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박 형사는 캠코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력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기에 미리 확인하는 것이다. 화면의 시작은 주철이 껄렁껄렁 걸어오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광수라고 했지?”
“그런데요?”
박 형사는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초반부터 이상한 낌새를 찾아낸 모양이다.
“지나가는 행인이 말이야… 왜 이런 걸 찍었어? 사고 친 주철 학생하고 잘 아는 사인가?”
“아니요, 아니요. 그냥 캠코더가 어떤지 시험하려고요.”
“그래?”
광수의 어쭙잖은 변명을 인정한 것인가? 박 형사는 다시 캠코더 화면을 바라보았다. 구형의 캠코더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화면상으로만 당시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먼저 말을 붙인 건 학생이군.”
“말했잖아요. 친구 좀 찾으려 길을 물었다고요. 얼마나 예의 바르게 물었는데요.”
주철은 캠코더 화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앉은 상태에서 대답만 했다.
“무슨 말을 했기에 미군들이 화난 거야?”
“몰라요. 내 친구 인상착의를 설명하니까 저러데요?”
“미안하지만 학생도 화면을 보면서 이야기하지?”
“그러죠 뭐.”
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 형사 곁으로 다가갔다.
캠코더 화면에서는 매우 공손하게(?) 묻는 주철과 인상을 쓰는 미군이 전체적으로 찍혀 있었다. 티격태격하는 화면이 펼쳐졌고 백인 병사가 주먹을 치켜드는 장면은 줌 기능까지 활용했다.
“봐요! 저놈이 먼저 위협을 했잖아요. 나는 혼자였고 저놈들은 4명이고… 정말 무서워 죽는지 알았다니까요.”
“그렇군.”
박 형사는 고개만 끄덕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펼쳐지는 문제의 장면. 주철이 백인 병사의 주먹을 맞는 모습이 리얼하게 포착되었다.
“아, 저 펀치! 진짜 아팠어요. 진단서 끊어서 제출할게요.”
“당연히 그래야겠지… 어라? 왜 화면이 끊겼어?”
주철의 고개가 획 돌아가는 순간 녹음은 끝나고 말았다.
주철이 신나게 싸우는 부분부터 사라진 것이다. 박 형사는 더욱 의심 섞인 눈으로 광수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빠, 빠떼리가 다 돼서…….”
“무슨 소리야. 충전이 풀로 되어 있는데?”
박 형사는 화면 우측 상단에 있는 건전지 모양을 가리켰다. 충전할 필요가 없다는 표시가 선명했다.
위기에 몰린 광수. 잠시 주철을 바라보고는 이내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빠떼리가 만땅으로 있었군요. 저는 진짜 몰랐어요. 이 캠코더 삼촌 거라 잘 몰랐어요. 그런 기능이 있었구나. 볼수록 신기하네?”
“…….”
어색하게 연기하는 광수가 더 신기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게 나았다. 광수의 변명을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철 학생. 미군에게 이런 게 통할 것 같아?”
박 형사는 광수를 제쳐 두고 주철에게 물었다. 주철이 주동자임을 알아챈 행동이었다.
“글쎄요. 없는 것 보다는 백번 낫겠지요.”
“참…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안 선다.”
주철의 당당한 태도에 박 형사는 한숨만 푹푹 쉬는 상황이었다.
“정당방위의 결정적인 증거라니까요?”
“골치 아프네. 증거로 채택될지는 나도 장담 못 하겠다.”
박 형사는 괜히 도와주고 싶다. 안하무인의 미군을 박살 낸 것이 내심 통쾌하기도 했던 것이다. 문제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경찰이라는 신분이었다.
“주철아, 캠코더는 왜 찍은 거냐?”
“너 보고 배웠다. 왜?”
동빈의 물음에 주철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미 다 들통 났으니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의도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지나가는 행인을 잘못 쓴 것 같다.”
“그러게…….”
주철은 여전히 상황 파악 못 하는 광수를 바라보았다. 연신 크게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 잘했지? 그지 잘했지? 그지. 그지.’
주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덜컹!
박 형사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경찰서 문지방 불나겠다.”
박 형사의 어투가 수상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는 반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또 만나게 됐군요.”
“그러게요. 오늘따라 미군들이 사고를 많이 치는군요.”
반갑지 않은 손님은 통역 장교였다. 박 형사는 통역 장교와 뚱한 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이쪽은 미8군에서 나온 에드워드 소령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사건을 담당한 박정철 형사입니다.”
“아녕하시니까. 에드워드입니다.”
통역 장교는 함께 동반한 미군 소령을 소개시켜 주었다. 박 형사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어눌한 한국말로 받아 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박 형사가 의자를 권하자 통역 장교와 미군 소령이 자리를 했다.
박 형사의 책상을 기준으로 정면에는 동빈과 주철 그리고 측면에는 통역 장교와 미군 소령이 위치하게 되었다.
“소령님께서 오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 미군이 관련된 사건이니 당연히 와야지요.”
박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통역 장교는 미군 소령의 말을 그대로 통역해 주었다.
“어떤 사건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미군이 난동을 부린 사건입니까? 아니면… 병원에 입원하게 된 사건입니까?”
박 형사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통역 장교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감 없이 박 형사의 질문을 통역해 주었다.
“소령님이 후자라고 하는군요.”
“그렇군요. 이번에도 신병 요구를 하러 온 겁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통역 장교는 직역으로 의사를 전달해 주었다.
한 다리를 거친 대화였지만 박 형사와 미군 소령,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소령 정도 되시는 분이…….”
“유감의 뜻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미군은 폭행을 행사한 피의자에 대한 한국 당국의 강력한 사법 조치를 원합니다.”
“우와! 미치겠다!”
열 받은 주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국인이 맞았을 때는 별것 아니라고 하더니? 입장이 바뀌니 완전히 거꾸로 나온 것이다.
“주철 학생, 흥분하지 말고 자리에 앉지.”
“형사 아저씨, 자리에 앉기 전에 한 가지 물어 볼게요. 미군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면 한국이 꼭 받아들여야 합니까?”
주철은 간신히 분을 삭이며 물었다. 한국의 재판권을 침해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질문인데… 사실대로 말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미친다. 한국에서는 미군이 완전 장땡이네요?”
이번에도 주철의 작전은 정확히 빗나갔다. 국내에서는 미군을 당할 수 없다는, 짜증 나는 결론에 도착한 것이다.
어이가 없는 것은 경찰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엿듣고 있던 대학생들도 주철의 편에 가세했다.
“어떻게 똑같은 상황인데 결론은 반대가 될 수 있어요?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SOFA라 해도 이건 아니지요. 국제법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없다고요.”
경찰서가 또다시 난장판으로 변한 위기였다. 대학생들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자 미군 소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통적 혈맹인 한미 우호 관계가 퇴색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생각이 너무 위험합니다. 미군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안보는 무슨 얼어 죽을 안보! 학생들에게 맞는 군바리를 어떻게 믿습니까!”
“주철아, 참아. 지금은 화낼수록 손해야. 소령 정도 하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겠냐? 약점 잡힐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동빈은 주철을 만류하기 바빴다. 여기서 또 사고를 친다면 정말 대책이 없었다.
“미친다. 빽에서 밀리기는 처음이네, 진짜…….”
“그래, 잘 생각했다.”
주철이 자리에 앉자 경찰서 전체가 다 조용해졌다. 사건의 담당자인 박 형사는 입장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미군의 입장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원만한 조사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미군 소령의 입장은 달랐다.
“괜찮습니다. 형사님, 계속 조사를 하십시오.”
“수사 내용은 따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초동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미군도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참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알고 계셨군요.”
박 형사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 참았다. 그런 걸 알면서 왜 미군들의 신병을 인도해 갔냐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자! 다시 조사를 진행할까? 차근차근 간단한 인적 사항부터 시작하지. 화 잘 내는 학생, 성명.”
“양주철.”
박 형사의 물음에 주철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빈정거리는 모양이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는 증거였다.
“어디 대학 다니고 있지?”
“대학생 아닙니다. 명성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고, 고등학교 2학년? 그럼 자네 미성년자였어?”
조서를 꾸미던 박 형사가 멈칫했다. 왜 그렇게 겉늙었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사건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경찰서 안에 있던 대학생들도 수군거렸고 미군 소령도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형사 아저씨, 그게 뭐 이상합니까? 미성년자한테 맞고 다니는 미군도 있는데요? 게다가 특수 훈련까지 받았다나 어쨌다나…….”
“특수 훈련이라니?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지?”
미군 소령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용히 참관만 하겠다는 말을 어기고 주철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미군 아저씨, 왜 그렇게 놀라나요? 난 그냥 해 본 소린데 진짜 특수부대였나?”
“…….”
미군 소령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통역 장교와 귓속말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같은 시간, 동빈도 조용히 주철에게 귓속말을 전달했다.
“주철아, 쓸데없는 말은 피하라고 했지?”
“괜찮아. 괜찮아. 우리한테 손해날 건 없잖아.”
주철이 특수 훈련을 언급했던 것은 동빈의 말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동빈과 주철이 귓속말을 끝냄과 동시에 미군 쪽도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었다.
“자네는 미군에게 폭행을 행사하고도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군. 쓸데없는 루머나 만들어 수사에 혼선을 주고 있어.”
“제가 없는 게 참 많습니다. 반성의 기미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지금은 빽도 소용없지요. 그러나! 난 절대 억울한 일은 안 당해. 내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사람으로 보여?”
“주철아, 제발 그만 좀 하자.”
“뭘 그만 해. 내가 저 미군의 얼굴을 똥 씹은 얼굴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난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만들고 사고 친단 말이야!”
탕탕탕.
“주철 학생! 알았으니까. 조사나 빨리 끝내자.”
박 형사는 책상을 내리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대로 뒀다가는 언제 조사가 끝날지 몰랐다. 주철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장면을 확인하고 다시 박 형사가 질문을 던졌다.
“고등학교 2학년이고… 주소가…….”
“죄송한데요, 형사님. 주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왜 안 묻는 겁니까?”
“부모님 직업부터 물어보란 소리야? 아까부터 빽, 빽, 하던데… 배경이 꽤 든든한 모양이야? 부모님이 정치인이라도 되나?”
박 형사는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찰 생활에서 가장 짜증 나고 골치 아픈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배경이 든든하면 뭐 합니까? 미군에게는 소파라는 엄청난 배경이 있는데요.”
“그럼 뭘 물으란 소리야?”
“당연히 국적부터 물어보셔야지요.”
“구, 국적? 주철 학생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가?”
“한국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국적이 또 하나 있거든요. 아버님이 미국 국적 포기하지 말라고 만류했던 게 이렇게 고마울 줄은 몰랐네요.”
“……!”
미군 소령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주철의 장담대로 뭐 씹은 표정과 비슷할 수도 있었다. 주철이 미국 국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모양이다.
“미성년자를 때리는 군인이 미국에서 얼마나 대접받나 모르겠네요. 어차피 변호사 싸움이니까. 우리 아버지 발이 꽤 넓어서 변호인단까지 구성할 겁니다. 어디 미국 법정에서 붙어 봅시다. 판사에게 한국 사람은 때려도 괜찮은데 왜 미국인은 안 되냐고 따져 보시지요?”
“…….”
미군 소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 형사도 골치가 아픈지 조사를 잠시 중단할 것을 선언했다. 뜻하지 않은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