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해야지요
털털털털.
폐쇄된 집창촌 인근으로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했던가?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만 전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아저씨, 조금만 더 힘을…….”
“무리야, 무리…….”
동빈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급경사도 아닌 곳도 오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진짜로 거의 다 왔거든요.”
“대체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거야?”
“저기 보이는 곳까지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동빈은 예전 집창촌을 가리켰다. 택시 기사의 눈이 수상하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학생…….”
“네?”
갑자기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중저음으로 깔리는 음성. 기분이 팍 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털털털-.
“아, 아니… 시동은 왜…….”
동빈은 당황스럽다. 그렇게 친절했던 아저씨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시동을 끔과 동시에 한숨부터 푹 쉬면서 거북한 심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학생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갈팡질팡하는 건 참을 수 있어. 그러나 말이야, 세상을 조금 더 산 어른으로서 충고하는데, 이러면 정말 못쓰지.”
“모, 못쓰다니요?”
“혈기가 왕성한 나이니 이해는 하겠지만 말이야, 한창 공부할 나이에 이러면 쓰나.”
“혀, 혈기요? 그것도 왕성씩이나…….”
상황이 점점 꼬여 갔다. 마음 급한 동빈을 붙잡고 택시 기사의 엉뚱한 충고는 계속 이어졌다.
“쯧쯧쯧… 찾으려면 제대로나 찾을 것이지… 학생이 원하는 곳은 예전에 다른 곳으로 옮겼어. 난 더 이상 못 가니까. 알아서 해.”
“아저씨?”
최악이다. 택시 기사는 운전대까지 놓았다.
굳게 다문 입술을 보니 웬만해선 출발할 것 같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동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저, 저기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오해는 무슨!”
동빈은 차분하게 문제를 풀려 했지만 택시 기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빈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애걸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
동빈의 눈이 반짝였다.
자세를 잡으면서 시선을 잠시 전방을 향한 직후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동빈은 획 고개를 돌리며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쟤, 쟤는… 광수 같은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주철의 친구인 광수가 확실했다.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저씨 됐어요. 저 내릴게요.”
동빈은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광수 혼자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서둘러 뛰어가려 했지만 한 가지 해결 못 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 학생! 요금은 줘야지!”
“……!”
맞다. 동빈은 돈이 없었다. 그렇기에 계속 답답한 차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갖다 드릴게요.”
“무, 무슨 소리야! 학생을 어떻게 믿고…….”
“아저씨, 죄송합니다.”
“하, 학생!”
동빈은 일단 뛰고 보았다. 택시 기사도 급하게 차에서 내렸지만 동빈을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 엄청 빠르다…….’
택시 기사는 동빈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고장 난 택시로 따라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요금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문제였는데…….
“에이… 씨!”
택시 기사도 일단 뛰고 보았다.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힘들게 미군 부대까지 갔다가, 다시 이상한 차를 쫓다가… 지금까지 한 고생이 아까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헉헉… 저렇게 빠른 놈이… 고, 고장 난 택시는 왜 탄 거야…….”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얼마나 뛰었다고 벌써 숨이 가빠 왔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동빈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부스럭부스럭.
광수는 반쯤 무너진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무너진 벽돌 사이에 낀 막대기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뭐야… 졸라 안 빠지네.”
기를 쓰고 뽑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대기 주변에 있는 돌무더기를 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우르르.
광수는 맨손으로 차근차근 돌을 옮겼다. 중간에 낀 커다란 돌멩이를 밀어내자 간신히 빼낼 수 있었다.
“어라? 너무 짧은가?”
광수는 막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적당한 크기인지 판단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는데…….
“헉헉… 광수야. 여,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어! 동빈이 아니야?”
광수는 숨을 헐떡이는 동빈을 보고 반색했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란 표정이다.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늦지 않았지. 우와! 숨차 죽는지 알았네.”
동빈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광수의 어깨를 잡았다. 광수도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동빈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부터 튀어나올지 기대하는 표정이 분명했다.
“주, 주철이는? 아, 아니다. 그보다 먼저… 돈 좀 빌려 줘.”
“너, 너도 돈이었냐…….”
광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주철이가 경기 연합을 찾아온 목적도 돈이었다. 둘이 짜고서 광수를 놀리는 것 같다.
“나중에 갚을게. 정말이야. 택시를 타고 왔는데 차비가 없잖아.”
“학생! 제발 거기 좀 서라고! 요금은 주고 가야지! 학생∼!”
때마침 택시 기사가 등장했다. 애달픈 목소리로 동빈을 부르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저 아저씨한테 주면 되냐?”
끄덕끄덕.
동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염치가 없다. 동빈도 경기 연합 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택시비는 내가 해결할 테니, 넌 주철이나 찾아가라.”
“고맙다. 그놈은 어디 있는 거냐?”
“저 건물이 시작되는 골목에 있다. 그리고 이 각목도 가져가.”
“난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동빈은 광수가 건네는 각목을 사양했다. 손사래까지 치며 상당히 껄끄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건 말이야.”
“됐어. 내가 무기를 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
광수는 다시 각목을 권할 수 없었다. 차갑게 변한 동빈의 표정.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시간 없으니까 나 먼저 간다.”
“그, 그래…….”
반쯤 얼어 있던 광수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동빈이 떠난 자리는 곧바로 택시 기사가 채워 주었다.
“헉헉… 학생… 저 학생 좀 잡아 줘…….”
택시 기사는 급했다. 아니,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동빈을 잡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저씨, 택시비는 제가 계산할게요.”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광수가 지갑을 꺼내자 택시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택시비가 얼마죠?”
“5만원.”
“예? 뭐가 그리 비싸요?”
지갑을 뒤지던 광수의 손길이 멈췄다. 택시비로 5만원이라는 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비싸기는… 정비 들어갈 차를 억지고 끌고 나왔다고. 무리하게 달려서 차 수리비는 더 들지도 몰라. 저놈이 사람 목숨이 달렸다고 하도 매달려서…….”
“알았어요, 아저씨. 지갑에 있는 돈이 모자라니까 돈을 뽑을 수 있는 곳까지 가요.”
“그래. 저쪽에 내 택시 있거든.”
광수는 택시 기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동빈이 왔으니 주철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놀러 간다는 표정으로 폐쇄된 집창촌을 벗어났다.
파파파팟.
동빈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광수와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숨을 돌렸기에 빠른 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 없는 놈이야. 무슨 배짱으로 미군한테 덤빈 거야?’
목표 지점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특수 훈련을 받은 미군. 게다가 사 대 일이라는 불리한 상황. 주철이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설마… 또 주철이가 없는 거 아니야?’
이상한 일이다. 갑자기 클럽에서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기세 좋게 뛰어들었는데 이번에도 주철이가 아니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완전히 의심을 떨치지는 못했다.
‘에이, 직접 보면 알겠지.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동빈은 잡생각을 지우고 뛰는 데만 열중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속도가 너무 붙었다. 자칫하면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촤르르.
미끄러지면서 속력을 줄이는 동빈. 붉은 건물이 시작되는 골목에 정확히 멈추었다.
제대로 찾은 게 분명했다. 주철의 얼굴보다 목소리를 먼저 들을 수 있었다.
“씨파! 뭔 놈의 군인이 이렇게 세!”
후웅-!
주철은 측면에서 날아오는 펀치를 낮게 웅크리면서 피했다.
불만이 가득한 음성이지만 그리 몰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얼굴 상태는 데이비드가 훨씬 엉망이었다. 눈 주위가 퉁퉁 부은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동빈의 말에는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클럽에서처럼 딴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고, 별로 다친 곳이 없으니 또 다행이었다.
‘무릎 다쳤다고 하더니 잘만 싸우네?’
동빈의 예상보다 주철이 분전하고 있었다.
치고 빠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가벼운 주먹으로 상대를 몰아치다가 반격할 여유를 주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퍽퍽.
주철은 끊임없이 주먹을 날렸다.
무리하게 힘을 넣지 않은 펀치라 가능했다. 모든 각도에서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복싱을 배웠군. 꽤 쓸 만한데?’
신속하고 정확한 주철의 잽은 상대의 공격을 막는 역할까지 병행했다. 전후좌우로 스텝을 밟는 것도 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복싱 기술은 주철이 한 수 위였지만 두 가지의 약점을 극복해야 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철의 몸이 흔들렸다.
데이비드의 발차기를 간신히 막아 낸 것이다. 무릎을 다친 주철은 발차기를 하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복싱의 부족한 기술을 발 기술로 만회하는 상황이었다.
‘발 기술도 문제지만 파괴력이 영…….’
두 번째 문제는 파괴력의 차이였다.
주철의 주먹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데이비드의 파괴력이 워낙 출중했다. 똑같은 공격을 주고받으면 주철이 손해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주철이 불안한 리드를 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했다.
퍽퍽퍽퍽.
주철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연속적으로 작렬했다. 이번에는 상대의 반격을 의식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후웅.
측면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더킹으로 피해 냈다.
상대가 주춤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철은 파괴력이 강력한 양 훅으로 몰아쳤다.
‘주철이 녀석이 끝장을 보려고 저러나?’
저돌적인 공세에 데이비드가 주춤했다. 블로킹을 하며 방어에 치중했지만 주철의 스피드를 당할 수 없었다.
‘저 미군이 쉽게 당할 놈은 아닌데…….’
동빈이 갑자기 맥을 못 추는 데이비드를 의심했다.
체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크게 부상을 입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주철을 유인하는 것인가?
푸악.
동빈의 예상이 적중했다. 묵직한 발차기에 주철의 중심이 흔들렸다. 주철이 몸을 틀면서 어깨로 막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의 다음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뭐야? 주철이 저놈 맞받아치겠다는 거야!’
정면 승부! 주철은 복싱에서 파괴력이 가장 크다는 롱훅을 날렸고, 데이비드는 돌려차기로 응수했다.
주철의 손이냐, 데이비드의 발이냐. 동시에 펼쳐진 공격이라 누구의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퍽.
퍼억.
주철의 주먹이 조금 빨랐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발차기도 주철의 얼굴에 적중했다.
피장파장. 주철이 더 충격을 받았는지 순간적으로 다리가 꼬였다.
주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