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새벽 풍경.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 미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우유 배달하는 오토바이와 신문을 돌리는 자전거는 스치듯 지나쳤다.
인력시장으로 향하는 아저씨는 낡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고 새벽 운동을 나온 젊은이는 어깨를 크게 풀면서 가볍게 뛰었다. 성경을 꼭 품은 아주머니는 바쁜 걸음으로 교회로 향했다.
모두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새벽을 깨우는 사람도 있었으니.
와당탕탕!
요란한 굉음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멈칫했다.
“무, 무슨 일이야?”
소리의 근원지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예전에 집창촌이 있었던 언덕. 공사를 위해 설치했던 방어벽이 무너지면서 뭔가 시꺼먼 것이 데굴데굴 굴러 내렸다.
“세상에나! 사, 사람인가?”
“엄청 큰데? 요즘 한창 날뛰는 멧돼지 아니야?”
멧돼지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험프리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고 육중한 체격은 사람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와장창.
경사진 언덕을 구르던 험프리는 쓰레기 더미에 떨어졌다.
풀썩!
운이 좋았다. 맨바닥에 떨어졌다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다.
“사, 사람 맞네…….”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왜 언덕에서 떨어졌는지 짐작도 못 하는 분위기였다.
“미, 미군이잖아. 헤, 헬로우? 괜찮은 거유?”
“크윽…….”
중년의 환경 미화원이 상태를 물었다. 험프리는 인상을 쓰면서 비틀거리며 일어날 뿐이었다.
“헬로우? 다친 것 같은데 병원에 갑시다.”
“재수 없는 한국 새끼들… 꺼져!”
“에구에구. 이게 무슨 짓이유!”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도와주려는 사람을…….”
험프리는 도와주려는 환경 미화원을 심하게 밀어냈다. 구경꾼들은 밀려 넘어진 환경 미화원을 부축했고, 험프리는 더욱 난폭해졌다.
“뭘 봐! 이 개새끼들아!”
우르르-.
진짜 도심에 출현한 멧돼지 같았다.
거친 말투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행패를 부렸다. 험프리의 육중한 체구에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는데. 그때였다.
“모두 비키세요!”
미군이 떨어졌던 곳에서 고함이 들렸다.
동빈이 경사가 급한 언덕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중간쯤에 다다르자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저, 저, 저 학생은 날아다니네!”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리를 모으고 약간 팔을 펼친 모양새가 장관이었다.
“저 새끼 여기까지 쫓아왔어!”
험프리는 동빈의 출현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빈이 점프를 한 목적은 험프리를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푸악.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동빈의 엄청난 양발차기가 작렬했다. 거구의 험프리는 허우적거리며 날아가더니 셔터를 내려놓은 가게와 부딪쳤다.
철렁.
와장창창!
셔터가 완전히 찌그러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크윽…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험프리는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와지끈.
반쯤 떨어진 셔터를 뜯어내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덤벼! 이 새끼야!”
험프리가 굵은 쇠파이프를 가지고 뛰어나왔다. 호기롭게 덤비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동빈은 이미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험프리가 씩씩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험프리의 얼굴이 심하게 찌그러졌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험프리는 분리수거용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우아악!”
험프리는 상처 입은 야수로 돌변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기 분을 주체 못 하는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나 야수의 고함이 비명으로 바뀌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빈의 무릎차기가 다시 작렬한 것이다.
“크악!”
엉망이 된 험프리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요란을 떨고 싸우니 사람들이 안 깨어날 리 없었다.
“저러다 미군 잡는 거 아니야?”
“행패만 부리던 놈들이…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났네.”
주변은 이미 수십 명의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 절룩거리며 언덕을 내려온 주철도 구경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좆됐다…….”
사건이 커졌음을 직감했다. 조용히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도, 동빈아. 왜 이렇게 난리를 떨며 싸우는 거냐…….”
승패는 예전에 기울었다. 동빈이 마음먹었다면 집창촌에서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고개 숙인 주철의 심정을 모르는지 동빈만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꾸악.
동빈은 지쳐 쓰러진 험프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피범벅이 된 험프리는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동빈을 바라보았다.
“크억… 사, 살려줘…….”
퍼억.
동빈이 듣고 싶은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안면을 강타하고는 다시 멱살을 쥐었다.
“자, 잘못했다…….”
퍼억.
험프리가 입을 열 때마다 동빈의 주먹이 계속 날아갔다.
입 주위가 완전히 찢어진 험프리는 말도 못 할 상황에 이르렀다.
“…….”
“이제야 조용해졌네.”
동빈이 원했던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험프리에게 뭔가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지. 대부분은 열심히 하는데 꼭 한두 놈씩 날치는 놈 때문에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내가 아는 미국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했어. 그런 놈들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작살을 내야 한다고… 그래야 미국 친구들도 욕을 안 먹는다고 말이야!”
퍼억.
충고의 마무리는 강력한 주먹 세례였다.
험프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동빈은 아직도 성이 차지 않는지 다시 험프리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상당히 비밀스러운 말을 하려는 분위기였다.
“너희들은 운 좋은지 알아. 나와 싸워서 이렇게 멀쩡한 군인은 네놈들이 처음이야.”
“……!”
의식을 잃어 가던 험프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한국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귓가에 속삭이던 음성. 이제야 동빈을 어디서 봤는지 깨달은 표정이었다.
푸악!
비밀에 대한 보답은 컸다. 험프리는 심한 경련까지 일으키면서 의식을 잃었다.
부슥.
우르르.
동빈이 몸을 일으키자 구경꾼들은 흠칫하며 물러섰다.
동빈의 인정사정없는 싸움 실력에 기가 질린 반응이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다가서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주철이었다.
“영어도 못 하는 놈이 미국에 친구도 있었냐?”
주철의 첫마디는 조금 의외다. 싸우느라 수고했다든가, 왜 사건을 크게 만들었냐는 불평이 아니었다. 동빈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농담에 가까웠다.
“많이 친하지는 않고 조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지.”
“대화는 어떻게 했냐? 그래도 회화는 좀 하나 보네?”
“난 가르치는 입장이라 영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어. 그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느라 고생 좀 했지.”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또 캠프로 가긴 그른 것 같다.”
“그러게.”
에에엥.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들이 등장했다.
동빈이 새벽을 깨운 시간을 고려해 보면 꽤나 늦은 출동이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