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1/224)

후웅-!

반원을 그리며 내리꽂는 발차기.

미군의 체격이 좋아서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분명 장난은 아니다. 미군 병사의 눈과 발차기의 각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쓰러진 남자를 보호하려는 여대생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미친놈… 진짜로 내리찍을 모양이잖아!’

동빈의 마음이 다급하다. 구경꾼들 때문에 약간 주춤한 게 문제였다. 늦지 않고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주르르.

동빈은 한쪽 발을 뻗으면서 낮은 자세로 미끄러졌다. 굴곡 없이 매끈한 표면이라 신속하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주철이 놈… 이번에는 가만 안 둔다!’

그냥 몸을 날려서 미군을 덮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괜한 말썽의 소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동빈은 손쉬운 길을 놔두고 험한 길로 돌아가는 심정이었다.

후웅-!

촤르르!

미군의 발차기는 위에서 내려왔고, 동빈은 밑으로 치고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누구의 움직임이 더 빠를 것이냐!

구경꾼들의 호기심은 미군과 동빈에게 집중되었다.

“안 돼요!”

남자를 보호하는 여대생도 대단하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지만 결코 몸을 피하진 않았다.

와락.

절체절명의 순간, 여인은 남자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미군의 발차기는 여대생의 지척까지 다다른 것이다. 동빈도 거의 도착한 상태였지만 방어 자세를 취할 여유가 없었다. 군중들은 끔찍한 상황을 예상했는지 고개를 돌려 외면했는데…….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여대생이 다친 것인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질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러면 동빈? 인상은 쓰고 있지만 동빈의 얼굴도 말짱했다.

“팔 부러질 뻔했잖아…….”

“……!”

동빈이 미군의 엄청난 내려찍기를 막아 낸 것이다. 오른팔을 들어 간신히 막기는 했으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찌릿한 통증이 계속 밀려왔다.

“조금 오래가겠는데…….”

동빈은 팔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는 수준에 그쳤지만 백인 병사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 한국 놈은 뭐지?’

갑작스러운 동빈의 출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동빈이 언제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발차기를 막아 냈는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보통 실력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스윽.

심상치 않은 느낌 때문인지 미군은 조심스럽게 발을 접었다. 그러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동빈을 쳐다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수준에 가까웠지만 동빈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봐요. 다친 데는 없지요?”

“네?”

동빈은 여대생의 몸부터 챙겼다. 계속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눈을 뜨고 정황을 살폈다. 몸이 멀쩡했다. 체격이 좋은 남학생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괘, 괜찮아요.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그런데요, 잠시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동빈은 피떡이 되어 쓰러진 남자를 주철이라 단정 지었다. 사고만 치는 친구가 얄미웠던지 대책 없이 큰소리부터 쳤는데…….

“주철아! 또 사고를 치면 나보고… 엥? 누, 누구…세요……?”

기세 좋게 출발한 동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얼굴을 확인해 보니 주철이 아니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 이상하게 쳐다보는 여대생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놈의 자식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벌떡!

괜히 무안해진 동빈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잔꾀였지만 의외의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주춤.

동빈을 노려보고 있던 백인 병사가 흠칫하며 물러났다.

동빈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잘 싸우던 동료의 이상한 반응에 다른 미군이 다가왔다.

“데이비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저 한국 놈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어린놈이 화 좀 나면 어쩔 건데? 그냥 밟아 버리면 되지.”

“조심해야겠어. 실력이 만만치 않은 놈이 확실해.”

한국말을 모르니 분위기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데이비드는 친구가 다쳐서 동빈이 화를 낸다고 착각한 것이다.

“패터슨. 데이비드. 동양인한테 겁먹은 거냐?”

흩어져서 행패를 부리던 미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패싸움을 벌인 미군은 4명. 흑인 둘에 백인 둘이었다.

“방심하지 마라. 험프리도 이상하게 저놈을 보고 있잖아.”

특히 험프리라는 미군 병사는 엄청난 체구에 키도 2m가 넘어 보였다. 넷 중에서 가장 실력 있는 존재가 동빈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철아! 어디 있는 거냐. 여기도 없고… 얼마나 대차게 싸운 거야? 진짜 많이도 다쳤네.”

동빈은 홀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상당한 수가 미군에게 당해 쓰러졌지만 주철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지만 괜히 뛰어든 것만은 분명했다.

“주철이 이놈… 잡히기만 해 봐라.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동빈은 인상을 쓰면서 돌아다녔다. 주철을 원망하는 표정이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미안하다, 주철아. 내가 너를 의심하다니…….’

동빈의 죄는 점점 늘어났다. 자신의 난처함을 무마하기 위하여 주철을 희생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네?”

쓸데없이 방황하던 동빈이 발길을 멈췄다.

두리번두리번.

이리저리 주변을 살펴보며 클럽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려 노력했다.

“주철이 이놈이 벌써 나갔나? 괜히 여기까지 들어왔잖아?”

동빈의 어색한 연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냥 조용히 나가면 될 것을… 국어 책을 읽는 듯한 동빈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 모았다.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욱 컸다.

‘이쯤에서 빠져줘야 하는데… 어째 또 분위기가…….’

군중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뭔가를 바라는 눈빛이다. 괜히 미군과 동빈을 번갈아 보면서 이상한 분위기로 몰아갔다.

“저 학생은 무술의 유단자 같은데… 체격도 미군 놈들에게 뒤지지 않아.”

“맞아, 양키 놈들도 쫄았군. 개 잡듯 대학생들 팰 때는 언제고 말이야. 지금에서야 임자 만난 거지.”

군중들이 싸움을 유도하는 상황이었다.

미군들의 눈총 또한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다. 뭔가 벌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치겠네… 왜 이리 사건이 꼬이는 거야?’

동빈은 굿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경꾼들이 많아 빠른 발도 무용지물이었다. 도망친다고 해도 미군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충돌을 피하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헤이, 미군 아저씨들. 난 싸울 생각 없거든요.”

흔들흔들.

일단은 삭막해진 분위기부터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동빈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전달했다. 한국말을 쓴 게 문제였지만 보디랭귀지는 만국의 공통어 아니던가?

“뭐야? 저놈 항복하겠는 뜻이야?”

뜻이 통했나? 백인 병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빈의 의사를 제대로 파악했지만 다른 동료들이 문제였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미군이 출현했다.

“항복은 무슨… 쇼맨십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면 더욱 멋있어 보이잖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군.”

“그럼, 저놈은 영웅이고 우리는 엑스트라야?”

그들은 동빈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깔보는 것이라 넘겨짚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군의 태도가 점점 거칠어졌다.

“누가 영웅인지 똑똑히 가르쳐 줘야겠군.”

“불쌍한 놈… 우리 같은 전쟁 영웅을 몰라보다니 말이야.”

성큼.

장신의 백인 병사가 비웃음 치며 동빈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쫙 펴서 동빈을 가리켰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보디랭귀지였다. 한번 붙어 보자는 태도가 확실했다.

웅성웅성.

구경꾼들은 수군거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싸움은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에이… 씨!”

차악!

동빈도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잠들어 있는 전투 본능이 서서히 깨어났다. 상대가 민간인이 아니라 그런지 눈빛이 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눈싸움이 펼쳐졌다.

꿀꺽.

너무 조용하다.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뚜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군중들도 숨까지 참으며 긴박한 상황을 지켜봤다.

스륵.

미군이 먼저 움직이는 동작을 취했다. 그와 동시에 동빈의 몸도 앞으로 쏠렸다.

마침내 충돌하는 것인가? 군중들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달았는데, 그때였다.

“경찰이다. 모두 꼼짝 마.”

수십 명의 경찰들이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상황을 수습하기에 분주했다.

“휴유∼.”

동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큰 말썽은 피했다는 뜻이었다.

“학생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구급차부터 빨리 불러.”

경찰들은 구경꾼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부상당한 대학생들을 살폈다. 예상보다 피해자들의 부상 정도가 심했다.

“뭐 하는 거야! 목격자 확보하고 나머지는 해산시켜!”

일부 경찰들은 사건의 정황 파악에 들어섰다. 대치 상태에 있었던 미군과 동빈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패싸움이 벌어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경찰서까지 동행하셔야 합니다.”

젊은 경찰이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체포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미군들은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험프리, 어쩔 거야? 경찰서에 갈 거야?”

“글쎄…….”

2m가 넘는 거구의 흑인이 리더인 모양이었다. 나머지 미군은 험프리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행동을 보였다.

“심심한데 탈출 게임이나 할까? 스무 명도 안 되는 경찰인데?”

“프러쉬, 사건을 더 크게 만들지 마라. 험프리, 내 생각에는 우선 경찰서에 가는 게 좋겠다. 한국 경찰은 우리를 어쩌지 못해.”

의견이 분분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지만 경찰에게 반항하겠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데이비드 의견대로 한국 경찰을 따른다. 괜한 말썽 피우지 말고 행동해.”

“할 수 없지… 험프리가 결정했으니…….”

거한의 험프리가 나서자 상황은 쉽게 종료되었다. 미군들은 경찰들의 동행 명령에 순순히 응했다.

미군의 일은 해결되었고 이제는 동빈 차례였다.

“대학생인가? 자네도 따라와야겠어.”

“예? 전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싸우려고 한 걸 내가 다 봤는데?”

미군과 대치를 벌였던 것이 문제였다. 경찰관이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경찰 아저씨, 이 남자는 아니에요. 그냥 저희를 도우려고 한 것뿐이에요.”

“자세한 내용은 서에서 밝혀지겠지. 직접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참고인 자격으로 동행을 해야 해.”

여대생이 증언을 해도 소용없었다. 패싸움의 정황을 파악하려면 다양한 목격자가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경찰서에 가겠습니다.”

“좋아, 김 형사. 이 친구부터 차에 태워서 데려가.”

클럽 패싸움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구급차가 도착해서 환자들을 수송했고, 미군과 동빈은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클럽 밖으로 향했다.

클럽 입구는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구급차와 경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출동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르르.

“비켜 주세요. 환자를 이송해야 합니다.”

심하게 부상당한 대학생들이 실려 나올 때마다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환자를 안전하게 옮기려는 구급대원들과 구경꾼들이 몸싸움을 벌이기 십상이었다.

“무슨 구경났다고…….”

주철은 편의점에 앉아서 동빈을 기다렸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가끔 클럽 입구를 살펴보는 수준이었다.

“주철아! 엄청 큰 싸움이 벌어졌나 봐. 대학생들이 완전히 떡이 되었다.”

“관심 없다.”

광수가 편의점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본 내용을 설명하려 했지만 주철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미군 놈들 엄청 크더라. 저런 주먹에 맞으면 작살날 거야.”

“관심 없다고 했지… 동빈이 놈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클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상관없다는 반응이었다. 속이 타는지 주철은 계속 음료수만 들이켰다.

“참! 동빈이도 연관된 모양이야. 지금 경찰들에게 끌려가던데?”

푸읍.

주철의 입 안에 있던 음료수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사레가 들렸는지 제대로 말도 못 했다.

“콜록콜록… 저, 정말이야? 콜록콜록…….”

“저기 끌려가잖아.”

“……!”

광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동빈의 모습은 확실히 구별이 됐다. 경찰 둘의 호위(?)를 받으며 경찰차에 타기 직전이었다.

“내가 돌아가신다!”

주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이 나섰다면 좋은 일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구경꾼들을 힘들게 헤치며 동빈에게 접근했다.

“도, 동빈아! 너 또 사고 쳤냐?”

“미안하다. 좀 그렇게 됐다.”

갑작스러운 주철의 등장에 동빈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주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친구를 의심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학생, 빨리 들어가. 서에 갈 사람들이 꽤 많거든.”

“주철아. 나중에 보자.”

“미친다. 뭘 나중에 봐! 내가 곧 따라갈게.”

동빈에 뒷자리에 오르자 경찰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번화가를 벗어났다.

“광수야. 빨리 차 있는 데로 가자.”

주철이 바빠졌다. 광수가 차를 가지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주철아, 어디 가려고?”

“당연히 동빈이를 쫓아가야지. 어느 경찰선지 알고 있지?”

“야, 이거 우리 아빠 차야.”

“그게 무슨 문젠데?”

광수가 껄끄러운 반응을 보이자 주철은 난감했다. 여기까지 잘 끌고 나와 놓고 무슨 말이냐는 반응이었다.

“나 무면허야. 급하다고 하니 살짝 몰고 나온 거지. 아무리 그래도 무면허로 어떻게 경찰서를 가냐?”

“미친다. 키 줘! 내가 운전할게.”

“뽑은 지 얼마 안 됐어. 흠집이라도 생기면 난 끝장이야.”

광수는 키를 넘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괜히 빌려줬다가 사고라도 나면? 자신의 안전보다는 아버지의 꾸지람이 더 무서웠다.

“난 면허 있으니 걱정 마라. 응?”

“말도 안 돼… 면허 딸 나이가 안 되잖아?”

광수는 주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만으로 18세가 되어야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치료받는 동안 땄거든. 가끔 레이싱도 했으니까. 좋은 말 할 때 줘라.”

“저, 정말이야? 구라 까는 거 아니야?”

“속고만 살았나. 빨리 내놔!”

주철은 반강제적으로 키를 강탈했다.

부릉-!

운전 경험이 풍부한 모양이다. 광수가 운전할 때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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