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준비
명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일상적인 생활로 복귀했다.
수련회의 악몽은 서서히 잊혔고 예전처럼 공부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모의고사도 끝났고 오늘은 그 결과물을 확인받는 날이었다.
“박석진.”
“네.”
“아주 좋아. 이 성적만 유지하면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어.”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담임은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성적표를 나눠 주고 있었다.
“강선혜.”
“네.”
“공부 좀 더 해야겠어. 이래서는 원하는 대학 못 들어가.”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결과가 좋은 학생들은 환한 웃음을 지었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 성적표도 받기 전에 난리를 치는 학생이 있었으니, 바로 동빈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기도라도 하는 것인가? 동빈은 양손을 꼭 모은 채 중얼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제발… 찍은 게 모두 맞기를…….’
오죽했으면 이런 기도까지 드리는 것일까. 이번 시험은 진짜 최악이었다. 정답을 맞춰 보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저번보다 더 떨어졌으면 어쩌지? 아, 아니야. 내가 무슨 상상을…….’
솔직히 더 떨어질 곳도 없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지 동빈의 성적은 언제나 바닥을 헤맸다.
“오유나.”
“네.”
‘아! 미치겠다. 가, 갑자기 속이 쓰리고…….’
자신의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동빈은 더욱 불안한 행동을 보였다. 방금 먹은 점심이 소화가 되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다리까지 심하게 떨었고 기도하는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양주철.”
‘이, 이런! 벌써 주철이 차례인가!’
동빈은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성적표를 받으러 나가는 주철을 바라보았다. 그다음이 바로 동빈의 차례였다. 사실 성적표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괜찮군. 이 성적만 유지하면 문제없으니 더 열심히 해.”
“네, 감사합니다.”
주철도 시험을 잘 본 모양이다. 담임은 주철의 어깨까지 두드려 주는 칭찬을 서슴지 않았다.
‘드, 드디어…….’
성적표를 받은 주철이 뒤돌아서자 동빈이 바싹 긴장했다.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이다.
“김동빈.”
“네!”
동빈은 힘차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최대한 당당하게 걸어가 담임 앞에 멈추긴 했는데…….
‘매, 매우 불안하다.’
어째 담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너한테는 진짜 할 말이 없다.”
담임은 조용히 성적표만 전해 주었다. 열심히 하라거나 분발하라는 충고조차 없었다.
“……!”
성적표를 받은 동빈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학을 떠난 정한수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의 역할을 대신 동빈이 떠맡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 더 떨어질 곳이 없었다.
웅성웅성.
담임이 나가자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지, 혹은 어떤 과목에 취약했는지… 혼자서 고민하거나 친한 사이끼리 모여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부들부들.
동빈은 자리에 앉아서 성적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최악의 성적표를 확인할 때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원하는 대학이 아니라, 대학 자체를 갈 수 있는지 의문인 성적이었다.
“동빈아, 왜 손까지 떨고 그래?”
계속 궁상떨고 있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던 것일까? 앞자리에 있던 석진이 찾아와 위로를 전했다.
“마침 잘 왔다… 이 점수로 지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동빈은 축 늘어진 목소리로 성적표를 보여 주었다. 공부 잘하는 석진이는 대책을 찾을 수 있을까? 동빈으로서는 마지막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그, 글쎄… 조, 조금 심하네…….”
석진도 실의에 빠진 친구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성적이 웬만해야 할 것 아닌가? 당황한 듯한 석진의 말투에 동빈은 고개까지 푹 떨어트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동빈이 크게 낙담한 것이 분명했다. 석진이 궁색한 위로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너는 예체능이니까. 실기를 잘하면…….”
“아무리 실기를 잘해도 이런 성적으로는 어려워. 아니 절대 불가능해. 나는 왜 이리 공부를 못하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공부는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이제 시간도 별로 없잖아. 3학년 수능 끝나면 우리도 수험생이 되는데…….”
동빈은 석진을 붙잡고 계속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만큼 마음이 답답하다는 뜻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잖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가능할까?”
“물론이지. 동빈이 너는 할 수 있어.”
석진의 위로가 통했는지 동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빠른 절망만큼이나 자신감도 금세 회복했다.
“좋아!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공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섰어. 석진아! 정말 고맙다. 난 방금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주, 중대한 결정?”
석진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결심을 했기에 이리도 고무된 표정인지 모르겠다.
“공부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견했어.”
“도대체 그게 뭔데?”
“이젠 주철이 놈하고 안 놀아.”
“……!”
곤히 잠들어 있던 주철의 눈이 번쩍 떠지는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동빈은 자신의 공부를 방해한 일순위로 주철을 지목한 것이다.
“야, 야, 야, 거기에 내가 왜 나와?”
“넌, 잠이나 계속 자라. 응?”
주철이 얼굴까지 들이밀며 따졌지만 동빈의 태도는 확실했다. 진짜로 안 놀 모양인지 조용히 주철을 외면했다.
“네가 공부 못하는 게 왜 내 탓이야?”
“너 때문에 싸운 게 몇 번인지 알아? 그 시간에 공부했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어!”
“내가 미친다. 싸움 끝나고 공부했으면 됐잖아? 그리고 말이야, 넌 공부에 소질이 없거든? 대학은 포기하고 싸움으로 고교나 평정해라. 이젠 몇 개 안 남았잖아?”
“야! 그게 친구로서 할 소리냐!”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졌다. 동빈과 주철이 언성을 높이자 학생들은 바싹 긴장했다.
진짜로 둘이 싸운다면 교실 하나 박살 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만 좀 하자. 내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다.”
적당한 시점에서 석진이 끼어들었지만 동빈과 주철의 말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똑같기는! 주철이보다야 내가 훨씬 잘났지.”
“공부도 못하면서 뭐가 잘났다고 그러시나?”
“성질 더러운 것보다 백번 낫다.”
“야! 둘 다 잘났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석진이 언성을 높이자 사태가 조금 진정되었다.
“석진이를 봐서 내가 참는다.”
“그래 여기서 끝내자. 더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동빈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었고 주철은 다시 취침 모드로 들어갔다. 살벌한 분위기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자 석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빈아, 너 알바 할 생각 없냐?”
조금은 뜬금없는 내용인지, 동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석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알바? 성적도 이 모양으로 나왔는데?”
“가끔은 머리를 식혀 줘야 하잖아. 딱 하루만 시간 좀 내라. 이번 주 일요일이거든.”
석진이 동빈을 찾았던 진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풀이 죽은 동빈을 위로하느라 이제야 본론을 꺼낸 것이다.
“나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그냥 사회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글쎄… 하루라도 공부를 안 하면…….”
대화 내용이 많이 수상하다.
누가 꼴찌고 누가 일등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동빈아, 부탁이다. 어렵게 구한 자린데 한 명이 부족해.”
“할 수 없지… 친구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으니…….”
“고맙다. 동빈아. 역시 너밖에 없다.”
석진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동빈이 승낙할 의사를 보이자 석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고맙기는… 그런데 무슨 알바야?”
가끔 뒷북을 치는 것이 동빈의 특징이었다.
승낙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했다. 좋은 자리라면 사람을 못 구해 고생할 리 없었다. 이제야 불안감을 느꼈는지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별거 아니야. 엑스트라 알바.”
“엑스트라? 호, 혹시… 군인 역할 아니야?”
“아니야, 우린 고등학생 역할이야.”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드라마야, 영화야?”
확실하게 마음을 굳히자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샘솟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래. 유명한 영화배우도 많이 볼 수 있고 일에 비해서 수입도 괜찮은 편이야.”
“호∼ 아주 좋아. 영화 출연도 하고 돈도 번단 말이지. 주철아, 내가 영화배우 사인 받아 줄까?”
동빈이 슬슬 주철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더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난 기획사에서 정식 제의까지 받은 몸이야. 물론 귀찮아서 안 한다고 했지. 아직 명함을 가지고 있는데 너 줄까?”
“너 정말 잘났다. 계속 잠이나 자라. 응!”
결국 동빈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