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224)

오후 일과가 거의 끝났다. 학생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이제 구보만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여자들은 연병장을 돌고 남자들은 산악 폭풍 구보를 실시하겠다.”

‘저녁을 먹으면 뭐 해. 야간 훈련이 남아있는데…….’

주철은 선글라스 교관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일정에도 없던 야간 훈련의 부담이 너무나 컸다.

“마무리 구보는 중요하다. 운동을 하지 않아서 뭉쳤던 근육을 푸는 효과도 있다.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려면 요령 피우지 말기 바란다.”

‘요령을 어떻게 피워. 계속 이대로 당해야 하는가… 아, 아니다!’

주철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훈련을 피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교관님! 긴급 제안 하겠습니다.”

주철이 갑자기 손을 들고 일어섰다.

“긴급 제안? 무언지 들어는 봐야겠지.”

교관도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야간 훈련은 저희가 싸웠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특히, 남자들의 실수가 많았습니다.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 만회하겠다는 것이지?”

“폭풍 구보 할 때 말입니다, 학생들 중에서 조교를 앞서는 사람이 있으면 야간 훈련을 취소해주십시오.”

“이상하군. 명성고등학교는 육상부가 없을 텐데?”

“잘못을 만회하기 위한 필사적 노력입니다.”

“아주 좋은 제안이군.”

교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줘도 손해날 것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허락하신 겁니까?”

“좋아, 허락한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명심해라. 안전 규정을 따라야 한다. 무리하게 뛰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당연합니다.”

“매우 자신만만하군. 그런데 말이야, 산악 폭풍 구보는 쉬운 게 아니다. 육상을 전공한 학생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조교를 이길 수 있을까?”

“흐흐흐.”

학생들의 표정이 매우 수상하다. 훈련이 힘들어 미친 것인가? 기묘한 웃음을 짓고는 한 사람만을 응시했다.

“뭐, 뭐야?”

“동빈아, 너만 믿는다.”

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동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빈은 엄청 부담스러운 학생들의 눈빛을 감당해야 했다.

‘이거 시선이 만만치 않은데? 게다가 조교들까지…….’

학생들만 동빈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인가. 특전 캠프의 조교들까지 동빈을 주시했다.

“모두 주목!”

선글라스 교관은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탐지했다.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할 모양인지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는 학생들의 의견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은 최선을 다하고 조교들은 방심하지 말기 바란다. 출발은 기존의 역순으로 진행한다. 너희가 기대를 거는 학생에게 쉴 시간을 주겠다.”

“교관님 멋있어요!”

학생들의 함성이 터졌다. 야간 훈련을 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것이다.

“마지막까지 안전사고 없이 훈련을 마치기 바란다. 이상.”

선글라스 교관은 다시 사열대 의자에 앉았다. 학생들과 조교들의 대결을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충성! 왕 교관님, 정말로 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까?”

사열대에 올라온 선임 조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생들과 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북하다는 반응이었다.

“물론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학생들에게 끌려가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훈련을 우습게 알면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자네 혹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들어봤나?”

“네?”

선임 조교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의 가장 큰 문제는 창의성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학생들에게 강압하고 싶지 않다. 지금 학생들의 얼굴을 보게. 피곤하거나 지친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잘 따르고 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렇군요.”

선임 조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훈련을 받을 때보다 분위기가 좋아진 상태였다.

“나는 말이야, 학생들에게 지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야. 그러면 진짜로 조교들을 우습게 알지도 모르지…….”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선임 조교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걱정하는 것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실수를 했군. 자네가 특별 조를 담당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조교들도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충성.”

선임 조교는 거수경례를 마치고 사열대를 벗어났다. 처음과는 다르게 상당히 굳은 얼굴이었다.

“오후의 마지막 훈련인 폭풍 구보를 실시한다. 남학생은 6조부터 출발 준비!”

우르르.

조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6조 학생들이 움직였다. 출발선에 위치한 남학생들의 표정이 남다르다. 조교를 잡고 야간 훈련을 피하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조교들은 안전사고에 최선을 다해라. 6조부터 출발!

“출발!”

담당 조교들의 인솔에 따라 구보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빨리 달리지는 않았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5조부터는 김 조교가 출발을 담당한다. 특별 조를 담당하는 조교들은 사열대 앞으로 집합.”

선임 조교는 구보 훈련의 총괄 임무를 다른 조교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특별 조를 담당하는 조교들과 따로 모임을 가졌다. 방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동빈아, 자신 있지? 너만 믿는다.”

“그만 좀 해라. 부담스러워죽겠다.”

주철은 동빈의 어깨까지 주물러주며 아부를 했다. 꼭 이기라는 협박보다 더 무서운 행동이었다.

“너도 몸 좀 풀어야 하지 않겠어? 쟤들이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주철은 조교들이 몸을 푸는 장면을 주시했다. 조교들이 뭔가를 하니, 마음이 불안하여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괜찮아. 난 계속 움직였잖아.”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폭풍 구보는 뭐냐?”

“일정한 속력으로 뛰는 게 아니라 강약을 조절하지. 보통 구보 속력으로 달리다가 점점 빨라져. 그러다 전력 질주 하고 다시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처음 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 거야.”

“좋아! 너는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지? 그렇지?”

주철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무엇이든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었다.

“5조 출발! 여학생들도 구보 준비.”

운명의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다. 5조 남학생들도 연병장을 벗어났고 여학생들이 구보 준비에 들어섰다.

“여학생 출발! 남학생 4조 출발 준비.”

여학생들은 평탄한 연병장을 달렸다. 4열 종대로 달리기에 많은 인원이 필요 없었다. 남은 조교들은 남학생들의 폭풍 구보에 투입되었다.

“4조 출발!”

우르르.

폭풍 구보는 5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진행되었다. 4조가 출발하자 3조 학생들이 출발 준비에 들어섰다.

“동빈이 파이팅!”

여학생들의 함성이 들렸다. 연병장을 돌다가 동빈의 앞을 지나치면 이처럼 응원을 보냈다. 어떤 여학생들은 윙크까지 하면서 난리를 쳤다.

“우와! 정말 부담스럽다.”

동빈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뛰려 했지만 주변의 기대가 만만치 않았다.

“꼭 이겨야 한다. 우리들의 생사가 너한테 달려있어.”

“생사씩이나… 주철아, 제발 그만 좀 해…….”

“동빈이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여학생들의 응원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출발은 계속 이어져 남학생 2조도 연병장을 벗어났다. 마침내 동빈이 속한 특별 조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1조 출발 준비.”

조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특별 조 학생들은 몸을 일으켰다. 2열종대로 열을 맞추며 출발 명령을 기다렸다.

“뭐야? 우리만 조교가 4명이잖아!”

주철의 불만이 또 시작되었다. 다른 조들은 3명인데 특별 조에만 4명의 조교가 붙어있었다.

“주철아, 우리는 문제가 많은 조거든. 원래부터 담당 조교가 한 명 더 많았어.”

“그, 그런가?”

과민 반응을 보인 주철은 무안한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출발 준비가 끝나자 조교는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요령 피워도 소용없습니다. 무리한 달리기 또한 용납하지 않습니다. 조교들의 지시만 잘 따르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학생들은 어느 조보다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학생들이 기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중간에 힘들면 포기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 낙오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걸어서라도 이곳에는 도착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구보 준비를 외치면 우렁찬 기합과 함께 달릴 준비를 합니다. 특별 조… 구보 준비!”

“아이야!”

학생들은 전투적인 자세로 구보에 임했다. 기합도 좋고 강한 투지도 느껴졌다. 담당 조교는 준비가 끝났다는 표시를 총괄 조교에게 보냈다.

“남학생 1조 출발!”

“출발!”

우르르.

조교의 명령과 함께 학생들은 힘차게 뛰어나갔다. 특별 조라 그런지 처음부터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동빈이 파이팅!”

문제아들이 모인 특별 조는 여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연병장을 벗어났다.

구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산악이 아닌 평지를 달렸지만 학생들은 벌써부터 헉헉거렸다.

“우와… 죽겠다.”

“조금만 참아라.”

조교들은 학생들의 상태를 봐가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주철과 동빈은 중간쯤에 위치해서 달렸다.

“도, 동빈아. 이 정도 속력으로 계속 뛰지는 않겠지?”

“물론이지. 조교들 표정 좀 봐라. 괜히 이상한 짓을 해서 말이야.”

조교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지 강렬한 눈빛을 유지했다.

“이제부터 속력을 내겠습니다.”

“젠장! 벌써부터 속력을 내는 거야!”

주철의 불만이 끝나가 무섭게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처음부터 헉헉거렸던 학생들은 하나 둘 처지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주, 죽인다!”

낙오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한 명의 조교가 빠지더니 뒤처진 학생들을 수습했다. 무리와 떨어진 학생들은 어떻게 하든 연병장까지 걸어와야 했다.

“전력 질주!”

“이, 이게 뭐야!”

파파파팟.

장난이 아니다. 주철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그래도 조교들과 보조를 맞추기 쉽지 않았다.

“젠장! 언제까지 전력 질주야!”

조교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특별 조이기에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조교들이 다시 속력을 늦추었을 때는 이미 반 이상이나 뒤처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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