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은 한참이나 뒷걸음치고서야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에이… 퉤!”
방금 뱉은 침에는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얼얼한 볼을 어루만지며 다시 뛰어들려 채비를 했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피 많이 나냐?”
“……!”
이제야 주철은 동빈의 등장을 눈치 챘다. 그만큼 미군과의 대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는 뜻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미군과 싸울 생각을 했냐?”
“쪽팔리게… 여기는 왜 온 거야?”
주철은 동빈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데이비드만 노려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뭘 믿고 덤빈 거냐? 한 명한테도 쩔쩔매면서 말이야.”
“완전 작전 미스야. 저렇게 셀 줄 몰랐지.”
솔직히 말하면 미군들이 강했다. 주철의 실력은 일진이라고 충분히 소리칠 만한 실력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내가 도와줄까?”
“동빈이 너도 끼어들지 마. 저 새끼들도 가만있잖아.”
데이비드를 제외한 나머지 미군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행동이었다.
“주철아. 복싱 좀 배운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해라. 너한테는 벅찬 상대다.”
“시끄러. 전공이 아니라 잠시 밀린 것뿐이야.”
염치가 없어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복싱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인가? 동빈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네 전공이 뭔데?”
“검도. 광수 놈은 각목 구하러 가서 왜 이리 안 와. 목공소를 갔나.”
“…….”
동빈은 할 말을 잃었다. 광수가 전해 준 각목… 자신이 아니라 주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괜찮아. 시파! 각목 안 쓰고도 한 놈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내 저놈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요절낸다!”
주철은 성큼성큼 미군에게 다가갔다. 대책 없이 큰소리만 치던 모습은 예전에 사라졌다. 사생결단을 내려는지 단단히 각오한 눈빛이었다.
동빈은 아웃복싱의 화려한 테크닉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철은 몸 전체의 힘을 풀고 탄력을 이용한 공격을 적절하게 성공시켰다. 부족한 것은 승부를 결정지을 한 방이었다.
‘언제부터 복싱을 배웠지?’
동빈은 주철이 복싱을 배운 시점에 의문을 품었다.
무릎을 다치고 난 다음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배웠는지 궁금했다. 후자라면 상당한 운동신경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차근차근 상대를 무너트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싸울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주철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은…….
‘얼굴 표정 빼면… 춤출 때와 비슷하네? 어휴, 저 현란한 허리 웨이브!’
후웅.
주철의 최대 강점은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간단히 무효화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철의 반격.
슈웅.
동작이 컸던 탓인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고 말았다.
‘나를 보고 조급했나? 다시 동작이 커졌는데?’
주철이 조금씩 욕심을 부렸다. 주춤 물러서는 동작을 취하려다 갑자기 뛰어들었다. 짧은 펀치가 아니라 어깨를 완전히 틀어 젖히는 펀치를 날렸다.
“조심해! 저놈이 카운터를 노리고 있잖아!”
동빈의 목소리가 커졌다.
카운터란, 상대방의 큰 기술을 피하면서 역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주철이 펀치를 뻗는 순간 데이비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씨익.
상대가 카운터를 노리는 것을 예상했다는 것인가? 위기에 빠진 주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주철의 팔과 데이비드의 팔이 엉키듯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빠각.
완벽한 크로스 카운터!
주철은 상대의 라이트를 피하면서 강력한 펀치를 작렬시켰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데이비드의 고개가 확 돌아갈 정도였다.
휘청.
데이비드는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멋진 공격을 성공시킨 주철도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젠장! 돌대가리 미군 새끼!”
관자놀이를 노렸으나 살짝 빗나갔다. 상대의 귀 윗부분을 때렸기에 손목이 삐끗한 것이다.
“주철아! 뭐 해!”
“미친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동빈의 고함을 듣자마자 주철은 다시 몸을 날렸다.
부웅.
연신 뒷걸음치는 데이비드를 쫓아가면서 몸을 띄웠다. 체중을 실어서 끝장낼 의도였다. 탄력이 붙은 상태에서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퍼억.
데이비드의 얼굴이 말이 아니게 변했다.
입술이 찢어지고 코뼈가 주저앉았다. 고개가 완전히 뒤로 꺾이면서 피를 뿌렸지만 비명 소리는 주철이 더 컸다.
“크아! 손목 졸라 아프네.”
데이비드는 비틀거렸고 주철은 손목을 부여잡고 난리를 떨었다. 이 정도 부상이면 더 이상 오른팔을 쓸 수 없었다.
“아! 좀 쓰러져라!”
이번에 끝장내지 못하면 자신이 위기에 빠질 상황이었다.
주철은 얼굴을 부여잡고 웅크린 데이비드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푸악.
“크아! 죽인다.”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 팔꿈치를 썼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연신 얻어터지는 미군보다 더 크게 고함치고 인상을 찌푸렸다.
“팔다리가 안 되면 머리라도 써야지.”
주철의 마지막 선택은 박치기였다.
데이비드의 몸을 잠시 일으켜 세우고는 자신의 고개를 획 젖혔다. 상대의 코 부분을 목표로 삼고는 힘차게 들이받았다.
빠악.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주철이 비틀거렸다.
“졸라… 돌대가리 새끼…….”
데이비드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이마와 이마가 정면으로 충돌한 상황.
앞에서 증명되었듯 머리는 미군이 더 단단했다. 데이비드와 주철이 동시에 휘청거리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주철아. 정신 차려!”
“내가 도는 거야… 세상이 도는 거야…….”
휘청휘청.
주철의 눈이 풀렸다.
술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쓸데없는 방황을 일삼고 있었다.
“여기서도 춤추냐! 빨리 정신 차려!”
“미, 미군 새끼 어디 갔어…….”
“미친다. 뒤에 있잖아. 뒤에!”
“씨파! 뒤가 어디야!”
동빈의 외침에도 주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었다.
같은 시간.
데이비드는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주철아! 계속 공격해야 한다니까!”
동빈의 마음이 급해졌다. 데이비드가 비틀거리며 주철한테 다가서고 있었다.
“열 받게… 한국 놈한테 당할 수는 없지…….”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독기 품은 얼굴에서는 섬뜩함까지 느껴졌다. 양손을 치켜들면서 성큼성큼 주철과의 거리를 좁혔다.
“주, 주철아! 모, 목을 조심해!”
동빈은 미군이 어떤 공격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침투 시에 자주 쓰는 기술. 주철의 목을 잡고서 그대로 꺾으려는 모양이었다.
“잘생긴 내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겠다.”
데이비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당한 만큼 복수할 생각이다. 아니, 자존심 상한 것까지 계산하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스윽-.
주철의 뒤로 다가선 데이비드가 목을 감아쥘 자세를 취하자 주위가 부산해졌다.
동빈이 뛰어들 기미를 보이자 다른 미군들도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방해하지 말라는 표현이었다.
사사삭-.
마침내 데이비드가 주철의 목을 감아쥐려는 순간, 그때였다.
“씨파! 어차피 병원 신세야!”
부웅.
주철은 상체를 비틀며 몸을 띄웠다.
뒤돌려차기 자세!
발 기술이 나오자 데이비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을 앞으로 뻗은 상태에서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푸악.
주철의 뒤꿈치는 상대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명중했다.
주먹과 다르게 발차기의 파워는 엄청났다. 눈이 완전히 풀린 데이비드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크악! 내 무릎…….”
주철은 오른쪽 무릎을 부여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그러나 아픈 곳이 어디 무릎뿐이랴.
“젠장… 팔목도 아프고… 크윽! 소리를 질렀더니 머리가 또…….”
주철은 승리의 환성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과 팔목 그리고 머리를 교대로 어루만지며 난리를 쳤다.
“참 요란하게도 싸운다.”
“쪽팔리게…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제발 부탁이다.”
주철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신신당부를 했다. 얼마나 추하게 싸웠는지 자신도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걱정 마라.”
“아니다. 이왕이면 졸라 멋있게 싸웠다고 소문내 줘라. 응?”
“미친다. 멋있게라고? 그것도 졸라씩이나…….”
동빈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주철을 쳐다보았다.
사실까지 은폐하려는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졌다.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주철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이거나 받아라. 나보다 너한테 더 필요하겠다.”
“…….”
동빈은 호주머니에서 파스를 꺼내 주었다. 주철이 준 것을 다시 돌려주는 셈이었다.
“넌 푹 쉬고 있어. 나머진 내가 해결한다. 부탁이 있는데 이번에는 제발 떠들지 마라.”
“짜식… 머리가 지끈거려서 하라고 해도 못 해.”
대책 없는 주철이 덕분에 또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한 명 처리해 줬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주철이, 너 외국에서 좀 살았다며? 그냥 조용히 해결하자고 말해 봐. 별로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동빈이 나서자 미군들도 싸울 준비를 했다. 동료가 당했으니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주철에게 통역을 부탁했는데…….
“미군 아저씨들, 나 친구 찾았어. 이놈이 바로 빡큐거든! 완전 기적이야. 가운데 손가락이 다 나았어.”
주철은 가운데 손가락을 연신 까딱거리며 소리쳤다. 영어도 아니라 한국말. 미군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빡큐뿐이었다.
“그만 해라. 부탁한 내가 멍청한 놈이다.”
동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주철의 말에 자극을 받은 미군도 살벌한 표정으로 거리를 좁혔다.
멈칫.
동빈과 미군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지했다. 그러고는 폭풍 전야와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당신들이 한국말을 알아들을지 모르겠는데…….”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동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군들은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지만 동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민간인이 아니면 내가 매우 난폭해지거든!”
번쩍.
“……!”
동빈이 눈을 치켜뜨자 미군들은 움찔하고 말았다.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그들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눈빛이었다.
아니, 피비린내 나는 삶을 살았던 그들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공포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