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80/224)

경기도의 한 경찰서는 여전히 시끄럽다.

항의하는 대학생들은 거의 농성 수준이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피해자들의 부모들까지 섞이면서 더욱 어수선해졌다.

“미군 놈들 얼굴이나 보자는데, 왜 안 된다는 거여?”

“벌써 신병을 인도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여기서 말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제발 돌아가세요.”

경찰들도 죽을 맛이었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박 형사, 많이 피곤하지?”

“미군 사건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학부모들의 시달림에 지친 형사가 책상에 앉았다. 상관의 위로도 별로 소용없는지 고개부터 푹 숙였다.

“힘들더라도 미치지는 말라고. 또 사건 터졌으니까.”

“반장님, 이번에는 어떤 사건입니까. 차라리 그 사건을 제가 맡겠습니다.”

박 형사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애원했다. 미군 폭행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잘됐군. 나도 마침 자네를 시킬 생각이었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반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이번에도 미군이 관련된 폭행 사건이거든.”

“네?”

박 형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반장의 표정을 살펴보니 잘못 들을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자네의 영어 실력이 제일 낫잖아. 수고 좀 하라고. 김 형사가 신고받고 갔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

어깨를 토닥여 주는 상관의 손길이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은 사건을 두 건이나 맡게 되었으니… 무슨 핑계라도 만들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덜컹.

박 형사의 마음을 아는지 경찰서 문이 열렸다.

물론 저절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 미군 폭행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김 형사가 돌아온 것이다.

“김 형사, 이번에도 진짜 미군이야?”

제발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김 형사의 대답은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네, 미군이 관련된 폭행 사건 맞습니다. 몇 시간 전에 신병을 인도했던 그놈들입니다.”

“말도 안 돼… 그 덩치 좋은 미군들이 또 사고를 쳤다고!”

웅성우성.

박 형사의 목소리가 너무 높았다. 주위에 있던 대학생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그것 보세요. 또 피해자가 발생했잖아요!”

“미군 놈들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둔다.”

경찰서가 더욱 시끄럽게 변했다. 미군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박 형사, 지금 미군들은 어디 있어? 내가 사람들을 진정시킬 테니까. 당분간 이쪽으로 데려오지 말고…….”

“데려오고 싶어도 못 데려옵니다. 지금 병원에 있어요.”

“벼, 병원?”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병원? 무슨 이유로 미군들이 병원에 갔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그 미군들 상당히 부상이 심합니다. 4명 모두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왔습니다.”

“왜 미군이 부상을…….”

“목격자들에 의하면 학생 2명에게 맞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미군을 폭행한 피의자들이 데려오고 있습니다. 아! 마침 들어오네요.”

경찰서 안의 모든 시선이 반쯤 열린 문으로 쏠렸다. 엄청난 체구의 미군을 박살 낸 학생들은 누구인가?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은 극으로 치달았는데…….

“아! 그만 좀 밀어요. 나 무릎을 다쳐서 빨리 못 걷는다니까요. 동빈아, 제발 말 좀 해 주라.”

“주철아,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그냥 걸어라. 응?”

“……!”

동빈과 주철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저 학생들이 우악스러운 미군 4명을? 그것도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만든 장본인이란 말인가? 대학생들뿐 아니라 경찰들까지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형사, 저 학생들이 그 떡대 좋은 미군을…….”

“그렇습니다. 뭐 하세요. 어서 조서 꾸미셔야죠.”

“그, 그래… 하, 학생들 여기에 앉지.”

박 형사는 의자를 권하며 동빈과 주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상당히 낯이 익은 얼굴들이네?”

“저희들도 낯이 익습니다.”

“어머! 저 남자는…….”

몇몇 대학생들이 동빈과 주철을 알아보았다. 목격자로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피의자로 둔갑한 것이다.

“무슨 일로 미군과 싸우게 된 거야?”

박 형사는 조서를 꾸미기 위해 기본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했던지 모두 귀를 쫑긋 세운 상태였다.

“아! 말이 통해야지요, 말이! 친구를 찾으려 길 좀 물었는데. 다짜고짜 때리잖아요. 정말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됐습니다. 정당방위입니다.”

주철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미군들의 변명을 그대로 따라 한 것 같았다.

“병원에 있는 미군 빼놓고 다른 목격자는 없나?”

“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 지금 어디 있는데?”

덜컹.

오늘따라 경찰서 문이 자주 열렸다.

얼굴에 상처가 많은 학생이 어정쩡한 자세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주철을 조사하고 있는 형사에게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학생은 무슨 일이야? 누구한테 맞은 거야?”

광수는 경기 연합에게 맞은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다. 박 형사가 착각한 것도 오해는 아니었다.

“아, 아니요. 저는 괜히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저기… 미군이 잘생긴 학생을 때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여기 캠코더로 촬영까지 했고요.”

“…….”

박 형사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봐도 조작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상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