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5/224)

짧은 탈영 그러나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하루가 지났다.

다행히 미군과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아무런 탈 없이 종결되었다. 어떤 배경이 직접적으로 통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장군일 수도 있고 양 회장일 수도 있었다. 동빈의 과거 덕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변수였다.

그리고 동빈과 주철은 특전사 캠프로 무사히 복귀했다.

아직은 햇볕이 따갑게 느껴지는 오후.

주철은 캠프에 오자마자 군장을 싸야 했다. 남들이 편하게 쉬는 시간에 연병장을 혼자 도는 벌을 받고 있었다.

“젠장, 이놈의 무릎… 꼭 필요할 땐 멀쩡하고 말이야.”

주철 특유의 불평은 변하지 않았다. 양 회장의 장담대로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철아, 힘들지 않니?”

“부반장이 웬일이야?”

주철은 유나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더욱 속도를 내어 걸었다.

유나를 떼어 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진짜 땀 많이 흘리네. 여기 시원한 물 좀 먹을래?”

유나는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서둘러 주철의 뒤를 따라가며 생수 통으로 유혹했다.

“됐거든? 방해되니까 그냥 가 줄래?”

“정말 목 안 말라? 얼음까지 있어서 엄청 시원해.”

“야! 부반장, 대체 왜 따라다니는 거야?”

주철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두면 계속 쫓아다닐 것이 분명했다.

“주철아, 우선 물부터 마셔라. 응?”

“물 필요 없다고 했지?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가.”

“저기… 우리 반 장기자랑 말이야…….”

“우와! 미친다.”

주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화를 꾹 참는 행동이 분명했다. 유나처럼 고집이 센 여자는 처음이란 반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철이 네가 제일 적합한…….”

“난 싫다고 했지!”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철은 몸을 획 돌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유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주, 주철아! 우리 반의 명예가 달린 일이야.”

“난 명예 필요 없거든.”

주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고집이라면 주철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주철아, 잠시만 멈춰 봐. 주철아…….”

유나도 결국 포기한 것인가? 몇 걸음 따라가다가 이내 멈춰 서는 모습이었다.

“한 달간 청소 빼 줄게!”

“…….”

어떠한 유혹에도 주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 큰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주철아! 두 달!”

“…….”

“장기자랑 연습하면 훈련이 면제래!”

“……!”

순간적으로 주철의 몸이 굳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이었다. 당장 승낙하고 싶지만 남자의 체면은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 번복한다면 그동안 쌓아올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교관님께 부탁하면 벌 받는 것도 빼 줄 수 있어.”

성큼성큼.

주철의 걸음이 빨라졌다. 유혹을 떨치려는 처절한 몸부림인가? 아니다. 엄청난 속도를 내며 유나에게 다가왔다.

“에이, 목말라 죽는지 알았네.”

화악.

주철은 다짜고짜 생수 통부터 낚아챘다. 그러고는 급하게 뚜껑을 열고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허! 시원하다∼!”

조금은 과장된 감탄사였다. 장기자랑이 아니라 시원한 물을 마시러 왔다는 억지스러운 변명이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러나… 진짜 시원하네.”

주철은 계속 물을 마셨고 유나는 실실 웃으며 쳐다보았다. 주철이 장기자랑에 나갈 가능성이 100”라는 표정이었다.

“주철아, 확실히 장기자랑 나갈 거지?”

“글쎄, 한번 생각할 가치는 있겠지… 그런데 1등 상품이 뭐야?”

“사, 상품?”

부잣집 도련님이 상품 따위에 관심을 갖다니. 유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 장기자랑 1등 하면 뭐 주냐니까?”

“MP3… 조금 구형이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철에게는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이었다. 유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잘됐군! 마침 내 MP3가 고장 나서 바꾸려고 했는데 말이야. 진짜 어쩔 수 없이 나가게 생겼네.”

“정말이지? 진짜로 나가는 거다?”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주철은 박수까지 치며 반색했고 유나의 표정도 대번에 밝아졌다.

“부반장, 지금 당장 연습해도 상관없겠지?”

“당연하지! 빨리 가자. 다른 반 애들도 벌써 연습 시작했어.”

“밀지 마. 힘들어!”

등 떠밀려 가는 주철은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니다. 유나 또한 목적을 달성했기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연병장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지긋지긋한 고생이 끝난 것이다. 공식적인 행사는 장기자랑이 마지막이었다. 내일부터 학교로 가는 것이다. 지겹도록 학교를 싫어했던 학생들조차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뚜벅뚜벅.

선글라스 교관이 임시 무대에 올랐다.

사열대를 급조하여 만들었지만 음향은 물론이고 조명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교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글라스 교관의 위로에 학생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진짜 훈련이 끝났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반응이었다. 선글라스 교관은 씩 웃어 보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려 했는지 언급하진 않겠다. 다만, 공부가 훈련보다는 쉽다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아닌 사람 있나?”

“저요! 저는 공부가 더 지겨워요.”

학생 한 명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장난이 분명했다. 동빈을 빼놓고 자신 있게 나설 사람은 절대 없었다.

“선임 조교, 저 학생 이름 적게. 보충 교육 실시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글라스 교관도 제법이다. 장난을 맞받아치면서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 수련회는 학생들만 고생한 게 아니다. 선생님들도 자네들 못지않은 훈련을 받았다. 박수로 환영해 주기 바란다.”

“우와! 선생님 오신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깜짝 이벤트인가? 무대 뒤편에서 선생님들이 줄지어 나왔다.

오랜만에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자리였다. 학생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지만 선생님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서, 선생님들 얼굴에 독기가 흘러…….”

“말도 안 돼… 살기를 풍기는 선생님도 있어.”

자상했던 선생님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학생들보다 더욱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학생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선생님들을 맞이했는데…….

“이놈들아, 놀랐지?”

“뭐예요! 진짜로 놀랐잖아요!”

환하게 밝아진 선생님들의 모습에 학생들은 난리를 치며 좋아했다. 썰렁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여기서 퇴장한다. 모두 즐겁게 보내기 바란다. 이상.”

우와.

학생들의 환호성은 장기자랑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

무대 조명은 사회자를 위한 불빛만 남겨 두고 모두 꺼진 상태였다.

“양주철 학우의 춤으로 장기자랑의 막을 엽니다!”

창창창!

꽝∼!

사회자의 거창한 목소리와 함께 귀가 먹먹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무대 조명도 한꺼번에 쏟아졌고 학생들의 시선은 주철에게 고정되었다.

“이야∼ 주철이가 꽤나 신경 썼는데?”

“그러게?”

동빈과 석진은 현란한 춤을 추는 주철을 바라보았다. 연예인들이나 입을 법한 의상까지 준비한 모습이었다.

“우와! 저 엄청난 허리 웨이브!”

“주철이 단단히 필 받았다!”

주철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학생들은 열광했다.

보통 춤 실력이 아니다. 묘기에 가까운 춤동작까지 선보이며 학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어울려 춤을 췄고 조교들도 하나 둘 학생들 손에 끌려 나왔다.

“선글라스 교관님 잡아!”

교관을 잡으러 다니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수련회의 밤은 깊어 갔다.

구형 MP3는 주철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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