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224)

경찰서에 때 아닌 순두부찌개 파티가 벌어졌다.

장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양의 식사가 배달된 것이다. 이른 아침 어떻게 이 많은 양을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물론 맛은 기본이었고 모두가 배부르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동빈아, 잘 먹었다. 내가 원래 순두부를 안 좋아하는데. 이번 건 진짜 맛있게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인데… 너희 아버님은 아직이냐?”

주철 아버지의 도착이 늦어졌다. 예정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난 상태였다. 뻔질나게 열리던 경찰서 문이 한참이나 잠잠했다.

“어련히 알아서 오시겠지. 그 나이에 길 잃어버리겠어?”

“쯧쯧쯧… 반항아의 전형적인 행동이로군.”

“미친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주철은 불안하다. 동빈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할지 몰랐다.

“네가 방금 한 말은 아버지가 간절히 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표현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행동이 반대로 표현되는 거야. 전문적인 용어로…….”

“우와… 미친다.”

주철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동빈이 인터넷을 못 하게 막아야 하는가? 이상한 지식으로 사람을 혼란케 만드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이런… 전문적인 용어는 까먹었다. 하여튼, 전문가들이 말하는 해결책이 중요해. 가족 문제는 진솔한 대화로 해결이 가능하지. 주철이, 너도 마음을 툭 터놓고…….”

“아버지… 제발 빨리 오세요.”

갑자기 아버지가 간절히 보고 싶다. 동빈의 어설픈 충고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꽤 고단한 일이었다.

털컹!

주철의 기도가 통한 것인가. 오랜만에 경찰서 문이 열렸다.

주철이 기다리던 사람이 분명했다.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의 신사들은 곧장 주철에게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괜찮습니다, 최 변호사님.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누구세요?”

최 변호사는 금발의 외국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잘 정돈된 금발과 무테안경. 꽤나 지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미국 측과 협상을 벌일 변호사야. 조금만 기다려. 중요한 일부터 매듭지어야 하니까.”

최 변호사는 외국인과 함께 박 형사에게 향했다. 준비한 명함을 전해 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주철이 아버님의 고문 변호사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철 형사입니다. 주철 학생이 빽, 빽, 하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군요.”

박 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문 변호사까지 고용할 정도면 상당한 집안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미군 쪽 재판을 준비할 화이트 앤드 케이스 로펌의 다니엘 변호사입니다.”

“정말 준비를 철저히 하셨군요. 어느새 미국 변호사까지… 우선은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최 변호사는 박 형사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외국인 변호사는 함께 자리하지 않고 미군 소령과 따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변호사는 서류 가방을 열면서 고문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박 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최 변호사의 행동을 주시했다.

“첫 번째, 미군은 공무 수행 중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양주철 학생은 큰 수술을 받았던 환자입니다.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미군 병사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조금 늦었던 겁니다.”

“예? 미군들과 면담이 가능했습니까?”

박 형사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하다. 사건의 담당자인 그조차 입원한 미군을 만날 수 없었다. 아직 조사를 받을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는 미군의 거절 때문이었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철과 동빈 학생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피해자들이 직접 말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진술 확인서까지 받아 왔습니다.”

최 변호사는 미군들이 직접 사인한 문서를 내밀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이해를 못 하겠군요. 강경하게 나가던 미군이 왜 진술서까지…….”

“저희도 의외의 수확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더 많다고 시인하더군요. 그리고 동빈 학생은 어디 있습니까?”

“동빈 학생은 무슨 일로…….”

박 형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미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동빈을 찾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이쪽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요. 동빈 군, 잠시 이리로 오겠나?”

박 형사는 가만히 앉아 있는 동빈에게 손짓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동빈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제가 김동빈입니다. 무슨 일로…….”

“아, 자네가 동빈 학생이었군. 좀 전에 보고도 몰라봤군.”

최 변호사는 약간은 과장된 행동을 보였다. 가까이 있는 것도 모르고 찾은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미군들이 자네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다고 하더군.”

“네? 그놈들이 왜요?”

동빈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뜬금없이 사과라니? 몇 대 맞고 정신 차릴 정도로 개념 있는 놈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글쎄? 몸이 불편해서 직접 못 오니 미안하다며, 나보고 직접 사과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네.”

“그놈들이 사과를 했다면 좋은 일이겠지요. 알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확인서를 써 줄 수 있겠나?”

“네? 확인서요?”

동빈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군의 부탁을 전하고 있는 최 변호사도 비슷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인데 말이야,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진술서를 써 주면서 조건을 걸더군. 동빈 학생이 확실히 용서했다는 문서를 꼭 받고 싶다고… 미군이 왜 이런 행동까지 보이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그, 글쎄요. 저도 모르죠… 너무 머리를 세게 때렸나?”

“…….”

동빈의 황당한 대답에 주위가 다 썰렁해졌다.

박 형사와 최 변호사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오히려 동빈의 머리 상태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는데…….

“최 변호사님.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난감한 상황에 빠진 동빈을 구해 준 사람은 주철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철에게 돌려진 것이다.

“차 안에 계신다고 했어.”

“형사님, 잠시 나갔다 와도 되겠지요?”

“그렇게 해. 그리고 동빈 학생도 다시 자리에 앉아.”

이상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동빈을 돌려보낸 박 형사는 최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괜히 지나가던 행인이 찍은 캠코더가 있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당연히 확인을 해야지요.”

박 형사와 최 변호사는 캠코더에 신경을 집중했고, 주철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주철은 경찰서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나란히 서 있는 3대의 고급 승용차. 선팅이 짙어 누가 탔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살벌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벅벅벅벅.

주철은 뒤통수를 심하게 긁으며 걸었다.

뭔가 껄끄럽다는 표현이 분명했다. 경호원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고 주철은 아버지가 탄 차량 옆에 멈춰 섰다.

기이잉.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움직였다. 검은 장막 같은 유리가 천천히 내려가면서 진중하게 앉아 있는 중년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못난 놈…….”

중년 신사는 주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한 상태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주철도 염치가 없는지 시선을 아래로 두고 대답했다. 괜히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 뭉그적거렸다.

“그래도 다친 곳은 없나 보구나.”

“정말 뜻밖이네요? 제 몸이 그렇게 걱정되셨어요?”

주철은 깜짝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매우 과장된 표정으로 보아 빈정거림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또 삐딱하게 나오는구나. 네 짐작대로 돈을 걱정한 것뿐이다. 지금까지 네 수술비로 들어간 금액이 얼만지나 아느냐?”

“좋게 생각하세요. 6백만 불의 사나이를 아들로 두셨으니 당연히 기뻐하셔야지요.”

“됐다. 그만 하고 어서 차에 타거라. 사람들이 본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에 있겠습니다.”

주철은 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했다. 아들의 고집을 아는지 아버지도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다.

“정신 좀 차리라고 특전사 캠프로 보냈더니 미군이나 패고… 아비에 대한 불만의 표시더냐?”

“아니에요. 그놈들이 한국 사람을 괴롭히기에 손 좀 봐 줬어요.”

“쯧쯧쯧… 네 앞가림도 못 하는 놈이 누굴 돕겠다고 설치고 다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도 더 이상 말하기 지쳤다. 그런데 진짜 안 탈 것이냐?”

“네, 안 탑니다. 캠프로 돌아가기로 친구랑 약속을 했거든요.”

주철은 차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절대로 차에 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캠프로 다시 돌아가면 고생이 심할 텐데? 내가 특별한 당부를 해 뒀거든?”

“괜찮아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런 놈이 왜 캠프까지 탈출해서 사고를 친 것이냐?”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부탁이라고? 뭔지 모르지만 들어는 봐야겠지.”

주철 아버지는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부탁? 주철이 당당하게 요구한 적은 많아도 부탁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왕 변호사 쓰신 김에 좋은 일 한번 하세요. 미군한테 맞은 사람들 좀 도와주세요.”

“난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않는다. 너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

“네, 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부탁한 제가 멍청한 놈이지요.”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들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아버지의 음성은 한층 낮아졌다. 둘 사이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격한 분위기로 치달은 뒤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주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뚜벅뚜벅.

최 변호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미소는 승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주철아, 회장님을 또 화나게 했구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닌데요.”

최 변호사는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탐지했다.

주철의 안이한 생각과는 반대로 한두 번 아니라 문제라는 표정으로 변했다.

“차에 타지 않을 것이냐?”

“네… 고생하셨으니 편안하게 올라가십시오.”

딸깍.

주철은 문까지 대신 열어 주었다. 빨리 떠나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래, 잘 해결됐으니 어서 들어가 봐.”

“수고하셨습니다, 변호사님.”

“수고는 무슨…….”

최 변호사는 별소리 다 한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랐고 주철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 문을 닫았다.

기이잉-.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창문이 서서히 닫혔다.

주철은 괜히 땅바닥을 걷어찼고 양 회장은 아들을 외면했다. 검은 창문이 완전히 닫히자 차량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됐지?”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곧 훈방 조치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예상보다 일이 순조롭게 풀렸어…….”

양 회장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미세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에 있는 최 변호사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주철이가 사고를 칠 때마다 일부러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최 변호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주철이 사고를 칠 때마다 양 회장은 급한 약속까지 미루고 찾아왔다.

“이래야 저놈이 사고를 조금 덜 치지. 내 얼굴 보기 싫어서라도 말이야.”

“회장님도 농담을 다 하십니다.”

“농담이 아니야. 저놈은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 준 놈이지. 이럴 때 아니면 얼굴 볼 기회도 없으니… 겸사겸사 왔다고 생각하게. 어서 출발해.”

부릉.

양 회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동이 걸렸다.

경호원들은 서둘러 철수했고 주철은 물끄러미 아버지가 탄 차량을 쳐다보았다.

부르릉.

고급 승용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경찰서를 벗어났다. 차량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주철이 움직였다.

“순두부찌개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음료수라도 좀 뽑아 주시지…….”

주철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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