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224)

수련회 첫날.

학생들에게는 충격과 공포의 하루였다. 혹독한 훈련으로 몸은 피곤하긴 했지만 야간 훈련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위로로 삼았다. 저녁을 먹은 학생들은 내무반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겼다. 이제 점호를 마치면 기다리던 취침에 들 수 있었다.

“동빈아, 나는 도저히 적응을 못 하겠다.”

주철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하소연했다. 내무반 침상에 걸터앉은 모습이 그렇게 처량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이제 겨우 하루 지났다.”

“그러니까 미치겠다는 거 아니냐. 답답하고 짜증 나서 돌아버리겠다.”

“큰일이다. 나중에 진짜 군대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미안하지만 난 군대 안 가. 아니, 가고 싶어도 못 가. 사고를 당해서 무릎이 아작 났었거든.”

주철은 억울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저번 학교에서 수련회를 마친 상태 아닌가? 게다가 군대도 갈 수 없는 몸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은데?”

“젠장! 그러니까 조교들이 더 시키잖아! 뺀질거린다고 말이야. 심하게 다쳐서 외국에 있는 병원까지 다니면서 수술을 받았단 말이야. 이건 수술이 너무 잘돼도 문제야…….”

주철의 불만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수련회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그렇게 심하면 조교한테 말해. 무리하면 큰일이잖아?”

“벌써 말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특별히 더 굴려달라고 부탁했대. 수술은 잘 끝났으니 걱정 말라고…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벌떡.

주철이 몸을 일으켰다. 주먹까지 불끈 쥔 모양이 수상했다.

“왜 일어나? 점호 받아야지?”

“더 이상 못 참아. 이곳을 벗어나고 말 거야.”

“뭐야? 탈영이라도 하려고?”

“야, 탈영이 아니지. 이곳이 진짜 군대냐? 난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정확히 말하면 무단이탈에 가까웠다. 그러나 특수한 병영 캠프임을 감안하면 탈영이란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제발 참아라. 네가 이러면 다른 애들까지 골치 아파진다.”

“나만 편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학생들 모두가 피해자란 말이지. 부모님들은 이런 곳인 줄 뻔히 알면서도 보낸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직도 모르겠니? 학교에서 꼼수를 썼단 말이야. 부모님들께 따로 통지서를 보냈어. 이러한 훈련이니 어떻게 하겠냐고… 여기 온 놈들은 모두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이야.”

주철의 설명은 반 정도 맞았다. 학생들 모르게 부모들의 동의를 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식이란 말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었다.

“주철아. 여기에 온 게 그렇게 분하냐?”

“당연하지. 난 너처럼 군대 체질이 아니거든. 어쩐지… 수련회 떠나는 날, 아버지 반응이 조금 이상했어.”

“뭐라고 하셨는데?”

“고생이 많을 거라고 하셨거든. 그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동빈아, 네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셨냐?”

“그냥 편하게 쉬다 오라고…….”

“…….”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곳에 보내면서 편히 쉬라니? 주철의 표정은 동빈이나 동빈의 아버지 둘 중 하나는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동작 그만! 일석점호를 시작한다.”

“주철아,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자.”

동빈은 서둘러 말을 끊고 점호 준비에 들어섰다. 특별 조의 보고자였기에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침상 위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에 끝내자. 틀리는 놈들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주철아, 나는 네가 가장 걱정되거든?”

괜히 무게를 잡았던 주철은 얼굴까지 붉어졌다. 동빈의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덜컹.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굳은 표정의 선임 조교가 등장하자 내무반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동빈과 끝까지 접전을 펼쳤던 인물이다.

“전체 차렷!”

동빈의 구령 소리에 맞추어 학생들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무릎에 붙인 상태에서 팔을 쫙 폈다. 일석점호의 의미를 아는지 군기가 바싹 든 모습이었다.

“충성!”

“충성.”

동빈의 거수경례는 완벽했다. 절도 있는 동작과 목소리. 진짜 군인이라고 해도 의심받지 않을 정도였다.

“제1조. 일석점호 인원 보고. 총원 30, 열외 무, 현재 원 30, 좌에서 우로 번호!”

“하나!”

“둘!”

“셋!”

점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선임 조교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많은 조라고 하더니… 가장 괜찮은 편이군. 쉬어.”

선임 조교의 쉬어 명령을 받은 동빈은 뒤로 돌았다.

“쉬어.”

동빈이 쉬어 명령을 전달하자 학생들은 부동자세를 풀었다. 거의 완벽한 점호였기에 선임 조교도 트집을 잡고 싶지 않았다.

“훈련받느라 고생이 많았다. 딴 짓 하지 말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 바란다. 음주나 흡연 기타 부정행위가 적발될 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벌칙이 따를 것이다. 알아듣겠나!”

“네, 알겠습니다!”

“모두 수고했다. 그리고 자네 이름이 김동빈인가?”

“네, 그렇습니다.”

“점호 끝나고 잠시 따라와라. 이상, 점호 끝.”

“점호 끝. 충성!”

수련회의 밤은 조용했다. 점호가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곧바로 취침에 들었다. 선임 조교의 말처럼 딴 짓 하는 학생은 찾을 수 없었다.

동빈은 선임 조교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내일도 날씨가 맑을 모양인지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떠있었다.

“조교님, 어디로 가는 겁니까?”

“상황실로 가고 있다.”

상황실은 학생들의 숙소와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밖으로 나와서 걸어야 했다.

“무슨 이유로 상황실까지 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왕 교관님이 찾으신다.”

“왕 교관님이요?”

“너희들이 선글라스 교관이라고 부르는 사람 말이다. 왜 그런 표정이지?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나?”

선임 조교는 고개까지 갸웃했다. 교관의 호출 때문임을 밝혔으나 동빈의 얼굴에는 아직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저기… 교관님이 성이 왕씨인가요? 아니면 이곳을 총괄하시는 분을 말하는 것인지…….”

“둘 다 해당된다. 왕 교관님이 이곳의 총책임자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동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 있을 때는 전혀 궁금하지 않던 내용이었다. 사회 물을 먹게 되면서 언어의 이중적인 구조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특전사에 들어올 생각 없나?”

“없습니다.”

선임 조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동빈의 대답은 간단했다. 절대로 특전사가 되지 않겠다는 반응이었다.

“조금 실망이군. 아무튼 다 왔다. 여기로 들어가면 될 거야.”

선임 조교는 작은 건물에서 발길을 멈췄다. 상황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자네도 편히 쉬게. 내일 보자고.”

선임 조교는 학생들의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내일도 교육이 있으니 편히 쉬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교육 준비를 하느라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충성! 101번 훈련병 김동빈. 교관님께 호출받고 왔습니다.”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동빈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고부터 했다. 누가 지었는지 교관의 별명 하나는 제대로 지은 듯했다. 밤에도 교관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오느라고 수고했어. 이쪽으로 앉지.”

“감사합니다.”

교관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동빈은 지체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바로 명성고의 최고 문제 학생인가?”

“문제 학생은 아닙니다. 단지 공부를 조금 못할 뿐입니다.”

훈계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인가? 교관의 말에는 가시가 있어 보였다. 최고의 문제 학생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공부를 못해서 문제 학생이라고? 세상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어디 있나? 내가 받은 서류에는 공부에 관한 내용은 없었어. 학교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말썽을 피웠다고 하던데?”

“죄송하지만 말썽을 피우고 싶어서 피운 게 아닙니다. 나름대로 피해보려고 했지만 다른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쯧쯧쯧… 그러게 뭐라고 했어? 그런 놈들은 처음부터 밟아줘야 한다고 했잖아.”

“……!”

교관의 태도가 변했다. 아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동빈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교관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날 모르겠나?”

“전혀…….”

“선글라스를 써서 그러나…….”

스윽.

교관이 선글라스까지 벗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제야 알겠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동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누, 눈이 생각보다 선하십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당최 기억이 없다. 군 생활까지 더듬어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저렇게 크고 맑은 눈을 가진 남자라면 대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수염도 깎아서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수염을 만들어 붙일 수는 없잖아?”

“수염… 아! 털보 아저씨!”

“이제야 기억하는구나. 막내야, 잘 지냈냐?”

예비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물론, 보통 예비군은 아니었다. 특수부대 출신의 무술 교관들이 모인 자리였다.

“털보 아저씨… 아니, 교관님. 여기는 어떻게?”

반가움은 잠시. 동빈은 새로운 의문에 휩싸였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청와대 경호원. 경찰 대테러 요원, 국정원 특수부대 등에서 무술을 가르치는 신분이었다. 이런 산골에서 학생들이나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만두려고 했더니 잠시 이곳을 맡으라고 하더군. 편히 쉬면서 생각이나 정리하려고 왔는데… 어휴∼ 학생들 상대하는 게 만만치 않아. 차라리 특수 요원 교육시키는 게 편했지…….”

“그런데 수염은 왜 깎으셨습니까? 정말 몰라봤습니다.”

“학생들에게 너무 위협적으로 보일까 봐 그랬지.”

“그럼 선글라스는 왜 끼고 다니십니까?”

“내 눈이 너무 선하잖아. 수염까지 깎으니 카리스마가 부족했어. 선글라스를 끼면 조금 낫다고 하더군.”

교관도 사연이 많은 인물이다. 편히 쉬러 왔다가 고생만 엄청 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 참! 막내는 사이다 좋아하지.”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폭풍 구보 말이야, 이길 수도 있었는데 무승부로 끝냈잖아.”

교관은 냉장고를 뒤지며 말했다. 동빈이 마지막에 속력을 줄인 사실을 눈치 챘던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아셨습니까?”

“물론이지. 내 군대 경력이 얼만데… 자! 여기 시원한 사이다.”

교관은 사이다 캔을 동빈에게 전해주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자신이 마실 캔 맥주가 들려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사이다 하나 가지고 뭘… 내일부터 쉬고 싶으면 말해. 막내 정도면 이런 훈련 받을 필요 없잖아?”

“아닙니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받겠습니다.”

동빈은 교관의 호의를 거절했다. 필요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혼자서 빠지기는 싫었다. 만약, 주철이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뭐가 걸려서 그러는 거지? 솔직히 막내 같은 존재가 있으면 조교들도 껄끄럽거든. 계급도 조교들보다 높을 거 아니야?”

“저는 계급 없습니다.”

“뭐야? 더 무서운 놈이었잖아?”

맥주 캔을 따려고 했던 교관은 주춤했다. 계급이 없는 군인. 어떤 존재인지 대충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이다는 잘 마시겠습니다.”

“혼자 마시면 쓰나. 자! 건배 하자고.”

틱.

사이다 캔과 맥주 캔이 부딪쳤다. 동빈의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교관의 약속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