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224)

서울 외곽에 위치한 영화 촬영장은 폐교된 학교를 세트장으로 사용했다. 자그만 운동장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화 스텝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촬영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수십 명의 엑스트라들은 한 시간 전에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동빈과 석진도 각자의 역할에 맞는 의상을 입고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진아, 약속이 많이 다르다. 넌 학생인데 나는 왜 깡패냐?”

“미안하게 됐다.”

둘 다 고등학생 역할이 아니었던가? 석진은 교복을 입었지만 동빈의 복장은 매우 불량했다. 조폭들이 즐겨 입는 검은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깡패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한 번만 봐줘라. 우리 알바 소개시켜 준 형이 곤란하게 됐거든.”

동빈의 깡패 역할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키 큰 액션 연기자가 일이 생겨서 대신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동빈이 운동을 잘한다는 사실도 깡패(?)가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학생 영화에 무슨 깡패가 이리도 많이 등장하냐?”

주변은 깡패와 양아치 천국이었다. 조폭들이 단체로 연수라도 나온 분위기였다.

“주인공이 학생인데 주먹으로 전국을 평정한다는 내용이야.”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전국 평정을…….”

“그러게? 누구랑 비슷하지?”

“…….”

동빈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지 동빈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 석진아, 여기 있었구나.”

20대 초반의 남자가 석진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그 역시 동빈과 똑같은 깡패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동빈아, 인사해. 우리 알바 소개시켜 준 반장 형이야.”

“안녕하세요. 김동빈입니다.”

“나도 무척 반가워. 석진이처럼 그냥 반장 형이라고 불러.”

동빈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고 반장도 매우 환영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촬영이 펑크 날 위기를 구해 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석진이 말로는 단역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상당히 낯이 익은 얼굴이네? 꽤 경험이 있나 봐?”

“네… 몇 편 찍기는 찍었죠.”

정확히 말하면 찍힌 것이다. 동빈의 액션 동영상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었다. 몇 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당했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특공 무술을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네.”

반장은 동빈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계속 질문을 던지며 동빈의 실력을 파악하려 했다.

“몇 단이지? 무술 감독이 워낙 깐깐해서 말이야.”

“공인 5단입니다.”

“5단? 특공 무술만?”

“네.”

반장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특공 무술만 순수하게 5단을 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발차기 한번만 보여 줄 수 있나?”

“어떤 발차기로…….”

“아무거나 제일 자신 있는 걸로 해 봐.”

반장은 동빈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단수에 미달되는 사람들을 몇 번 봤기 때문이었다.

차악-.

동빈은 양손을 치켜들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어떤 발차기를 보여 줄지 결정한 모양이다. 오른발로 반원을 그리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상당히 느릿한 동작이었다. 반장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팡!

순간적으로 내뻗는 발차기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환청을 들은 것인가? 마지막 발차기 동작에서는 괴상한 파공음까지 일었다. 동빈의 발끝에서 울려 퍼진 것이 확실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동빈에게 향해 있었다.

“저기요… 발 좀 내려도 될까요. 사람들이 계속 쳐다봐서…….”

동빈은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실전이 아니기에 마음껏 발차기를 한 것이 문제였다.

큰 키에 쫙 뻗은 다리 모양은 거의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미, 미안… 내, 내려도 좋아.”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던 반장이 정신을 차렸다.

동빈은 천천히 발을 내리며 반장의 안색을 살폈다. 만족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반장의 얼굴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제 발차기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 아니… 솔직히 굉장했어. 자세도 매우 좋고, 그런데…….”

“다른 문제라도 있습니까?”

뒷말을 흐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동빈은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영화 액션과 실전은 많이 다르거든. 파워가 너무 강해서 위험해. 자네가 실수라도 해서 주연배우가 맞으면…….”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자칫하면 다른 배우를 구해야 하는 비상사태까지 발생할 수 있었다.

“조금 약하게도 찰 수 있습니다. 대충 이 정도로 차면!”

팡.

동빈은 가벼운 앞차기를 선보였다.

동빈은 약하게 찬다고 찼지만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아직도 위험해… 좀 더 약하게…….”

반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더 약하게 찰 것을 주문했다.

팡팡.

“위험해… 위험해… 아주 위험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동빈이 아무리 약하게 차도 반장은 위험하단 소리만 반복했다.

“발차기 진짜 끝내 준다.”

“홍콩에서 데려왔다는 대역인가?”

좋은 구경이라도 났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에… 또… 분위기가…….’

주목받기 싫어하는 동빈에게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또다시 이상한 일에 휘말리나 걱정이 되었는데, 그때였다.

“까악, 까악!”

갑자기 여학생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촬영장 입구로 회백색 스타크래프트 벤이 들어서자 벌어진 일이었다. 어디서 이 많은 여학생들이 나타났는지 신기할 정도다.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따라다니는 여학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와! 진짜 난리도 아니네.”

동빈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촬영장의 모든 시선이 연예인이 탄 차량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장을 통과한 차량은 촬영 준비가 한창인 장소로 들어섰다.

“아저씨, 비켜 주세요.”

“안 됩니다. 촬영에 방해됩니다. 조금만 물러나 주세요.”

영화사 스텝들은 학생들을 막느라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치열한 몸싸움까지 펼치며 학생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우르르-.

연예인 차량이 멈추자 사설 경호원들이 몰려들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차량 주변에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잠시 후.

차량 문이 열리면서 여자 연예인이 내려왔다.

팬들의 성화가 싫지는 않은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사랑해요!”

순간적으로 경계선이 무너질 뻔했다.

학생들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려고 아우성쳤다.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석진아. 저 여자는 누구냐?”

동빈은 연예인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다. TV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한지민. 이번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야. 드라마가 대박 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지.”

“예쁘긴 예쁘네. 나이는 우리와 비슷한 것 같은데?”

“글쎄, 우리보다 한 살 많을걸?”

“까악! 오빠!”

갑자기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격하게 높아졌다.

동빈과 석진이 대화를 멈출 정도로 엄청난 환호가 쏟아진 것이다.

“쟤는 또 누구야?”

남자 연예인이 차에서 내리자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한지민의 인기를 훨씬 능가하는 장면이었다.

“이세혁. 얼짱에 몸짱이라 인기가 폭발 직전이다. 만능 운동선수라 이번 영화도 대역 없이 찍는대.”

“남자 주인공 같은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인다?”

“응, 이번 작품 끝으로 군대 간다는 소문이 있어.”

“이런 인기를 누리다가… 쯧쯧쯧… 고생 좀 하겠다.”

석진은 혀끝까지 차며 안쓰러워하는 동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을 제대한 예비역이 영장 받은 후배를 바라보는 눈빛과 흡사했다.

“그런 눈빛은 또 뭐냐?”

“뭐… 그런 게 있다. 그런데 석진이, 너 정말 치사하다.”

“뭐가 치사해?”

화제를 돌리려는 수작인가? 동빈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석진을 노려보았다.

“여자 친구도 있는 놈이 말이야, 아까부터 계속 한지민을 뚫어지게 보고 있잖아. 이건 배신이야 배신.”

동빈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한 번 여자는 영원한 여자.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석진이 못마땅한 것이다.

“난 한지민을 본 게 아닌데?”

“어디서 발뺌을! 지금도 보고 있잖아?”

동빈의 의심은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석진의 시선은 아직도 감독과 인사하는 한지민을 향해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난 한지민을 본 게 아니라 이세혁을 보고 있었지.”

“뭐라고? 너 남자한테 관심 있었어?”

동빈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왕따였던 자신에게 접근한 것인가? 화들짝 놀라며 주춤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정신 차려. 수진이가 저 남자 왕팬이야. 목숨 걸고 사인 받아 달라고 했단 말이야.”

“그래… 난 또…….”

이제야 동빈은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회가 하도 각박하다 보니 친구를 의심하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다.

“촬영 시작합니다. 단역배우 분들 준비하세요.”

주연배우들이 도착하면서 촬영장은 더욱 바빠졌다.

리허설을 끝내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선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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