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9/224)

오전 촬영이 끝났다.

스텝들이 도시락을 나눠 주었고 단역배우들은 쉴 만한 곳을 찾아서 식사를 했다. 깡패와 학생들이 정겹게 도시락을 나눠 먹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석진아, 남는 도시락 없냐?”

“뭐? 벌써 다 먹었어?”

조용히 식사를 하던 석진은 깜짝 놀랐다. 도시락 받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석진은 황당한 얼굴로 동빈을 쳐다보았다.

“도시락이 너무 작다.”

“난 별로 안 작은 것 같은데…….”

아쉬운 표정으로 빈 도시락을 보여 주는 동빈을 볼 수 있었다. 도시락이 작다기보다는 동빈의 먹성이 좋아서 문제였다.

“너무 허무하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내 거라도 더 먹어라. 여기…….”

동빈이 아쉬운 듯 계속 젓가락을 어루만졌고 보다 못한 석진이 자기 도시락을 조금 덜어 주었다.

“괜찮은데… 조심조심… 밥 떨어지겠다.”

동빈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사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빈 도시락을 바싹 들이대며 석진의 밥이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점심은 이것으로 만족해라. 저녁때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정말?”

“당연하지.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석진이가 사는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영광이다. 영광!”

동빈은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석진이 사 준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셋이 먹어도 대부분은 주철과 동빈이 계산을 했다.

주철이야 원래 부자였고 동빈도 용돈의 부족함을 느껴 보지 못했다. 국가에서 받는 연금만 해도 대기업 사원의 월급보다 많았다.

“내가 쏜다니까 그렇게 좋아?”

석진은 괜히 무안해졌다. 얼마나 얻어먹기만 했으면 이런 반응까지 보이는 것일까? 그래도 친구가 기뻐하니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는데…….

“주철이 놈도 너한테는 한 번도 못 얻어먹었잖아! 이번에야 말로 그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야!”

“…….”

동빈이 이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철도 성공 못 한 일을 자신은 해냈다는 희열감에 빠진 것이다.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깡패를 했던 동빈이 마침내 소원을 풀었다. 그토록 바라던 학생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배역도 간단하다. 농구장에서 그냥 열심히 놀면 되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대화할 때, 멀리 보이는 배경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농구장은 수많은 단역배우들로 북적거렸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 감독의 주문이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농구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팅팅팅.

“흐흐흐. 석진아, 어디 한번 뺏어 봐라.”

동빈은 현란한 드리블로 석진을 자극했다. 원체 운동을 좋아하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치사하게… 나 농구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러냐?”

석진은 당연히 불만부터 터트렸다. 동빈의 농구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키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기에 함부로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건 연기잖아, 연기! 돈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자… 간다!”

“……!”

동빈은 간단히 석진을 제치고 농구대를 향해 돌진했다.

운동신경이 무딘 석진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빈은 기막힌 드리블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덩크가 최고지!”

부웅-.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동빈은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한없이 튀어 오르는 모습이 수상하다. 진짜로 덩크슛을 시도할 모양이었다.

“도, 동빈아! 우린 엑스트라야. 절대로 튀면 안 돼!”

“아! 맞다.”

철렁.

석진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또 사고를 칠 뻔한 순간이었다.

동빈은 덩크슛을 포기하고 보통의 러닝슛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우와! 정말 재미없다.”

동빈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석진은 상대도 되지 않았고 농구 실력 또한 마음대로 발휘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냥 쉬엄쉬엄하자.”

“운동은 땀을 흘려야 제 맛인데… 할 수 없지 뭐.”

동빈은 가벼운 드리블로 근질근질한 몸을 풀었다.

실력이 모자란 석진은 공을 뺏는 시늉만 하며 동빈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동빈아, 꼭 음대를 가야겠어?”

“물론이지.”

“운동을 잘하니 체대 쪽으로 바꾸면…….”

“무슨 소리! 난 꼭 전문 연주가가 될 거야. 중거리 슛!”

동빈이 던진 공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골대와의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동빈이 가장 좋아하는 위치였다. 반드시 음대에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던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티잉.

백발백중이던 동빈의 슛이 빗나갔다. 힘이 조금 모자랐는지 링의 앞부분을 맞고 튀었다.

“얼레? 괜히 불안하게시리…….”

동빈은 황당한 얼굴로 튀어 오르는 공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음대에 떨어진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잡는다.”

“그렇게는 안 되지!”

석진이 공을 잡기 위해 뛰어가자 동빈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출발은 석진이 빨랐으나 공은 동빈의 차지가 되었다. 팔을 쭉 뻗어서 석진에게 떨어지던 공을 중간에서 낚아챈 것이다.

“헤헤헤. 약 오르지롱.”

“치사하게…….”

“치사해도 할 수 없어.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거든.”

동빈은 드리블을 하며 농구장 주변을 돌았다.

석진은 공을 뺏는 시늉만 할 뿐 적극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농구보다는 대화 쪽에 무게를 두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소질은 전혀 다를 수 있어. 다른 쪽으로 인생 목표를 정해도 되잖아?”

“글쎄?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동빈은 여유롭게 석진을 따돌리며 대꾸했다. 오로지 음대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혹시… 액션 배우 할 생각 없어? 반장 형이 그러는데 감독님이 널 상당히 잘 봤대.”

“감독이 날 왜 잘 봐?”

“농담하지 말고. 장래 희망 1위가 연예인인 거 몰라? 솔직히 네 인기도 상당하잖아? 팬카페는 들어가 봤냐? 지금은 회원이 10만을 넘는다.”

“팬카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내가 무슨 킬러냐? 일진 때려 달라는 부탁이 워낙 많아야지…….”

선아가 주동이 돼서 만든 동빈의 팬카페 인기는 대단했다.

동빈도 호기심에 들어가긴 했지만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일진회를 박살 내 달라는 학생들의 호소로 넘쳐 났기 때문이었다.

“액션 배우 싫으면 격투기 선수는 어때? 요즘 뜨는 직업이잖아?”

“격투기? 난 싸우는 거 무지 싫거든. 그리고 인기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아. 전문 연주가가 안 되면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어.”

“평범한 삶이라… 그게 가능할까?”

“뭐야? 언제는 내가 평범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간다. 2점 슛!”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방향도 좋고 힘도 적당했다.

골대와의 거리도 상당히 가까웠기에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동빈은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티잉-.

“저, 저건 또 뭐야…….”

동빈의 실수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다른 공이 날아와 동빈의 공을 튕겨 낸 것이다.

동빈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고 석진은 공을 향해 신나게 내달렸다.

“내 꺼다! 내 꺼다!”

“그래… 니 꺼 하세요.”

충격이 큰 모양이다. 동빈은 석진을 따라갈 의욕조차 상실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슛을 실패하다니… 이유가 어찌 되었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티용티용.

마침내 공을 잡은 석진이 어색한 드리블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내 차례지… 제발 살살 막아라.”

아무리 보아도 석진은 운동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동빈이 막지 않아도 조만간 공을 놓칠 분위기였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동빈은 서둘러 황당한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고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석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나간 일은 접어 두고 친구와 재미있게 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치사하게…….”

“치사해도 할 수 없다니까… 그러나 한 가지만 가르쳐 주면 살살 막아 줄 수도 있지.”

“뭐가 알고 싶은데?”

석진은 일단 동빈의 협상에 응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공을 가지고 있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 공부 잘하는 석진이의 꿈은 뭔가 해서 말이야.”

“세상에 그런 유치한 질문을!”

“뭐가 유치해? 빨리 말 안 하면 확 뺏어 버린다.”

석진에게 동빈은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뭐든지 보고 배우려는 처절한 노력이었다. 공을 빼앗는 척 겁을 주면서 석진을 압박했다.

“글쎄… 난 그런 거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마, 말도 안 돼! 공부 잘하고, 성격도 좋고, 게다가 여자 친구까지 있는 애가 왜 꿈이 없어? 나도 있는데 말이야?”

동빈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실망을 넘어서 분노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대통령이라는 꿈이라도 듣고 싶었냐? 솔직히 꿈이 뭐 별거야? 일단은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 되는 거잖아?”

“우와! 너무 현실적인 대답이잖아. 너 같은 모범생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동빈은 석진을 졸졸 따라다니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약속을 했으니 함부로 빼앗는 행동은 삼가는 모습이었다.

“요즘은 현실에 꿈을 맞추는 거야. 그래야 실망도 안 하지.”

“너도 주철이화돼 가는 거냐?”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고… 너무 바싹 붙지 마. 드리블이 안 되잖아.”

“넌 벌써 반칙 많이 했거든.”

석진은 동빈이 앞에만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워킹(트레블링)에 더블드리블은 예사로 범했다.

“허망한 꿈은 일찍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운동도 못하는 내가 이 거리에서 슛을 성공시킬 수는 없잖아. 어리버리 슛∼.”

석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공을 던졌다.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지만 조금 우측으로 쏠린 것이 문제였다.

티잉.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진의 공은 링을 맞고 한참이나 솟아올랐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석진은 대수롭지 않게 실패를 받아들였지만. 동빈의 반응은 달랐다.

“걱정 마! 석진이,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파파파팟.

동빈은 튀어 오른 공을 보면서 힘차게 내달렸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골대를 향해 돌진했다.

“앞에 좀 비켜 줘요!”

“……!”

골대 앞에서 어기적거리던 단역배우들은 당황했다. 우악스럽게 달려오는 동빈을 보고 기겁을 한 것이다.

부웅.

가속도가 붙자 동빈은 그대로 점프를 했다.

화들짝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고 깜짝 놀라서 몸을 낮춘 사람도 있었다.

“나, 날아간다!”

동빈의 탄력은 엄청났다. 비스듬한 자세로 놀라 주저앉은 사람들 위를 멋지게 날아갔다. 떨어지는 공을 한 손으로 낚아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동빈의 몸은 계속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쿠앙!

농구대 전체가 흔들리는 강력한 슬램덩크가 작렬했다.

단역배우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까먹었다. 멍한 표정으로 링에 매달린 동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롱대롱.

“석진아, 감동 먹었냐?”

동빈은 승리의 V 자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석진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우정의 표현이었다. 물론 석진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동빈아 그만 웃어라. 감독님이 무지 화난 것 같거든…….”

“……!”

이제야 동빈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감독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또 저놈이야! 그만 튀어도 된다고 했잖아!”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동빈을 튀지 못해서 안달하는 단역배우로 착각한 것이다.

NG가 난 것은 당연했고 스텝들은 조용히 동빈을 끌고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