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썩.
“난 이제 자유야.”
주철은 감옥이라도 탈출한 반응을 보였다. 담장 하나 넘었을 뿐인데 공기가 달랐다.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빈이 자식, 치사하게…….”
일단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동빈에 대한 섭섭함은 떨칠 수 없었다. 진짜로 탈영한 것도 아닌데, 자신을 따라오지 않은 동빈에 대한 원망이었다.
“김 조교,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사사삭-.
‘제, 젠장! 들키진 않았겠지.’
주철을 화들짝 몸을 숨기며 사태를 파악했다. 학교를 땡땡이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걸리면 작살이다. 아버지가 특별히 부탁을 했으니…….’
아버지의 성격이라면 죽여도(?) 좋다는 말까지 했을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이곳에서 죽기는 싫었다.
‘조교들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움직이자.’
부스럭부스럭.
주철은 반쯤 몸을 낮추고 걸었다. 부석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최대한 몸을 낮추고 기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그 지겨운 포복을 내 스스로 하다니…….’
분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낮은 포복의 진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좋아, 일단 저기까지만 도착하면 되는데…….’
제대로 포복을 했으니 땀이 줄기 되어 흘렀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나무가 울창한 숲이 보였다. 특전사 캠프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점이었다.
부석부석.
주철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목표가 코앞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오케이! 드디어 탈출했다.”
주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고생한 만큼 보람을 찾은 것이다. 이제 몸을 일으키고 떠나는 일만 남았는데, 바로 그때였다
불쑥.
“……!”
주철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군복? 차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풀썩.
주철은 얼굴까지 땅에 박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졌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는 뜻이었는데…….
“고작 여기밖에 못 왔냐?”
“……!”
주철은 땅바닥에 떨어트렸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매우 반가운 목소리였기에 다시 기운이 솟았다.
“뭐 하냐? 안 일어날 거야?”
“어휴∼ 괜히 놀랐잖아…….”
주철은 멋쩍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안함보다는 반가움이 앞서는 모습이었다. 괜히 싱글싱글 웃으면서 동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리도 반갑냐?”
“물론이지. 땡땡이도 둘이 쳐야 제 맛이거든.”
“이건 땡땡이 아니거든. 그나저나 이제부터 어쩔 거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탈영한 건 아니겠지?”
“글쎄… 우선은 좀 쉬어야겠다. 쉬지 않고 기어 왔더니 힘들어 죽겠다.”
주철은 다리를 쭉 펴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제부터 생각해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너 아무런 대책 없는 거지? 그렇지?”
“무슨 소리! 우선 차를 얻어 타는 거야. 조금 쉬었다가 저기 보이는 길까지 가면 된다.”
주철은 자그만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캠프에서 보이지 않는 부근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쉽게 차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탄다고 해도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서울로 갈 거야? 옷도 이 모양이고 말이야.”
“걱정 마라. 어떻게 하든 시내까지만 가면 되니까.”
주철은 천하태평이었다. 모든 게 잘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동빈은 믿지 않았다. 주철은 어느새 대책 없이 큰소리쳤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철아, 한 가지만 약속하자. 시내까지 가줄 테니 잠시만 즐기고 돌아오자.”
동빈이 목적은 주철을 달래서 캠프까지 데려가는 것이 분명했다. 주철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판단했는지 슬쩍 속마음 떠보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냐? 시내만 갈 것이면 탈영… 아니, 땡땡이치지도 않았다.”
“이건 단체 생활이야. 너 때문에 다른 애들이 피해를 본다고.”
“동빈아, 뭔가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다른 애들은 벌써 나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어. 나는 그게 싫었던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동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탈영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련회 비용이 한두 푼 드는지 알아? 나도 1학년 때 가봤는데 여기와는 비교도 못 해. 학생들이 낸 수련회비로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걸.”
“누군가 비용을 대신 냈다는 소리냐?”
“이제야 감이 잡히는 모양이구나. 이런 최신식 시설에 음식도 최고급이고 뛰어난 조교가 각 조에 두 명씩… 참, 우리는 세 명이지. 게다가 구급차까지 대기한 엄청난 의료진. 돈 많은 기업체도 이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훈련이 힘든 거 빼놓고는 부족한 점이 없으니…….”
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수련회임을 감안하면 매우 풍족한 생활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술수에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 않다. 이제 다 쉬었으니 일어나야겠다. 동빈이, 너는 따라오든 말든 맘대로 해라.”
“주철아, 잠깐만.”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는데?”
동빈은 휴식을 끝내고 움직이려는 주철을 만류했다. 주철을 따라갈지 그냥 돌아갈지 결정을 못 한 것이다.
“넌 아버지가 그렇게 싫으냐?”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건데?”
“아버지 때문에 삐쳤나 해서… 넌 한번 삐치면 대책 없잖아.”
“야! 나 안 삐쳤거든!”
“아, 알았어. 목소리가 너무 크다. 들키면 어쩌려고…….”
주철의 행동으로 보아 삐친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동빈이 당황할 정도였다.
“아버지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돈 많은 아버지가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데?”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 그런 물질적 풍요 때문에, 네 성격이 이상해진 거 아니야? 툭하면 화내는 것도 그렇고…….”
“그만 하자, 응? 난 간다.”
주철은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동빈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주, 주철아, 잠깐만…….”
“시간 없다. 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혹시 말이야, 어머니가 없어서 정을 못 받고 자랐냐?”
멈칫.
“그렇구나, 그렇지?”
주철이 걸음을 멈추자 동빈은 확신에 찬 표정이 되었다. 친구의 약점을 들쑤시다니… 동빈이 친구가 없는 이유도 알 만했다. 걸음을 멈춘 주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빈아.”
“왜?”
“나는 어머니가 없어서 정을 못 받은 게 아니야. 미국에 있는 여자까지 합치면…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모두 5명이다.”
“…….”
“다시는 이런 질문 하지 마라. 저번에 네가 양자라는 비밀을 밝혔기에 대답하는 거다.”
“미안하다, 주철아.”
“그렇게 미안하면 따라와라. 혼자 가려니까 심심하다.”
“무, 물론이지.”
괜한 질문 때문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주철을 회유하러 왔던 동빈은 어쩔 수 없이 주철을 따르는 모습이었다.
한가한 길. 너무 한가해서 지나치는 차량 하나 없었다. 탁 트인 양쪽 방향을 살펴보아도 차량은커녕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오늘 중으로 차가 오겠냐?”
“꾹 참고 기다려.”
동빈과 주철은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휑한 바람만 부는 길을 바라보며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근데 주철아, 이런 차림으로 차를 얻어 탈 수 있을까? 무장공비로 오인하면 어쩌지?”
동빈은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김빠지는 소리만 골라서 주철의 탈영 의지에 찬물을 부었다.
“다 생각이 있다고 했지. 너도 나처럼 상의를 벗어.”
군복 상의를 벗자 러닝셔츠밖에 남지 않았다. 동빈은 흰색의 보통 러닝셔츠였고 주철은 스포츠형 러닝셔츠였다.
“너무 이상해 보이는 거 아니야?”
“옷걸이 좋으면 상관없어. 얼굴하고 몸이 받쳐주면 개성으로 카바가 되거든.”
주철의 말대로 어색해 보이진 않았다. 반항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려고 일부러 코디한 느낌이었다.
“흠… 다 좋은데 한 가지 부족하군.”
부욱부욱.
주철은 자신의 러닝셔츠를 찢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찢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게 모양을 내는 정도였다.
“야, 멀쩡한 옷은 왜 찢어?”
“바지가 너무 지저분해서. 이 정도는 해줘야 밸런스가 맞지. 야성적인 느낌이 팍팍 살지 않냐?”
“그럼 나도 찢을까?”
“넌 됐다. 상체 근육이 러닝셔츠를 찢으려 하니까…….”
동빈의 상체 근육은 금방이라도 러닝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주철은 비교당하는 느낌이 싫어서 꼼수를 쓴 것이었다.
“동빈아! 저, 저기 불빛.”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어떤 차종인지는 모르지만 이쪽으로 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냥 지나가면 어쩌지?”
“무슨 소리! 목숨 걸고 잡아야지!”
이번에 놓치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동빈과 주철은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