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224)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동빈과 주철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앞서 가는 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뒤를 따랐다.

부석부석.

걸으면 걸을수록 주변 환경이 삭막해졌다.

폐허가 된 마을인가? 허름한 빈집들은 버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인적은 보이지 않고 각종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이 새끼들 진짜 요상한 놈들이네?’

앞장서서 걷는 놈이 슬쩍 뒤를 살펴보았다.

당당한 자세로 걷고 있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동빈과 주철처럼 아무런 불평 없이 따라오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이쯤이면 겁먹고 도망치거나 어디까지 가야 하냐고 물어야 했다.

‘그래… 조금 놀았다 이거지.’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체격부터 심상치 않았고 깡도 제법 있어 보였다.

‘재수 없는 새끼들, 조금 있으면 후회하게 될 거다. 집단으로 다구리 까면 네놈들이라고 별수 있겠어?’

굳어졌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인지 발걸음이 더욱 당당해졌다.

‘좋아, 거의 다 왔군.’

놈의 눈빛이 달라졌다. 원하던 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찢긴 비닐하우스를 지나다가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후후후, 이제 슬슬 겁을 줘볼까나.’

놈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천천히 몸을 돌리며 목소리를 최대한 깔았다.

“이젠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 이곳이 바로…….”

“저거 병신 새끼 아냐? 우린 벌써 멈췄거든.”

“……!”

동빈과 주철은 이미 정지한 상태였다. 오히려 놈이 뒤돌아보기를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이 새끼들… 여긴지 어떻게 알았지?’

괜히 분위기 잡았던 놈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생각보다 더 난감한 놈들임이 틀림없었다.

“참 멀리도 왔다.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네?”

“9명… 각목 같은 무기도 있고…….”

반면, 적지까지 따라온 동빈과 주철은 여유로워 보였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며 상대의 전력을 분석했다.

우르르.

숨어있던 놈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빈의 예측은 정확했다. 안내했던 놈까지 아홉이었고 각목을 든 놈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겁대가리 없는 새끼들… 여기가 어딘지 알고 따라와.”

빨간 모자를 쓴 놈이 무리의 리더인 모양이었다. 굵은 각목을 질질 끌면서 앞으로 나섰다.

“여긴 병신 새끼들만 모였나. 너희가 따라오라고 했잖아.”

“어쭈? 진짜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네?”

빨간 모자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주철의 행동은 겁먹은 것을 감추기 위한 반항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얕보는 모습에 가까웠다.

“나 바쁘거든.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뭔지나 말해.”

“존나 재수 없는 새끼… 그러니까 니가 끌려온 거야.”

“난 원래 재수가 없거든. 그래서 어쩔 건데?”

주철은 건들거리며 빨간 모자의 심기를 자극했다. 특유의 막무가내 전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 새끼 봐라? 얼마나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고…….”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정신은 누가 못 차리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 끌어다가 패려는 행동이 정상이냐?”

“그러게 왜 남의 구역에서 깝치고 다녀? 근육 좀 나왔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양아치 새끼 말하는 것 좀 보게? 근육 나온 게 뭐가 문젠데? 불법이야? 벌금내야 돼?”

“알아서 기면 봐주려고 했더니…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빨간 모자가 흥분하고 말았다. 잘한 게 없으니 말싸움에서 밀리는 건 당연했다.

“꼭 이런 놈들이 불리하면 큰소리친다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이 양아치 소리를 듣는 거야.”

“이 새끼들 정말 안 되겠구만!”

아무리 잘못된 행동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무력이었다.

빨간 모자는 각목을 고쳐 잡으며 무력을 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마지막으로 충고하는데 말이야,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할 생각 없어?”

“이거, 끝까지 상황 파악 못 하는 놈이네.”

“상황 파악은 너희들이 못 하고 있거든. 진짜 마지막으로 충고한다. 정말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릴 생각은 없어?”

“재수 없는 새끼… 너는 내가 반드시 아작을 내버린다.”

“쯧쯧쯧… 계속 적반하장으로 나오시네? 재수도 너희가 없거든? 하필 우리를 만났으니 말이야.”

주철이 한발 물러서자 분위기는 더욱 삭막해졌다. 이 대 구의 대치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씨발! 난 근육 많이 나온 새끼들이 진짜 싫었어.”

“저놈들이 얼마나 놀았는지 모르지만, 다구리 까면 문제없어!”

양아치들은 한꺼번에 달려들 모양이었다. 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슬금슬금 각목을 쥐고 다가오면서 동빈과 주철을 압박했다.

“동빈아, 저 양아치들이 떼거리로 덤빌 모양인데.”

“그런데?”

주철의 물음에 동빈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싸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저런 놈들은 단단히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설치는 놈들이거든.”

“주철이, 너…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기는… 다시는 이런 짓 못하도록 초죽음을 만들어버려.”

“뭐? 나보고 싸우라고?”

동빈은 황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기세 좋게 나설 때는 언제고?

일만 크게 만들고 발을 빼는 주철이 못마땅했다.

“야! 혼자서 해결할 것처럼 난리를 치더니, 이게 뭐냐?”

“난 언제나 말로 해결하거든. 저놈들이 내 말을 안 들으니 어쩔 수 없잖아? 언제나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네가 나설 차례란 말이지.”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나 무릎 아픈 거 잘 알잖아.”

동빈과 주철은 서로 나서지 않겠다고 말싸움을 벌였다. 각목을 든 양아치들이 다가와도 여전히 티격태격했다.

“무릎 아프면 나서지나 말던가. 그러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다. 우리를 안내한 양아치 놈만 중간에 처리하고 도망치면 됐잖아. 왜 일을 크게 만들어!”

“저놈들이 내 말을 거부할지 누가 알았겠냐? 강남의 양주철 하면 다 통했는데 말이야. 내가 충고 한마디 하면, 눈물까지 철철 흘리며 반성했다니까.”

“야! 어떤 놈들이 눈물까지 흘리냐! 그것도 철철씩이나!”

둘의 말싸움이 점점 길어졌다. 격양된 분위기를 봐서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미친 새끼들… 이제 지네끼리 싸우고 난리네?”

“우릴 완전히 호구로 보고 있다는 소리잖아?”

황당하긴 동네 양아치들도 마찬가지였다. 내분이 발생한 것은 좋지만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새끼들이 남의 집 안방에서 별짓을 다 하는구만!”

후웅.

성격 급한 양아치가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말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지만 동빈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니들은 가만히 좀 있어라. 대화 좀 하자고!”

동빈은 차분한 경고까지 보내고서 몸을 움직였다. 조금 늦게 반응했지만 순간적인 속도는 엄청났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양아치가 만세를 불렀다. 발차기 한 방에 얼굴이 말이 아니게 변했다. 제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양손을 치켜든 상태에서 그대로 넘어갔다.

“야, 괜, 괜찮아.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뭐, 뭐야? 누, 눈까지 뒤집혔잖아!”

쓰러진 동료의 상태를 파악하던 양아치들은 기겁했다.

이렇게 강하고 빠른 공격이 있던가?

믿지 못할 결과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충격에 빠져서 아무런 행동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한 번 확인해보려고 안달하는 인간들도 꼭 나타났다.

“씨발… 좀 하는데…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우리는 당하고는 못살아!”

이번에는 두 명이 뛰어들었다. 동료의 상태에 자극을 받은 듯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

용기는 가상하고 지극한 동료애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지만 결과는 장담 못 했다. 쓸데없는 도발은 동빈의 화만 자극할 뿐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지!”

동빈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양아치들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저절로 움츠러드는 중압감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빠각빠각.

거칠고 투박한 타격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빠른 속도로 두 번을 타격한 것인지, 한 번의 발차기로 한꺼번에 두 명을 무너트린 것인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크억… 내, 내 이빨…….”

“어버… 어버…….”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컸다.

부러진 이를 찾는 놈은 그래도 나았다. 턱이 돌아간 놈은 입조차 벌릴 수 없었다.

“어, 어쩌냐… 자, 장난이 아니다.”

“지, 지금 우리가 쫄고 있냐……?”

“조용히 하라고 내가 계속 말했지.”

“…….”

작은 목소리였지만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동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아치들은 입을 다물었다.

일시에 소란스러움을 잠재운 동빈은 다시 주철을 쳐다보았다.

“난 싸움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네가 맡아라.”

조금은 퉁명스런 말투였다. 세 명을 처리해줬으니 할 일은 다 했다는 뜻이었다.

“동빈아,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나머지 놈들도 그냥 때려눕혀. 저런 놈들은 웬만큼 맞아서는 정신을 못 차린다.”

“넌 참 이상하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놈이 말이야, 어째서 나만 보면 싸움 못 시켜 안달이냐?”

동빈은 미팅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주철은 주먹을 쓰라고 짜증 날 정도로 부추겼었다.

“글쎄? 어째서 너만 보면 그럴까? 나도 조용히 살고 싶은 몸인데 말이야.”

“내가 질문했는데 다시 나한데 물어보면 어쩌자고!”

“동빈아,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 저놈들에게 걸렸다고 가정해보자고. 저놈들은 사람 패는 건 기본이고 별 해괴한 짓을 다 시켰을 거야. 만약, 여자가 걸렸다고 상상하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할 때까지 계속 두들겨 패야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말이야.”

“그렇게 패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하던가?”

동빈은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누가 덤비든 다 부숴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양아치들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좋다, 그러면 긴급 제안을 하겠다. 동빈이 네가 저놈들을 모두 박살 내면 캠프로 돌아간다.”

“정말이야?”

“물론이지. 내가 헛소리하는 거 봤냐?”

“확실히 약속했다. 저놈들을 처리하면 캠프로 돌아가는 거다.”

동빈은 이제야 싸울 의욕을 보였다. 거창한 이유보다는 개인적인 목적을 선택했다.

스르륵.

동빈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양아치들이 몰려있는 장소를 주목했다. 결심이 서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동빈의 특징이었다.

우르르.

동빈과 눈이 마주친 양아치들은 화들짝 물러났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동빈보다 주철이 더 원망스런 상황이었다.

“나 시간 없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여섯 놈 남았지?”

“씨발… 똥 밟았다. 존나 토껴!”

파파팟.

양아치들은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았다. 쓰러진 동료를 뒤로한 채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렸다.

“동빈아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야 한다.”

“잊지 마라. 캠프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동빈은 무작정 뛰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약속을 확인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알았으니까 어서 달려! 특히 빨간 모자는 절대 놓치지 마라.”

“걱정 마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올 테니까!”

후앙-.

동빈이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놓칠까 염려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양아치들이 흩어지지 않고 몰려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헉헉… 히, 힘들어 죽겠네.”

“속도 줄이지 마.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단 말이야.”

“헉헉… 우리가 한참 먼저 뛰었잖아. 조금만 쉬었다 가면……!”

동빈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던 양아치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동빈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조, 졸라 빠르다…….”

엄청난 속도에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번쩍했기 때문이었다.

빠악.

동빈의 주먹이 양아치의 안면에 작렬했다.

나머지 양아치들도 죽을힘을 내서 달리긴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동빈의 공격을 받고 차례차례 쓰러지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