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224)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

차량 속의 학생들은 마냥 신이 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핸드폰은 어쩌냐? 난 핸드폰 없이는 못사는데?”

“괜찮아. 소지품 검사 대충 한다고 들었어.”

학생들은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가는 것으로 판단했다. 작년에도 그랬으니 올해도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럼 그것도 가져왔냐? 밤을 심심하게 보낼 수는 없잖아.”

“물론이지. 이따가 밤에 보자.”

수련회의 진실을 아는 것일까? 학생들은 행복한 수련회를 꿈꾸며 크게 고무되었다.

끼이익.

명성고등하고 학생들을 태운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넓은 수련장 연병장에 차례차례 주차했다.

“참, 오래도 왔다. 배고파 죽겠네.”

학생들은 뻐근한 몸을 풀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것이다.

“이야! 분위기 죽인다!”

“처음만 그래. 나중에는 조교하고 같이 장난치고 그런대.”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조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연병장에 집합했다. 붉은 모자와 얼룩무늬 군복이 무시무시하게 보였지만 겁먹은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학생 여러분, 서둘러주십시오. 그래야 일정을 맞출 수 있습니다.”

“불쌍한데 도와주자. 빨리빨리 움직여.”

생각보다 분위기도 괜찮아 보였다. 학생들은 가벼운 정신 교육을 받고서 내무반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련회에 대한 환상은 깨지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이미 배치된 조 편성에 따라 숙소가 배정되었다.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는 수련원에서 나눠준 훈련복을 입었다. 번호가 새겨진 명찰을 달면서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동빈아? 이런 걸 어떻게 입냐?”

주철은 불만을 터트렸다. 구질구질한 훈련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대충 입어라. 잘만 어울리는데?”

“이게 뭐니? 윗옷은 작고 바지는 크잖아!”

“불평하지 말고… 옷에 몸을 맞추면 되잖아.”

“너 제정신이냐? 어떻게 옷에 몸을 맞추냐?”

동빈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이미 훈련복을 다 갈아입은 상태에서 식당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동빈아, 어째 조 편성이 이상하지 않냐?”

“그러게?”

주철의 의문은 타당성이 있었다. 내무반을 살펴보니 학교 문제아들만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철과 동빈이 같은 조가 된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대충 며칠 견디면 되겠지.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밥은 먹어야겠지…….”

와르르.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 12시 10분. 동빈과 주철이 나서자 다른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4열 종대로 모여주십시오.”

내무반 밖에는 조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숫자가 학생들을 지도했다.

“소문 그대로네? 드디어 시작하나 본데?”

“그러게. 오리걸음이나 하겠지.”

학생들은 대충대충 열을 맞췄다. 절도 있는 행동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정도도 열심히 한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밥 먹기 싫습니까.”

“먹고 싶습니다.”

조교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어수룩한 군대 말투를 흉내 내며 장난을 쳤다.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취침…….”

“뭐야? 자라는 소리야?”

“군기 잡으려는 거야. 대충 누워…….”

학생들은 귀찮은 듯 교관의 명령을 따랐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 못 한 것이 분명했다. 키득거리며 땅바닥에 엎드리는 시늉을 했다.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는군요. 모두 뒤로 취침!”

“심하다. 옷 버리잖아?”

“괜찮아. 처음만 이럴 거야.”

부석부석.

불만이 가득한 학생들은 억지로 따라 했다. 이 정도 했으니 됐다는 반응이었다.

“조교님. 배고파요.”

“맞아요. 밥 먹고 해요.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는 푸념이 이어졌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것이다. 이것이 학생들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꽤 부리는 새끼들 모두 잡아내! 모두 좌로 굴러!”

“뭐, 뭐야?”

“귀가 먹었어! 좌로 구르란 말이야!”

“동작 봐라. 빨리빨리 못 해!”

뒤에 버티고 있던 조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엄청난 질타와 험악한 인상으로 학생들의 넋을 쏙 뺐다.

“이대로 식당까지 포복으로 기어간다. 뭐 해! 빨리빨리 움직여!”

“조, 조교들이 미쳤나 봐!”

학생들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깨달았다. 처음은 굴린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분위기가 삭막했는지 학생들은 설설 기었다.

“저놈은 뭐야? 왜 저리 빨라!”

모두가 힘들게 움직였다. 그러나 동빈은 기어가는 것도 빨랐다. 교관이 놀랄 정도의 속력으로 식당을 향해 돌진했다.

식당 앞은 먼지가 펄펄 날렸다. 늦게 도착한 학생들의 몸은 흙먼지로 범벅이다. 요령을 피우거나 몸이 아프다고 우겨도 소용없었다. 뒤처지는 학생들은 조교가 달라붙어 끝까지 포복을 시켰다.

구시렁구시렁.

불만이 가득한 주철이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엉망이 된 옷으로 보아 훨씬 많이 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젠장! 이게 수련회 맞아? 학생들 잡으려고 환장을 했나!”

타악.

주철은 신경질적으로 식판을 내려놓았다.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 했던 자신의 의도와 크게 벗어난 것이다.

“주철아, 괜찮으냐?”

가장 빨리 식당에 들어왔던 동빈은 반이나 먹은 상태였다. 주철과 보조를 맞추려는지 밥 먹는 속도를 천천히 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우리가 왜, 특전사 병영 체험을 받고 있는 거냐고!”

주철의 시선은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있는 벽면을 향했다.

특전사 병영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식당 밖에서는 볼 수 없고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눈에 띄었다. 한참을 굴러서 식당까지 들어온 학생들을 또 한 번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신들이 어디에 왔는지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주철아, 그냥 식사나 해라. 솔직히 이 정도면 특전사 체험도 아니다. 일반 사병 훈련보다 오히려 가벼운 수준이지.”

“무슨 소리야? 요즘 군대 좋아졌다고 하더만.”

“이렇게 식사 시간에 터치 안 하는 게 어디냐? 음식도 이만하면 최상급이다.”

“동빈아, 아무리 봐도 너는 군대 체질 같다.”

주철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길게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서둘러 식사에 몰입했다. 조금이라도 더 쉬려면 빨리 식사를 마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재잘재잘.

갑자기 식당이 시끄러워졌다. 어색한 군복을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떼거지로 등장했다.

“어머나! 남자 애들은 엄청 고생한 모양이다.”

“어우, 땀 냄새… 정말 게걸스럽게도 먹는다.”

여학생들의 상태는 괜찮았다.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았고 힘든 기색도 전혀 없었다.

“아줌마, 저는 조금만 주세요.”

“기지배, 여기서도 다이어트냐?”

힘들게 고생하지 않았으니 먹는 양도 적었다. 배식을 받은 여학생들은 빈자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안녕, 동빈아. 훈련은 괜찮았어?”

“나야 뭐…….”

부반장 유나는 동빈이 앉아있는 식탁을 선택했다. 다른 곳보다 훨씬 한가했다. 여자들은 주철 때문에 꺼리고 남자들은 동빈 때문에 꺼리는 자리였다.

“주철이 너는 안 괜찮아 보인다?”

“놀리지 마라. 지금 한창 열 받은 상태거든.”

“그래. 열 많이 받아라. 그런데 석진이가 안 보이네?”

“벌써 먹고 나갔어. 우리가 속한 조보다 먼저 왔나 봐.”

유나의 궁금증은 동빈이 설명해주었다. 식사를 이미 끝냈고 주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유나 너는 괜찮으냐?”

“응, 그냥 걸어오는 게 뭐가 힘들어? 조교들도 무지 친절해.”

동빈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구르지 않고 편하게 식당까지 온 것이다. 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이에 발끈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남녀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가뜩이나 화가 났던 주철의 마음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주철뿐만이 아니었다. 여학생들이 식당까지 편하게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남학생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교관님. 억울합니다. 어째서 여자들은 봐주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성차별입니다.”

“남자들이 동네북입니까! 군대도 남자들만 가는데, 여기서까지 차별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남학생들은 불만의 수준을 넘어서 농성이라도 벌일 태세였다.

“또 군대 이야기다. 남자들은 아기 안 낳잖아.”

“군대 가는 건 의무지만 출산은 의무가 아니잖아! 내가 20살에 군대 가면 너는 20살에 애기 낳을 거야?”

“남자는 딱 2년 고생이지만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면 평생 고생이야. 여자라서 받는 불이익이 얼마나 많은데!”

식당은 난상 토론장으로 변했다. 출산과 군대 문제가 붙었으니 해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에 동의를 했는지 서로 목청을 키우기 여념 없었다. 너무나 소란스러워 정상적인 식사를 못할 정도였다.

“조용! 누가 식사 중에 싸우라고 했나!”

결국 식당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교관이 나섰다. 인상을 구기며 호통을 치자 주위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남학생들의 요구는 받아들이겠다. 식사 시간 이후… 여학생들도 똑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우와!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너무해요, 교관님…….”

남학생들은 환호했고 여학생들은 아쉬움을 터트렸다. 그러나 교관의 판결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군대는 여자라고 봐주는 거 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훈련 프로그램도 그러한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이러한 차이점을 용납 못 한다면 그 뜻을 받아주겠다. 여학생의 훈련 강도가 증가한 만큼 남자들의 훈련 또한 더욱 혹독해질 것이다.”

“마, 말도 안 돼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남학생들은 뒤통수 맞았다는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훈련의 강도만 세진 셈이었다.

“교관님, 처음으로 돌려주세요. 교관님, 용서해주세요.”

“맞습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조용! 더 이상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 모두가 너희들이 선택한 결과다!”

교관의 질타에 식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학생들이 합심하여 나섰지만 교관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여학생들의 애교 작전도, 남학생들의 반성도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명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잘 듣기 바란다. 극기 훈련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자신감을 얻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 훈련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동료들과의 유대감을 함양하는 것이다.”

선글라스 교관은 잠시 말을 끊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였다. 물론 교관의 말에 토를 다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입시 제도가 바뀌어서 동기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서로 조금씩 배려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상을 받았겠지. 훈련 기간 동안 서로를 도우며 생활하기 바란다.”

“…….”

교관의 훈계는 끝났지만 학생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푹 처진 분위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나? 식사를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이다. 12시 50분까지 연병장에 집합해야 한다.”

우당탕탕.

이제야 학생들은 못 다한 식사를 하기 위해 난리였다. 훈련이 더욱 혹독해진다니 배를 든든히 채워야 했다.

“미치네… 얼마나 더 힘들어진다는 거야.”

뭐든 불만인 주철도 서둘러 밥을 먹었다. 초반부터 많이 굴렀기에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최대한 휴식을 취한 뒤에 훈련에 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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