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2/224)

휴식은 길어졌고 경찰서는 어수선함 속에 평화를 맞고 있었다.

미군 소령은 어디론가 통화하기 분주했고 학생들의 항의도 계속되었다.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이냐? 너답지 않게.”

“…….”

동빈은 주철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이중 국적을 밝히고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너도 정체성의 혼란 같을 걸 느끼고 있는 거냐?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냐?”

주철은 이제야 동빈에게 관심을 보였다. 기분이 상한 말투는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뉴스에서 많이 나왔잖아. 인터넷 보니까 여러 가지 사연도…….”

“동빈아, 난 그런 거 아니거든? 내 스스로 미국 국적을 포기할 생각이야. 아버지 때문에 잠시 미뤄 둔 것뿐이야.”

주철은 동빈의 말을 끊었다. 귀찮다는 반응은 아니었다.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과는 연관이 없다는 항변이었다.

“그럼 왜 표정이 시무룩하냐?”

“짜증 나서…….”

“그러니까.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짜증 난 거 아니야?”

“제발… 정체성 이야기는 그만 좀 하자!”

“…….”

주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동빈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정체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동빈의 눈빛이 말해 주고 있다. 주철이 뜨끔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동빈아, 내가 짜증이 나는 건, 이번에도 우리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이야. 미국 국적 포기하겠다고 대판 싸운 적이 있거든.”

“그래서?”

“미친다.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법 제대로 지키고 성실하게 살면 손해 보는 세상이잖아. 너는 짜증 안 나?”

“글쎄… 나는 네가 그런 말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에이, 관두자. 너랑 무슨 진지한 대화를 하겠냐.”

주철은 답답한 심정을 안고 조용히 외면했다.

동빈에게 너무 많이 기대한 것이다. 싸움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인간관계는 영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저기… 주철아?”

“야! 또 정체성 이야기하려고 했지!”

동빈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주철의 화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예전에도 이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상한 여자와 아는 사이 아니냐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사건을 주철이 기억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잘못 짚었다.

“아, 아닌데? 파스 좀 남았냐고…….”

“파, 파스… 여, 여기…….”

주철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게 분명했다. 괜히 무안해진 주철은 서둘러 쓰고 남은 파스를 동빈에게 전해 주었다.

“고맙다. 잘 쓸게.”

“고맙기는… 어차피 너 주려고 했던 건데…….”

“어이, 왜 이리 분위기가 심각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박 형사가 들어왔다.

동빈과 주철의 어깨를 번갈아 다독거려 주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지. 커피 좀 마셔.”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박 형사는 캔 커피를 전해 주었고 동빈과 주철은 넙죽 받았다. 그러지 않아도 뭔가 마실 것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학생들은 부모님께 연락했지?”

“네.”

박 형사는 자신의 캔 커피를 따며 물었다. 동빈은 짧게나마 대답을 했지만 주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이, 빽 좋은 학생은 연락 안 했어?”

“했습니다.”

미덥지 않은 목소리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박 형사는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언제 어디서 출발하셨지?”

“서울에서 40분 전에 출발은 하셨다고 하더군요.”

“늦어도 30분 후에는 도착하시겠군. 동빈 학생은?”

박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빈에게 질문을 돌렸다.

“제주도로 출장 가셨다가 한 시간 전에 출발하셨습니다.”

“제주도? 그 시간에 비행기가 있었나?”

아직 6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다. 제주도에서 새벽 5시에 비행기를 탔다는 말인가? 박 형사가 알기로 그렇게 일찍 떠나는 비행기는 없었다.

“비행기 시간표가 조정되었나? 어쨌든 오래 걸리겠군.”

제주도에서 김포를 갔다가 다시 차로 경기도로 내려오는 것이 가장 빠른 노선이었다. 박 형사는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했다.

“형사님, 걱정 마십시오. 거의 도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야? 제주도에서 한 시간 전에 떠났다며?”

“그런데요?”

“…….”

동빈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박 형사는 말이 막혔다. 무슨 문제냐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저기… 아버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여러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빈이 있는 곳은 경찰서 건물 2층. 차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전투화 소리 같은데? 혹시 아버님이 군인이신가?”

“네…….”

“쯧쯧쯧. 자네 아버님도 참 골치 아프겠군. 한국 군인의 아들이 미군을 때렸으니 말이야.”

박 형사의 목소리와 함께 전투화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다. 몇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 건지 모르겠다. 요란한 발소리가 잠시 주춤하는 순간 경찰서 문이 열렸다.

덜컹.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문 쪽으로 모였다. 워낙 시끄러운 발소리였다. 일부 사람들은 미군이 떼로 몰려온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눈빛까지 보냈는데.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김동빈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경찰서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동빈을 빼놓고는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열심히 통화를 하던 미군 소령도 단단히 얼굴이 굳었다.

“세상에! 쓰, 쓰, 쓰리 스타…….”

박 형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경찰서에 군단장 급이 등장한 것이다. 동빈의 아버지가 뜻밖의 거물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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