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침묵은 통역 장교가 먼저 깨웠다.
“충성!”
삼성장군임을 확인하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뚜벅뚜벅.
주위를 한 번 살펴본 장군은 천천히 통역 장교에게 다가갔다. 경찰서 내부는 장군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분위기였다.
“수고가 많군. 나중에 보세.”
“감사합니다.”
장군은 통역 장교를 지나쳐 박 형사에게 다가갔다.
요즘은 동빈이 때문에 경찰서를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졌다. 누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한 행동이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동빈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 예… 아드님의 사건을 맡고 있는 박정철 형사입니다.”
박 형사는 약간 주눅이 든 모습으로 장군과 악수를 했다. 거물급을 처음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대리인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장군처럼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장군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닙니다. 피해자 측과 이야기 좀 나누겠습니다.”
장군은 박 형사가 권하는 자리를 사양하고 소령을 쳐다보았다.
대략적인 내용은 동빈과 전화 통화를 했다. 가장 큰 걸림돌부터 해결하겠다는 행동이었다.
“Good morning, sir.”
“소령도 수고가 많군.”
미군 소령의 경례를 장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받았다. 주변을 사로잡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삼성장군이라는 위치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분위기였다.
“소령은 조사관의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인가?”
장군은 소령의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통역 장교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려 했는데…….
“조사관의 자격으로 왔는지 장군님께서 물으십…….”
“통역 장교는 빠져 있어. 난 소령에게 직접 대답을 듣고 싶다.”
“……!”
장군의 제지를 받은 통역 장교는 흠칫했다. 미군 소령의 눈빛이 변하자 장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낯이 익은 걸 보니 한국에서 오래 근무한 모양이군. 한국말을 전혀 못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장군님. 아직은 한국말이 서툰 편입니다. 공무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야? 한국말 엄청 잘하잖아?”
소령의 능숙한 한국말 솜씨에 박 형사는 황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왠지 감시를 당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소령, 아까 한 질문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은데?”
장군은 주위가 산만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잠시 박 형사를 쳐다보았던 미군 소령은 다시 장군을 바라보았다.
“조사관의 자격이 맞습니다. 미합중국은 자국민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는 차후에 따질 문제입니다.”
“미국의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필사적이지. 부러운 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본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령의 말을 경청했다. 미군에 대한 칭찬일 수도 있었고, 한국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미국 시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군님의 아드님이 연루된 것은 유감입니다. 저는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한국말이 서툴다고 하더니 꽤 잘하는군. 이젠 내 입장을 이야기할 차례인가… 참! 그 전에 재미있는 일화부터 들려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장군님.”
소령은 흔쾌히 승낙했다. 장군은 잠시 회상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신병 훈련소의 부대장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지. 민간인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라 청소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어. 입소자들의 가족들이 버리는 쓰레기가 최고의 골칫거리였지. 민간인이라 군인들의 말을 듣지 않더군.”
“미국이나 한국이나 민간인들이 다 그렇죠.”
소령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박자를 맞춰 주었다. 장군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말이야, 입소자의 가족들이 쓰레기를 버리면 한마디만 하라고 했지. 방금 버린 쓰레기는 방금 입소한 자제분이 주워야 합니다.”
“하하하. 부대가 훨씬 깨끗해졌겠군요.”
“제법 효과를 봤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장군도 웃고 소령도 웃고.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할 웃음이 분명했다.
“장군님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내가 지금 그 부모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아. 한국의 안보를 지켜 주는 미군이니 혜택을 줘도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가졌었는데… 내 자식이 관련됐다고 하니까 입장이 달라지는군.”
“무슨 뜻입니까?”
“군인이란 신분을 떠나 그리고 장성이란 계급에 상관없이 자식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장군의 의지는 확고했다. 미군의 의사와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장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한미 관계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악영향이라는 표현 자체가 탐탁지 않아.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지 않는가?”
“이건 명백한 월권입니다.”
“잘 들어, 소령. 미군한테는 SOFA란 엄청난 무기가 있잖아. 내가 원하는 것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이야. 자식이 공평한 대우를 받게 만들어 주는 것이 월권인가?”
“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사관의 신분으로 보고 들은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나도 내 방식대로 이 일을 처리할 생각이야.”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기나긴 말싸움은 끝이 났다. 양측의 입장이 너무 달랐으니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었다.
“보좌관! 잠시 들어오게.”
장군은 자신의 의지를 즉시 실행에 옮길 모양이었다. 약간은 격양된 목소리로 보좌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장군님.”
“이리 가까이 오게.”
마음을 가라앉힌 장군은 귓속말로 명령을 전달했다.
“우선 한미 연합 사령관께 면담 신청을 넣도록. 그리고 국방 장관님께 오늘 사건을 보고할 것이니 따로 자료를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동빈이가 미국 정부에서 받은 표창과 훈장 내역을 작성해.”
“비공식적인 것까지 다 포함합니까?”
“물론이지. 그리고 병원에 있는 놈들에게 압력을 넣어 두고… 누구에게 덤볐는지 대략적인 눈치만 챌 수 있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명령을 하달한 장군은 곧장 동빈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충분치 않은지 슬쩍 시계를 보고 입을 열었다.
“동빈아, 아비는 이만 가야겠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런데 옆에 있는 학생은 누구지?”
“안녕하세요. 동빈이와 같이 사고 친 양주철입니다.”
주철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당히 예의 바른 인사였다.
“반갑군. 이번 일은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이니 부모님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드려라.”
“감사합니다.”
“나중에 집으로 한번 놀러 오너라.”
주철의 어깨를 토닥여 준 장군은 출입문으로 향했다. 서두르는 모습을 보니 시간을 많이 지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주춤.
급하게 발길을 옮기던 장군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대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 아까 보니 SOFA에 불만이 많던데?”
“제 동기들이 미군에 폭행을 당하고도 치료비와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장군님 같은 배경이 없기에 더 심하게 좌절할 겁니다.”
“SOFA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알고 있다. 대한민국 장성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또한 오늘 피해를 본 학생들은 내 개인적인 자격으로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정말입니까?”
대학생들은 의외라는 반응이다. 쓸데없는 데모를 하지 말라는 장군의 충고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난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이야. 한번 말한 것은 꼭 지킨다. 자네들 식사는 했나?”
“아, 아니요.”
“농성을 하더라도 밥은 먹고 해야지. 보좌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빼고… 대학생들과 피해자 가족 분들께 아침 식사를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로…….”
“이런 곳에 오면 두부를 먹어야지. 모두 순두부찌개 돌려.”
“네, 알겠습니다.”
대학생들까지 챙긴 장군은 서둘러 문을 빠져나갔다. 경찰서에 남은 사람들은 장군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동빈아, 너의 아버지 진∼짜! 멋있다.”
주철은 난리를 떨었지만 동빈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군중들을 사로잡는 장군의 모습보다 순두부찌개를 시켜 준 마음이 더욱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