영은 저녁 늦게 끝났고 지금은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비슷했기에 석진과 동빈을 태워 준 것이었다.

“반장 형, 고마워요.”

“석진이 고생 많았다. 그리고 동빈 학생은 나중에 한번 사무실로 찾아와.”

“네, 알겠습니다.”

부르릉-.

반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떠났다. 동빈이 사고를 치긴 했지만 촬영은 잘 마무리되었다. 다시 깡패 역할로 돌아선 동빈은 자신의 실수를 충분히 만회했다. 동빈의 화려한 액션이 몇 장면이 추가될 정도였다.

“석진아, 이거 받아라.”

“뭔데?”

동빈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주었다.

“뭐긴… 이세혁 사인이지. 수진이가 목숨 걸고 받아 달라 그랬다며.”

“고맙다. 그런데 한 장 또 있는 거 같은데?”

“이건 혜영이 거. 캐나다에서 돌아오면 줄 거야.”

“너도 참… 그나저나 저녁 먹고 가라?”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던 석진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직도 미안한 감정이 남은 모양이었다.

“저녁? 너무 늦었잖아.”

동빈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배가 그렇게 고프지도 않았다. 간식으로 나온 빵을 엄청나게 먹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내가 쏘기로 했잖아. 그냥 먹고 가.”

“맞다. 주철이 놈한테 자랑해야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주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동빈은 후미진 식당으로 향하는 석진을 재빨리 따라붙었다.

끼끼끼끽.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석진과 동빈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허름하기 짝이 없었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아저씨들이 좋아할 분위기였다.

영업이 끝난 것인가?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는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엄마 저 왔어요.”

“……!”

석진의 목소리에 동빈은 깜짝 놀랐다.

이곳이 석진이 어머님이 운영하는 식당이란 말인가? 깜짝 놀라기는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구. 우리 아들 잘 놀다 왔어!”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푸석한 파마와 주름진 얼굴… 힘들게 사는 아주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아들의 얼굴을 보자 환하게 밝아졌다.

“엄마, 내 친구 동빈이.”

“안녕하세요. 석진이와 매우 친한 친구인 김동빈입니다.”

“아이구. 뭘 먹이서 이렇게 컸을까? 우리 석진이는 어렸을 때 잘 못 먹여서…….”

“엄마는 또 시작이다. 빨리 밥이나 주세요.”

석진은 재빨리 엄마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저쪽에 앉아 있어. 엄마가 된장찌개 맛있게 해 줄게.”

석진의 어머니는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부산하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매우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너희 식당이었구나. 조금 작지만 괜찮은 편이네…….”

창가에 앉은 동빈은 식당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아부성이 강한 말이었다. 친구가 창피해할까 봐 직접적인 표현은 삼갔는데…….

“우리 식당 아니야. 엄마가 이곳에서 주방 보조를 하고 있어… 우리 집은 그 정도로 부자가 아니거든.”

“…….”

동빈은 할 말을 잃었다. 실수를 한 게 틀림없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주방에서 벌어지는 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려왔다.

“어머나, 주방 아줌마 좋겠다. 공부 잘하는 아들 왔네.”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가진 아주머니가 주인인 모양이었다. 석진이를 슬쩍 쳐다보고는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또 일등 했다고 하던데요?”

“아이구. 나는 잘 몰라. 지가 열심히 하는 거지…….”

“모르긴 뭘 몰라요? 저번에는 성적표까지 가져와서 엄청 자랑하더니?”

“아이구. 무슨 소리여? 내가 글을 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여? 귀찮어. 얼렁 저리 가.”

귀찮은 표정이 아니다. 석진의 어머니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떠들썩했던 주방이 잠잠해지자 동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다행히 석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다. 동빈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면 그만한 각오는 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냐?”

“당연히 부담스럽지…….”

석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행동에 가까웠다.

“석진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거기다 여자 친구도 있고 하물며! 엄청난 효자잖아. 넌 진짜 내 우상이야!”

“미안한데… 나 그렇게 효자 아니야. 중학교 때 엄마 속 무지하게 썩였거든.”

“설마…….”

동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거기다 여자 친구도 있으며 엄청난 효자인 석진이 무슨 말썽을 피웠겠냐는 의문이었다.

“네 팬카페에 누구 때려 달라고 쓰는 애들 있잖아. 난 그 기분 이해할 수 있다. 약해 보이면 괴롭히고 싶은 게 사람의 생리인가 봐. 나도 엄청 당했거든.”

“그래도 넌 잘 극복했잖아. 그놈들에게 자극을 받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지. 지금은 이렇게 공부 잘하고 성격 좋지…….”

“동빈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울래?”

“그, 그렇게 심한 말을…….”

동빈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언제나 부드럽게 말했던 석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날 괴롭힌 놈에게 고마워하라는 소리야? 애들은 장난일지 몰라도 난 심각했어. 나도 자칫했으면 이상한 길로 완전히 빠졌을 거야. 그때 처음으로 가난한 엄마를 원망했거든.”

“…….”

“그만 하자. 음식이 다 됐나 보다. 그리고 아까 말 안 했는데… 우린 알바가 아니라 머리 식히고 온 거다. 알았지?”

끄덕끄덕.

동빈은 조용히 고개만 끄떡였다. 성격 좋은 석진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잠시 후.

자그만 탁자에는 푸짐한 밥상이 차려졌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된장찌개와 열 가지가 넘는 반찬… 아들의 친구가 왔다고 특별히 더 신경 쓴 모습이었다.

“우리 석진이 친구도 맛있게 먹어.”

“네… 고, 고맙습니다.”

동빈은 석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젓가락을 들었다.

반찬이 너무 많은 탓인가? 동빈은 뭐부터 먹을지 갈팡질팡했다.

“우리 아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힘들기는…….”

석진의 어머니는 아들의 먹는 모습을 자상하게 지켜보았다.

동빈이 보기에도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너무 보기 좋아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동빈아, 왜 안 먹어?”

열심히 밥을 먹던 석진이 물었다. 물끄러미 된장찌개만 바라보는 동빈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머, 먹어야지. 된장찌개도 참 맛있겠다… 난 순두부찌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지 알았는데…….”

오늘 동빈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순두부찌개보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많이 적응했다 판단했는데… 아직 느끼지 못한 감정이 더 많이 남았음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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