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연합은 사물을 제대로 살펴볼 처지가 아니었다.
암순응暗順應.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보이기 시작하는 현상에 걸린 것이다.
“젠장! 뭐가 보여야 말이지!”
“침착해. 시간이 지나면 상대를 볼 수 있어. 확실한 상대가 아니면 주먹을 쓰지 마!”
“너 미쳤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문제는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갈 때, 눈부심이 없어지는 시간은 l, 2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암순응의 적응 시간은 대략 7분 이후였다.
“우리가 당황하면 김동빈만 유리해진다. 놈에게 당한 것보다 우리끼리 주먹 쓴 게 더 많다고!”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어!”
40명이 넘는 인원과 단 한 명의 싸움. 어둠이 변수였다. 쓰러지는 숫자가 늘어갈수록 강남 연합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같은 편끼리 싸우다가 쓰러트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켁! 도, 도와줘…….”
“저 새끼가… 감히!”
서창환이 흥분했다. 귀에 익은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 자신의 친구를 때리는 흐릿한 영상을 본 것이다.
“김동빈! 내가 잡는다!”
퍼억.
서창환은 그대로 몸을 던지며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주먹의 감이 좋았다.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는 상대를 느낄 수 있었다.
“잡았다. 너 이 새끼…….”
“크윽… 차, 창환아. 나, 나야…….”
“……!”
서창환의 얼굴은 가관이 아니게 변했다. 같은 편을 때리고 말았다.
“미친 새끼… 왜 같은 편을 치는 거야!”
미안함보다는 순간적인 분노가 치솟았다. 서창환은 주먹은 피떡이 된 친구의 안면을 또다시 강타했다.
퍼억.
“꾸엑!”
“씨발 새끼들! 함부로 움직이지 말란 말이다!”
서창환의 외침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같은 편끼리 싸우는 상황은 계속되었고 강남 연합의 피해는 점점 늘어갔다.
“미치겠다. 소리밖에 들을 수 없으니…….”
“비명만 들어도 소름 끼친다.”
구경꾼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처절한 비명만 듣고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궁금해죽겠네. 조금 더 가까이 가볼까?”
“미쳤어? 저기 들어가면 진짜 죽는 거야!”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없는데 구경꾼이라고 무사할 것인가? 비명이 난무하는 장소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김동빈, 이놈… 꽤나 머리를 썼는데?”
“아직은 모르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강남 연합의 눈도 회복되니 말이야.”
“그때까지 얼마나 많이 쓰러트리는지가 관건이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김동빈의 입장에서는 승부수나 다름없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보다는 사물을 잘 볼 수 있었다. 구경꾼들의 시야가 회복된다면 강남 연합도 마찬가지라는 증거였다.
“그만 싸우고 멀쩡한 놈들은 다 이쪽으로 모여!”
“씨발놈들아! 이쪽으로 모이란 말이야!”
사대천왕이 앞장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강남 연합의 혼란도 진정 국면을 맞이했다.
“시불… 네놈이 나를 친 거야?”
“미, 미안…….”
서로 뒤엉켜 싸우던 학생들이 침착함을 되찾았다. 같은 편의 멱살을 잡고 있다가 흠칫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것들아! 잔말 말고 모여!”
우르르.
사대천왕을 기준으로 멀쩡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40명이 넘는 인원이었지만 모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젠장!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빨리 모이란 말이야!”
“그만 해라. 모일 놈들은 전부 모인 거 같다.”
“돌겠네. 그 짧은 시간에 많이도 당했다.”
모이지 않는 학생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놈들은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김동빈 새끼는 어디 있는 거야?”
“박쥐 같은 놈… 또 숨은 거야?”
치고 빠지는 작전인가? 동빈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강남 연합뿐이었다.
“침착해라. 둥그렇게 모여서 주위를 잘 살펴봐.”
“젠장할! 오늘은 달빛도 시원치 않으니…….”
서창환의 푸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어둡다. 최대한 집중하지 않으면 동빈의 인기척을 탐지할 수 없었다.
부슥.
“저, 저기! 저쪽에 뭔가 있다.”
“어, 어디? 어디서 소리가 들렸는데?”
“조용히 해. 자기 자리에서 이탈하지 마.”
학생들이 웅성거리자 사대천왕이 나섰다. 침착함을 유지해야 동빈을 상대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김동빈, 까불지 말고 나와라. 정정당당히 붙어보자.”
쌈짱 이동진이 나섰다. 일대일의 무패라는 소문답게 당당한 모습이었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알고 있다. 빨리 나오는 게 서로 좋지 않을까!”
“…….”
이동진이 다가가며 목소리를 키웠지만 의심 가는 장소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머지 강남 연합은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태를 주시했다.
“이거… 실망인데? 내가 직접 가야……!”
툭.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던 이동진은 주춤했다. 수풀 속에서 뭔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김동빈, 나랑 장난하냐?”
이동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물건은 아니었다. 돌멩이를 잘못 던진 것인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게 뭐야?”
“글쎄…….”
“조용히 해. 김동빈이 언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둥그스름한 물건은 강남 연합이 모여있는 근처에 멈췄다. 몇몇이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쿠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강렬한 빛이 순간적으로 쏟아졌다. 소리도 소리지만 강한 불빛이 충격적이었다. 주위가 한꺼번에 환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끄아악! 눈이 안 보여!
“씨발… 이, 이건 뭐야! 난 귀까지 먹먹해!”
눈이나 귀를 막고 쓰러지는 놈들이 속출했다. 충격을 받고 완전히 얼어붙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하지 않은 학생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지 심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멀리 떨어진 구경꾼들조차 밝은 빛 때문에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세상에… 저, 저게 뭐냐!”
“김동빈, 저놈이 대체 뭘 던진 거야?”
강한 소음과 빛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은 달랐다. 무엇이 터졌는지는 짐작조차 못했다.
‘섬광탄! 젠장… 사태가 너무 커져버렸다.’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동빈은 무엇이 터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특수 임무에서 사용하는 섬광탄 종류가 확실했다.
‘어떤 미친놈이 민간인에게…….’
민간인에게 군대 무기를 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섬광탄이 강한 소음과 빛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맞는다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무기였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너는 대체 누구냐!’
동빈의 시선은 밝은 빛이 사라진 공간에 집중되었다. 강남 연합은 이제 명순응明順應에 시달려야 했다.
“누, 눈을 뜰 수가 없어…….”
“정신 차려! 김동빈이 나타났단 말이야.”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갑자기 나왔을 때 눈부심이 사라지는 시간. 섬광탄의 경우 3분간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무서운 적이 눈앞에 있다면 사태가 달라졌다.
빠각.
“크억…….”
좀 전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조심해. 같은 편끼리 싸우지 마!”
“안 돼. 그, 그냥 싸워! 김동빈 새끼가 바로 눈앞에 있잖아!”
처음에는 같은 편끼리 싸웠던 피해가 컸지만 이번은 달랐다. 김동빈의 손속이 잔인해진 것이다.
퍼퍼퍽.
“돌아가시겠네! 멍청한 새끼들아! 그냥 당하지 말고 싸워!”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강남 연합을 철저히 무너트렸다.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는 약점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도, 동진아. 그냥 다 쓸어버려! 다 쓰러뜨리면 김동빈 새끼도 걸리겠지!”
“젠장! 내 앞을 막지 마! 다 쓰러뜨려버린다!”
퍼억.
“크악… 나, 나야…….”
“이 새끼! 거치적거리지 말란 말이다!”
사대천왕이 힘을 쓰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강남 연합 모두가 쓰러져도 좋았다. 김동빈만 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행동이었다.
“김동빈!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악이 받친 사대천왕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암흑 속의 혈투.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치열하고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강남 연합은 힘겹게 대항했지만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비규환 같은 분위기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느낌이었다. 요란하게 울리던 비명이 잠잠해졌다. 거친 숨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헉헉… 창환아… 무, 무사하냐?”
“그래… 난 괜찮아. 동진이는 괜찮으냐?”
강남 연합 대부분이 쓰러졌다. 그렇기에 비명까지 그친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지경이었다.
“나… 여기 있다. 대, 대철이는…….”
“헉헉… 거, 걱정 마라. 나도 살아있다.”
운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실력이 좋은 것인가. 사대천왕만 멀쩡한 상황이었다.
“기분 나쁘게 우리만 남은 건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지만 껄끄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상대가 고의적으로 이런 상황을 연출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젠장! 귀신한테 홀린 거 아니야.”
사납게 몰아쳤던 동빈의 모습은 사라졌다.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도 상대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지, 진짜… 괴물 같은 놈이야.”
“끝까지 싸워야지. 흩어지지 말고 모여.”
터벅터벅.
사대천황은 지친 몸을 이끌며 중앙으로 다가섰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동빈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사방으로 등을 마주 댄 상태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강남 연합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지.”
“쪽팔리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우리는 이길 수 있어.”
그들은 숨을 고르며 다시 싸울 준비에 들어섰다. 강남 연합의 체면은 버린 지 오래였다.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 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김동빈! 숨어있지 말고 나와!”
서창환이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이런 비참한 결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김동빈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김동빈! 이 새끼. 완전히 갈아 마셔주겠다! 당장 나와!”
아무도 서창환을 말리지 않았다. 힘을 비축해두라는 충고가 필요할 상황이 아니었다. 각자의 나름대로 어떻게 동빈을 상대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때였다.
“김동빈, 나와……!”
서창원의 목소리가 짧게 끊겼다. 그러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 창환아. 왜 그래……!”
“무, 무슨 일인데?”
허전함을 느낀 사대천왕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후방을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서창환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긴 했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크윽… 사, 살려줘…….”
버둥버둥.
서창환이 개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이상한 줄에 목을 잡혔는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몸을 움직여 탈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움을 바라는 손짓만 거듭하며 잡초 숲 속으로 끌려갔다.
“차, 창환아!”
파파팟.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쌈짱 이동진이 정신을 차리고 나섰다. 위험에 처한 친구의 애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서창환이 사라진 잡초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이 개새끼… 김동빈! 어디 있냐!”
이동진은 잡초 속을 헤집고 다니며 동빈을 찾았다. 어둠 때문에 주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개처럼 끌러갔던 서창원의 기척도 없기에 더욱 애가 탔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부웅.
“……!”
잡초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이동진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냥 넋 놓고 당하는 상황. 상대가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장면까지는 확인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퍼억.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동진을 삼킨 잡초 숲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런 씨발…….”
“가, 가지 마! 우리를 유인하는 수작이야!”
최대철이 나서려 하자 정성태가 급히 만류했다. 쌈짱 이동진이 당했다. 둘이 몰려있어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자는 거야? 분하지도 않아!”
“어, 어쩔 수 없잖아. 흩어지면 끝장이라고.”
“젠장…….”
진짜 방법이 없었다. 현 상황만 유지하는 것도 벅찼다. 최대철도 불리함을 인식했는지 입술까지 깨물며 분을 삼켰는데…….
퍽퍽퍽.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을 패는 소리가 확실하다.
“크악… 이 개새끼……!”
“……!”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음성이 익숙하다. 개처럼 끌려갔던 서창환이었다. 악이 받쳐 반항하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퍼억퍼억.
“커억… 주, 죽여 씹새야……!”
때리는 강도가 거세졌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음성이었다.
푸악푸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