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224)

동빈은 이제 경찰서가 낯설지 않다.

매우 차분한 자세로 경찰의 조사에 임했다. 미군과 실제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기에 걱정은 없었다. 여대생이 증인으로 나서 주어 일이 쉽게 풀렸다.

덜컹.

주철은 반쯤 열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동빈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어찌 된 일이야?”

“그냥 뭐…….”

주철의 물음에 동빈은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사고 친 건 아니고?”

“아니야,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한 것뿐이다. 곧 나가도 된다니까 너무 걱정 마라.”

“쯧쯧쯧… 언제부터 정의의 기사가 되셨나?”

주철은 혀끝을 차며 동빈이 옆에 앉았다.

사고를 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까지 생겼다.

“저놈들이 패싸움 벌인 양키들이야?”

“응.”

주철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미군들을 쳐다보았다.

“왜 싸움이 벌어졌는데?”

“미군들이 저 여대생에게 추잡한 행동을 하려 했나 봐. 같이 온 남자 동기들이 나섰다가 싸움이 커졌어.”

“미군들은 멀쩡한데?”

“보통 군인이 아닐 거야. 남자 대학생 10명 정도가 입원했고 중환자실에 들어간 사람도 있대.”

“양키들이나 한국 경찰들 모두 대단하네. 대체 여기가 미국이야, 한국이야?”

미군들은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피해자인 대학생들에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물론 한국 경찰은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았다.

덜컹.

다시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군인이 도착했다.

통역 장교와 미8군 헌병대였다. 사고를 친 미군들의 신병을 인도하러 온 모양이었다. 통역 장교는 경찰에게 서류를 전달하면서 인수인계 절차를 밟고 있었다.

“왜 가해자를 그냥 넘겨주는 거예요? 미군도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지요!”

경찰이 미군들의 신병을 인도하려 하자 여대생이 따졌다. 동빈에게 도움을 받았던 여자였다.

“학생. 미군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어.”

“조, 조사라니요? 간단한 인적 사항하고 대충의 정황만 물었잖아요?”

“대학생이라며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도 몰라? 한국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무슨 소리예요! SOFA협정에도 증거인멸을 방지하기 위해 미군 피의자를 24시간 구금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저 미군들은 비 공무 중에 사건을 일으켰어요. 1차적 재판권은 한국이 갖는 것도 몰라요!”

여대생은 경찰의 무성의한 조사 태도를 지적했다. 항의하는 목소리에는 칼날이 서 있었다.

“학생 내 말 잘 들어. 그건 말이야, 살인미수, 마약 거래, 음주 교통사고, 강간미수 등 12개 중대 범죄에 관한 경우에 해당돼. 이건 단순한 패싸움이야. 싸움에 끼어든 숫자도 학생들이 훨씬 많았어.”

“저놈들이 제 친구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성추행은 충분하고 강간미수도 적용할 수 있어요!”

“…….”

경찰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여대생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찰이 입을 다물자 여대상은 통역 장교에게 따졌다.

“군인 아저씨, 한국 사람 맞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당하게 재판을 받는 거예요. 미군이 피의자를 데리고 가면 수사가 불가능하잖아요?”

“학생. 난 상부의 명령대로 행동할 뿐이야. 이번 문제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

“말이 통하지 않다니요? 우리는 영어로 말했어요. 먼저 주먹을 쓴 것도 미군이에요.”

“그만 하지. 난 공무 수행 중이거든.”

미군들이 풀려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학생들의 빗발치는 항의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미군들은 당당하게 경찰서를 나섰다. 여대생은 허탈감을 참을 수 없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부슥.

상황을 지켜보던 주철이 일어났다.

여자에 대한 보호 본능이 발동한 것인가?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대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요. 그 SOFA 말인데요.”

“말도 안 되는 법이에요.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한국에서 담당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제가 직접 당하고 나니까…….”

“아니요. 전 그 소파에 대해서 딱 하나만 알고 싶은데요?”

주철은 여대생의 하소연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딱 하나라는 것이 조금 수상한 말이었다. 혹시 작업? 주철의 얼굴은 보니 그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무엇을 알고 싶은데요?”

“거꾸로 된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미군이 한국인한테 맞으면… 때린 한국인이 미군의 법정에 서야 하나요?”

“그, 글쎄요… 한국인은 한국 법에 따라…….”

“됐어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주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얼굴을 보니 뭔가 사고를 칠 분위기였다. 좀 전에 나간 미군들을 따라 밖으로 나서려 했다.

“자, 잠깐. 주철아, 어디 가려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동빈이 막아섰다. 워낙 대책 없는 놈이라 무슨 행동을 할지 불안했다.

“짜식… 걱정하지 마라. 난 사고를 쳐도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히 만들어 놓거든. 그리고 파스 받아라. 잠깐 볼일 보고 올 테니, 파스 붙이면서 쉬고 있어.”

“야, 기다려! 너 혹시…….”

덥석!

동빈은 그냥 지나치려는 주철의 어깨를 잡아챘다. 감이 잡힌다. 방금 떠난 미군과 관계있는 사고를 칠 것이 분명했다.

“동빈아. 넌 빠져.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한다.”

화악.

주철은 담담한 표정으로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주, 주철아!”

동빈이 놀라서 따라가려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학생, 잠시만.”

“왜, 왜요? 조사는 다 끝났잖아요?”

담당했던 경찰이 부르니 어쩔 것인가? 동빈은 경찰서 문을 연 상태에서 고개만 돌렸다.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면 그냥 튀겠다는 뜻이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 번호 남기고 가.”

“에이… 씨!”

동빈은 서둘러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러고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부르릉.

정말 안타까운 장면이 펼쳐졌다.

주철이 탄 승용차가 방금 떠났다. 운전석 창문이 열려 있기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젠장! 차는 언제 구했지? 택시! 택시!”

마음 급한 동빈은 택시를 잡으려 분주히 뛰어다녔다.

특수 훈련을 받은 미군과 붙으려 하다니!

새벽 시간이라 택시도 잘 잡히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