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224)

어스름한 새벽 시간.

완만하게 경사진 도로를 군용 지프들이 달렸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신속한 이동보다는 간격을 유지하여 달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무리를 이끄는 선도 차량에는 클럽에서 난동을 부렸던 미군 2명이 타고 있었다. 거구의 험프리는 몸을 움츠려도 차량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프러쉬는 뚱한 얼굴로 불편한 자세의 험프리를 바라보았다.

“이봐, 정말 그냥 복귀할 생각이야?”

“조용히 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 안 보여?”

“그 표정이 고민하는 얼굴이냐?”

험프리의 인상은 강인함을 타고났다.

시원하게 깎은 머리와 굴곡이 심한 얼굴. 짙은 눈썹과 두툼한 입술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약간 눈살을 찌푸린 지금의 표정은 시비를 거는 모습에 가까웠다.

“고민할 게 뭐 있어? 그냥 차 세우라고 하면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 아까 클럽에서 봤던 놈 말이야. 짧은 머리에 균형 잡힌 체격을 가진…….”

“데이비드의 발차기를 막은 놈? 그놈이 왜?”

험프리의 고민은 딴 곳에 있었다. 더 놀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하는 게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낯이 익어…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동양 놈들이야 생긴 게 다 비슷하잖아. 난 아직도 누가 누군지 구별을 못하겠는데?”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내 기억에 남을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닐 거야. 어디더라… 중요한 작전 같았는데…….”

“작전이라니? 그놈 나이가 몇인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거지. 한참이나 어린놈이 어떻게 특수작전에 투입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조용하게 흔들거리는 차량 내부. 험프리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찾아내느라 없는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흔들.

갑자기 기우뚱하는 차체. 급하게 코너를 도는 것이 분명했다. 가로수가 띄엄띄엄 심어진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험프리, 거의 다 왔다고.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신나게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도 있어.”

“시끄러… 그러게 누가 사고 치랬어?”

“내가 다 잘못했다. 얼마 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그냥 이대로 돌아가면 난 미칠 거야.”

프러쉬는 마음이 급했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복귀하기는 죽어도 싫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놀다 가는 거야. 더 이상 사고 치면 나도 곤란해.”

“알았어!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즐겨 보자고.”

프러쉬는 구세주를 만난 표정이었다. 그가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자 불편한 자세로 있던 험프리가 앞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앞자리에 있는 헌병에게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봐, 차 세워.”

“……!”

조수석에 있던 헌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차를 세우라니? 놀란 표정으로 험프리를 쳐다보았다.

“내 말이 안 들려? 차 세우라고 했잖아.”

“이 차는 세울 수 없다. 제군들은 민간인을 폭행한 사건으로 헌병대의 조사를 받아야…….”

“닥치고! 차 세우라고 했지!”

“무, 무슨 짓이야!”

끼이익.

선도 차량에 문제가 생겼다.

이리저리 방향을 못 잡고 흔들리다가 급정거를 한 것이다. 뒤따르던 다른 차량들도 차례대로 멈춰 선 상태가 되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도로를 검정색 승용차가 달렸다.

이 차도 좀 전에 지나친 군용차량처럼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광수야, 이쪽 길이 정말 맞는 거냐?”

“마, 맞을걸?”

조수석에 앉은 광수는 확실한 대답을 회피했다. 창밖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궁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미치겠네. 광수야, 아까 그 길 아니야?”

“아니야. 아까 그 길은 확실히 아니었어.”

“그럼 대체 어디냐고!”

“그, 글쎄…….”

주철은 속도를 줄이며 차를 몰았다. 광수가 주변을 잘 살피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쪽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저 가로등이 있었나?”

“나한테 물어보면 어쩔 건데?”

“그러게?”

끼익!

주철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천천히 진행하던 차였지만 순간적으로 차체가 요동치며 정지했다.

“주철아. 왜, 왜 그래?”

“너, 길 알고 있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지?”

차량을 멈춘 주철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광수를 노려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사고 칠까 봐 이러는 거 아니야?”

광수는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지만 주철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하여 확신을 내린 눈치였다.

“저기 말이야, 미군 차량들 보면 어쩔 건데? 그놈들 부대 안까지 따라갈 거야?”

“미쳤냐? 총 들고 있는 군인들에게 덤비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쩌려고?”

“어쩌긴 뭐 어째? 그냥 차로 확 받아 버려야지.”

“야! 나 죽는 꼴 볼래!”

광수는 경기를 일으켰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대답을 할 리 없었다. 아니, 주철이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한번 돌아 버리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다.

“뭐야? 너 진짜 믿은 거야?”

“그, 그럼 아니야?”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던 광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완전히 의심을 거둔 표정은 아니었다.

“제발 정신 차려. 당연히 농담이거든! 나도 다시는 병원 신세 지기 싫어. 그놈들 부대 앞에서 기다릴 거야. 부대에서 평생 먹고살 거 아니면 언젠가 기어 나오지 않겠어?”

“정말이지? 우리 아버지 차로는 부대까지만 가는 거다. 약속했다.”

“그렇다니까. 빨리 방향이나 말해.”

“헤헤… 이쪽 길이 맞아. 그냥 쭉 가면 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광수가 웃음을 찾는 순간 주철은 다시 시동을 걸었다.

부릉.

무거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량이 움직였다.

천천히 갓길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아스팔트로 접어들었다.

“주철아. 그놈들이 나오긴 나올까? 미친 척하고 안 나오면 어쩔 건데?”

광수는 창문 위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점점 빨라지는 차량 속도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글쎄, 누군 안 나오면 쳐들어가지만… 나는 좀 다르지. 꾹 참고 기다릴 거야. 그리고 당한 만큼 철저히 되갚아 줘야지. 이게 내 철칙이야.”

후앙-!

주철이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확실한 방향을 잡았기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속도 좀 줄여!”

미리 손잡이를 잡고 대비하기를 잘했다. 광수의 몸이 순간적으로 뒤로 젖혔다.

부응-!

검은색 승용차는 경쾌한 엔진 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주철의 차량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

낡은 택시 한 대가 차분한 속도로 길을 지나쳤다. 운전자보다는 차량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는 내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저기 아저씨… 제가 좀 급한데요…….”

“내가 말했잖아. 차량에 문제가 생겨서 빨리 못 달린다니까. 정비받으러 들어가는 차를 잡으면 어쩌자는 거야.”

동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차가 워낙 잡히지 않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안 된다고 우기는 택시 기사를 설득한 사람은 바로 동빈 자신이었다.

“그런데 미군부대가 이쪽이 맞지요?”

“내가 택시 경력이 얼만데… 이 길밖에 없어.”

“부탁입니다. 최대한 빨리 가 주십시오.”

“몰랐어? 지금이 최대한 빨리 달리는 거야.”

털털털털!

과속한 모양이다. 택시의 배기음이 이상하게 변했다.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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