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연출부 막내는 슬레이트를 카메라 앞에 들이댄 상태였다.
“28에 1에 1.”
딱!
연출부 막내가 씬, 컷, 테이크 넘버를 외치며 뒤로 빠졌다. 감독의 최종 지시만 남은 것이다.
“액션!”
마침내 전설적인 십칠 대 일의 싸움 장면이 펼쳐지기 직전이다. 이세혁과 깡패들과 대치한 상태에서 연기가 시작되었다.
“네가 고교 쌈짱이냐?”
“그런데? 너희들은 또 누구지?”
깡패들의 위협에도 이세혁은 담담하게 행동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17명이나 되는 깡패들을 노려보았다. 동빈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어째 기분이 이상한데?’
언제나 불리한 숫자로 싸우던 동빈. 이번 영화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동빈은 17명의 깡패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인상만 쓰고 있으면 된다고 했지…….’
리허설도 충분히 했고 간접 경험 또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경험했기에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만!”
본격적인 액션 신으로 넘어갔다. 깡패 1이 주먹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모두 짜인 각본이다. 이세혁은 가볍게 피하면서 발차기를 시도했다. 대역을 쓰지 않고도 훌륭하게 연기했다.
퍼억-.
단 한 방에 깡패 1은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이번 장면은 큰 사고만 없다면 계속 이어지도록 약속되었다. 단역배우인 동빈도 표정 연기를 해야 했다.
‘지금부터는 놀라는 표정.’
동빈은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장면 역시 많이 봤기에 무리 없이 따라 할 수 있었다.
“역시 대단한 놈이군! 모두 한꺼번에 덤벼!”
깡패 2와 3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역할 역시 멋지게 맞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주인공을 노려보고…….’
깡패 17인 동빈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동료들이 쓰러질 때마다 적당한 행동과 표정을 유지했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NG 없이 촬영이 이루어졌다. 약간의 변수들도 있었지만 촬영을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깡패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크악! 엄청 강한 놈이다.”
이세혁의 난타에 깡패 15까지 쓰러졌다. 동빈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놈의 고삐리 새끼!”
깡패 16이 뛰어들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덤비다가 이세혁의 주먹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져야 한다.
‘이때다!’
마침내 동빈의 차례가 되었다. 깡패 16이 쓰러짐과 동시에 이세혁에게 덤벼들었다.
“……!”
갑자기 동빈의 얼굴이 변했다. 뜻밖의 변수가 생긴 것이다.
깡패 16이 잘못 쓰러지는 바람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서둘러 발차기를 하지 않으면 NG였다.
“에이… 씨!”
부웅-.
동빈은 허공에 몸을 띄웠다. 예정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발차기를 하다가 쓰러지는 것이 처음의 역할이었다.
후앙-.
동빈은 쓰러진 깡패 16을 뛰어넘으며 돌려차기를 시작했다.
엄청난 점프력에 이은 강력한 발차기가 이세혁을 노리고 들어갔다.
스팟.
동빈의 발차기는 이세혁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어쨌거나 발차기는 성공한 셈이다. 이제는 멋지게 맞고 쓰러지는 동작만 남았는데…….
“NG!”
“……!”
감독의 고함에 동빈의 가슴은 털컥 내려앉았다. 자기 때문에 NG가 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뭘 죄송해? 아주 잘했구만.”
“네?”
연방 고개를 숙이던 동빈이 멈칫했다.
감독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동빈 때문에 NG가 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혁아, 넌 왜 넘어지는 거야? 그냥 고개만 숙이면 됐잖아?”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NG의 범인은 동빈이 아니라 이세혁이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멋진 장면 놓쳤잖아. 다신 실수하지 마라.”
“네.”
이세혁이 일어서자 감독의 시선은 동빈을 향했다. 매우 흡족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자네의 발차기 정말 멋있었어. 다시 할 수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감독은 동빈의 액션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스텝들은 서둘러 촬영 준비를 끝내고 이세혁도 안정을 되찾았다.
“깡패 16부터 들어간다. 액션!”
감독의 지시에 따라 깡패 16부터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놈의 고삐리 새끼!”
다시 깡패 16이 뛰어들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덤비다가 이세혁의 주먹을 맞고 고꾸라졌다.
부웅-.
동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 몸을 띄웠다. 쓰러진 깡패 16을 뛰어넘으며 돌려차기를 시도한 것이다.
스팟.
엄청난 발차기는 이세혁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동빈은 재빨리 중심을 잡고는 쓰러질 준비를 끝냈는데…….
“NG! 세혁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감독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세혁이 두 번이나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어처구니없이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지만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고교 쌈짱이라는 캐릭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 잠 못 잤어? 피곤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가, 감독님. 저도 왜 이러는지… 갑자기 몸이 굳어서…….”
“됐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
“죄송합니다. 저도 정말 답답하네요.”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세혁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촬영장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침체되었다.
계속 NG를 낸 이세혁은 자리에 앉아서 쉬지도 못했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저기요…….”
동빈은 조심스럽게 이세혁에게 다가갔다.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미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스타라고 해서 단역배우를 깔보지는 않았다. 이세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부터 건넸다.
“발차기를 막으려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지요?”
“응, 몸이 좋지 않은가 봐.”
“제가 좋은 방법 알려 드릴게요. 우선은 불안한 생각을 갖지 마세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마세요.”
“글쎄? 효과가 있을까?”
“효과가 있으면 나중에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그 정도쯤이야 문제없지. 좋은 방법을 알았으니 다시 시작해 볼까.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알았어. 스텝들 준비하고…….”
감독의 지시에 따라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깡패들도 자신들이 쓰러졌던 위치에 다시 누웠다.
“레디… 액션.”
“이놈의 고삐리 새끼!”
깡패 16이 다시 인상을 쓰며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세혁의 주먹을 맞고 고꾸라졌다.
부웅-.
동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 몸을 띄웠다.
쓰러진 깡패 16을 뛰어넘으며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여기까지는 무난하다.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스팟.
동빈의 발차기는 이세혁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얼굴을 살짝 외면하는 이세혁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
느낌이 좋다. 동빈은 맞을 준비를 끝냈고 이세혁의 주먹이 쏟아졌다.
퍼억.
동빈의 고개가 심하게 흔들렸다. 가볍게 주먹을 피하면서 멋지게 나가떨어진 것이다.
감독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마무리만 남았구나.’
땅바닥에 쓰러진 동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세혁의 대사가 끝나면 몸을 일으켜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이 깡패 새끼들아! 다시 덤벼 봐!”
파다닥.
이세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깡패들이 줄행랑을 놓았다.
물론 동빈도 열심히 내달렸다. 도망치는 것에는 이골이 났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게 끝낸 거야!’
동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훌륭하게 역할을 소화했다고 자화자찬했는데… ….
“NG! 멋있게 도망치는 깡패 누구야!”
너무 열심히 뛴 것이 화근이 되었다.
동빈이 달리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깡패들을 추월했다. 멋지게 폼 잡고 있는 이세혁의 카리스마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