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복귀. 형사처분은 무혐의로 마무리되었고 학교 자체의 징계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수월하게 넘어갔지만 예전처럼 생활하기는 힘들었다. 대놓고 덤비러 오는 놈들은 없어졌지만 이상한 방법으로 동빈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늘어났다.
와작.
“우와! 미치겠네!”
동빈은 편지를 구기며 탄식을 터트렸다. 식당에서 점심 잘 먹고 교실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 편지를 전해준 것이다. 식당 문에 끼어있었다는 설명이었고 김동빈이라는 수신인만 적혀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석진이 무슨 일인가 하여 구겨진 편지를 살펴보았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혈서였다.
“이야! 한 맺힌 원한이 철철 묻어나는구나!”
붉은 피로 저주의 말을 적어 놓은 편지. 잘생긴 정성태 오빠의 얼굴을 돌려달라는 것과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성태가 누구야?”
“사대천왕 중 한 명인데…….”
“뭐? 강남 연합 전멸 사건은 네가 한 게 아니라며?”
“그러게 말이다.”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강남 연합이 동빈을 공공의 적으로 선언했고 이상한 편지나 메일이 끝없이 날아들었다. 자신을 추종하는 팬 카페도 싫었지만 저주의 내용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오해를 받을 수는 없잖아. 주철이한테 부탁해보는 게 어때? 한때는 강남에서 꽤나 날렸다는 소문이던데?”
“요즘 그놈과 냉전 중이잖아.”
“친구들끼리 무슨 냉전이냐? 이번 사건으로 강남에 있는 주철이 친구들이 많이 다쳤다고 하더라. 괜히 속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먼저 사과하면 될 거야.”
“야!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 뭘 사과해?”
동빈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죄를 지었어야 사과할 것 아닌가? 오히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주철이 원망스러웠다.
“동빈이 너는 고지식해서 탈이다. 주철이가 널 못 믿는 게 아니잖아? 너도 죄가 없다며 뻣뻣하게 나갔잖아. 강남 친구들과 네가 원수가 되었는데 그놈 마음이 편하겠냐?”
“그런가……?”
“물론이지. 살살 달래서 말하면 주철이 그놈이 직접 오해를 풀어주려고 나설 거야.”
끄덕끄덕.
동빈은 석진의 말에 동의하는 행동을 보였다. 생각해보면 일거양득이나 다름없었다. 주철과 화해도 하고 강남 연합과의 오해도 풀 수 있는 계기였다.
“언제쯤 사과하면 될까?”
“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가야지.”
“지금? 내, 내일쯤 하면 안 될까?”
마음의 결심과 실행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부담스런 생각이 드는지 동빈의 발걸음은 점점 늦어졌다.
“무슨 소리야, 좋은 일은 서둘러야지. 빨리 가자!”
“석진아, 자, 잠깐만… 미, 밀지 마!”
“엄청 빠르다고 소문난 놈이 왜 이리 뜸 들여?”
“내, 내 발로 간다니까? 정말이야!”
“됐어. 내가 그냥 밀어줄게!”
석진은 계속 동빈의 등을 밀면서 교실로 향했다. 그동안 석진도 친구들의 냉전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은 모양이었다. 체격이 큰 동빈이 거의 끌려가는 수준이었다.
점심시간 끝 무렵의 교실.
주철의 자리에는 동빈보다 먼저 온 방문객이 있었다.
“부반장이 무슨 일이야?”
주철은 뚱한 표정으로 유나를 쳐다보았다. 부반장과는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주철아, 너 춤 잘 춘다며?”
“그건 왜 묻는 거야?”
뜬금없이 춤이라니? 주철은 반응이 계속 뚱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요번 수련회 때 장기 자랑 좀 나가라. 다른 반은 쟁쟁한 애들이 많은데 우리 반만 없잖아. 응?”
“관심 없다. 그런 건 동빈이 시켜.”
“동빈이? 체육대회도 아닌데?”
올봄에 있었던 체육대회! 전설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당시 동빈은 제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달리기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목을 휩쓸었다. 군인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동빈을 막을 자가 없었던 것이다. 축구 경기에선 동빈을 막았던 학생들이 병원 신세까지 졌을 정도였다.
“잘 생각해봐. 운동 말고도 동빈이가 잘하는 거 있잖아?”
“피아노 말하는 거야? 그건 좀…….”
유나는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동빈의 피아노 실력을 알고 있지만 신 나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주철이가 나서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계속 보냈는데…….
“피아노 말고… 그냥 싸움시켜. 오십 대 일 정도가 괜찮겠네.”
“뭐라고?”
“장기 자랑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대결이 될걸. 잘하면 기자들도 올지 모르지. 오십 대 일의 신화 창조 하면서 말이야.”
장기 자랑에서 싸움을 하라니? 더 이상 부탁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유나도 포기하고 조용히 돌아서려 했는데, 갑자기 동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철아. 아직도 삐쳤냐?”
“삐치기는…….”
삐친 게 확실하다. 동빈이 실실 웃으면서 다가서자 주철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러지 말고 화 풀어라. 내가 미안했다.”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미안하다.”
동빈은 무조건 사과를 했다. 석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는 장면이었다. 동빈이 저자세로 나오자 주철의 반응도 달라졌다.
“좋아. 미안하면 말이다, 잠시만 따라와라.”
“무슨 일인데?”
주철이 몸을 일으키자 동빈은 당황했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표정을 보니 그렇게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여기서 물어볼 말이 아니거든.”
“아, 알았어.”
동빈은 조용히 주철의 뒤를 따랐다.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질문이 분명했다. 화해만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주춤.
조심스럽게 주철을 따르던 동빈이 멈칫했다. 조금은 껄끄러운 장소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주, 주철아. 거기는 말이야…….”
학교 옥상은 화장실과 더불어 가장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동빈은 왜 그곳까지 올라가느냐는 물음이었지만 주철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냥 따라와.”
성큼성큼.
주철은 껄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동빈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주, 주철아…….”
“시끄럽다고 했지.”
동빈이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주철은 마침내 옥상 철문까지 다다랐다. 그러고는 힘차게 문을 잡고 열려고 했는데…….
덜컹덜컹.
낭패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에이… 씨! 누가 옥상 문 잠갔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주철은 얼굴까지 붉혀가며 옥상 문과 씨름을 벌였다.
“주철아, 특별한 경우 아니면 옥상은 닫아놓거든.”
동빈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주철이 옥상 계단으로 올라갈 때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미치겠네… 언제부터 바뀐 거야?”
“꽤 됐지. 얘들이 옥상에서 말썽 피운다고… 열쇠 갖다 줄까? 학생부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
주철은 할 말을 잃었다. 한마디로 스타일 구겼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이렇게 무안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주철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여기서 하지?”
동빈은 씩씩거리는 주철을 달랬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대충 마무리 짓자는 소리였다.
“아! 진짜… 요즘은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네!”
풀썩.
주철은 옥상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장소로 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동빈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대화의 분위기는 조성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김동빈, 이번 사건… 분명 네가 저지른 게 아니지?”
“그럼!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내가 너한테까지 거짓말하겠냐?”
안정을 찾은 주철이 먼저 입을 열었고 동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확신에 차있는 음성. 실제로도 동빈은 강남 연합과는 싸우지 않았다.
“네가 아니라면 어떤 놈인지 말해. 넌 분명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어. 저번처럼 무조건 모른다는 발뺌하지 마.”
“무, 무슨 소리야. 그때는 나도 진짜 몰랐어.”
“몰랐어? 그러면 지금은 안다는 소리네?”
“대, 대충은…….”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말해. 강남 연합을 박살 낸 놈이 누군데?”
“미안하다. 진짜로 말해줄 수 없다.”
동빈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주철의 대책 없는 성격 때문에 더욱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는 특수 훈련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아무리 주철이 잘나간다 해도 이기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유가 뭐냐? 왜 말할 수 없는 거냐고!”
“그놈에게 복수할 생각이잖아?”
“당연하지. 내 친구들이 당했는데 어떻게 참고 있어?”
“그러니까 문제야…….”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동빈의 심정 또한 답답했다. 웬만해야 가르쳐줄 것 아닌가? 그놈은 학생들에게 섬광탄까지 쏠 정도로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함부로 건드릴 놈이 아니라는 뜻이냐?”
“미안하다. 그렇다고밖에 말 못 하겠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이었다. 동빈은 주철이 펄펄 뛸지 알았건만 의외로 그는 담담한 반응이었다.
“동빈이, 너도 함부로 하기 힘든 놈이냐?”
끄덕끄덕.
동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싸우지 말라는 명령 때문이지만 껄끄러운 상대임은 분명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나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으마.”
“어, 어디 가!”
주철이 일어나자 동빈은 서둘러 막아섰다.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오해가 풀렸으니 수업 들어가야지?”
“어라? 너 삐친 거 아니야?”
“삐치긴 누가 삐쳤다 그래?”
주철의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동빈이 보기에도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 저번에 삐친 것도 한꺼번에 풀린 거야?”
“야, 자꾸만 삐쳤다고 할래! 나 그렇게 속 좁은 놈 아니거든.”
“고맙다. 친구야!”
동빈은 와락 주철을 끌어안았다.
“징그럽게 이놈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을 그동안 왜 그리 시간을 끌었나 싶었다. 오해를 푸는 데는 역시 정직이 최선의 방법임을 실감했다.
“참! 그런데 왜 그리 쉽게 포기했냐? 복수하는 거 말이야.”
“뭐가?”
동빈은 새로운 의문점을 발견했다. 주철의 성격상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혹시, 나 몰래 정보 캐내서 그놈과 싸우려는 거 아니야?”
“내가 미쳤냐? 너도 곤란하다는 괴물하고 싸우게? 내가 기분 상했던 것은 네가 자꾸만 숨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음… 그래서 삐친 거였구나.”
“야, 삐친 거 아니었거든!”
동빈과 주철은 티격태격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까 좀 불안했다. 왜 옥상까지 왔냐?”
“그놈이 누군지 안 가르쳐주면 뛰어내리려 했다.”
“많이 다칠 텐데? 옥상은 나도 힘든 높인데…….”
“내가 미쳤다고 진짜 뛰어내리겠냐? 겁만 주려고 한 거지. 그놈도 너랑 비슷한 놈이라면 절대 건들고 싶지 않다.”
복수를 포기한 건 백번 잘한 일이었다. 동빈도 꺼리는 상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