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224)

“선전포고?”

“……!”

동빈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놈이 잘하는 짓 있잖아.”

“그놈은 싸움 잘하잖아. 뭐가 또 있어?

“답답하네. 싸움 말고 인터넷에 동영상 띄워놓고 하는 짓 말이야. 조금 전에 강북의 박준혁 잡는 영상이 올랐는데, 그 밑에 강남 정벌하러 간다고 써있었단 말이야.”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지금 한강 공원으로 갈 테니까, 죽고 싶은 강남 일진들은 모두 오라고 경고했어.”

동빈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그놈이 또 수작을 부린 것이다. 강남 일진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근데, 한강 공원이 한두 개야? 대체 어디로 오라는 거야?”

“너 모르냐? 진짜 한강 공원이 아니라. 강남 연합의 아지트를 말하는 거야. 여기서도 가까워.”

“김동빈 그놈 대단하네. 강남 일진들의 정보까지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고교를 평정한다고 큰소리쳤겠지.”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날 유인하려는 속셈인가?’

동빈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간다면 그놈의 수에 놀아나는 것이다.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놈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는 문제점도 있었다.

“어쩔 거야? 난 먼저 갈 테니 너희는 맘대로 해.”

“기다려, 같이 가.”

우르르.

소식을 전했던 놈이 나서자 학생들이 모두 따라붙었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좋다. 네놈이 도전을 했다면 받아주지.’

부슥.

고민에 잠겼던 동빈도 몸을 일으켰다. 우선은 원생들을 따라가서 상황을 관찰해보기로 결정했다.

“야, 너도 가려고?”

“응…….”

‘맞아요’를 연발했던 학생이 동빈을 가로막았다. 동빈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범님이 너 건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괜히 다치면 우리도 책임 못 진다.”

“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대신 함부로 나서지 마. 김동빈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데.”

“알았어. 조용히 따라만 갈게.”

동빈의 연기도 제법 늘었다. 지금도 깊게 눌러쓴 모자를 한 번 더 눌러쓰고는 조용히 학생들을 따랐다.

강남 연합의 아지트는 공원으로 불리기 힘들었다. 한강 근처에 있는 공터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후미진 공간이 전부였다.

“진짜 으스스하네.”

“그러게…….”

맞아요와 동빈은 함께 걸었다. 도장 친구들 덕분에 강남 일진들의 아지트로 들어설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얼씬도 못 할 위험한 장소였다.

“쯧쯧쯧… 이런 곳에 모여서 뭘 할지 뻔하다 뻔해.”

맞아요는 혀끝을 차며 길을 걸었다. 물론, 바로 옆에 있는 동빈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왜 그래? 애들이 모여서 무슨 짓을 하는데?”

“남의 이목을 피해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가스나 본드 불고, 아니면 애들 패기나 하고… 소문에는 여자들까지 어찌한다고 하더라.”

“그래?”

동빈은 호기심이 강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담배나 술까지는 몰라도 나머지 부분은 범죄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괜히 부러워하지 마. 저런 놈들은 멋있는 게 아니라 인생을 포기한 놈들이야.”

“너는 생긴 것만큼이나 생각도 건전하구나.”

동빈은 맞아요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냈다. 일진이라는 놈들의 행동을 부러워하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학교생활 잘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반응부터 폼 나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는 항변도 있었다.

“나도 한때 저런 놈들이 부러웠는데 이제는 아니야. 일진이니 뭐니 철없던 중학생 때나 영웅 대접을 받는 거지 고등학교 올라가면 접는 경우가 많지. 고딩까지 돼서 저 지랄 하는 것은 정신 못 차렸다고 봐야지.”

끄덕끄덕.

동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진을 부러워하는 학생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저 애들이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놈들이야. 우린 이쯤에서 구경하는 게 좋겠다.”

낡은 가로등 밑에서 모여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불빛이 있는 장소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과 사복을 걸친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씨발! 엄청 많이도 구경 왔다.”

“그러게… 오라는 미친 새끼는 안 오고 말이야.”

경남 연합은 동빈을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꾼만 늘어갔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선전포고를 했던 동빈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타나긴 했지만 구경꾼 무리에 섞여있는 것이다.

“봐봐. 말발 센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놈들이야. 옛날에는 모르지만 지금 들으면 솔직히 짜증나지?”

끄덕끄덕.

동빈은 여전히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변을 탐지하고 있는 행동이었다. 모여있는 강남 연합의 숫자와 정체불명의 인물이 누군지 살펴보았다.

“김동빈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강남의 사대천왕이 모두 모였으니…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말이야.”

“사대천왕?”

고개만 끄덕이던 동빈이 반문을 했다. 사대천왕? 강남 연합의 중추 세력을 언급하는 모양이었다.

“저기 보이는 놈이 쌈짱 이동진. 일대일로 맞짱 떠서 진 적이 없다는 소문이야. 타고난 싸움꾼이라는데 아주 무서운 놈이지.”

가로등 밑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놈을 볼 수 있었다. 균형 잡힌 체격이었고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저놈은 귀공자 정성태. 쌈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 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겨서 여자들이 무척 따르지.”

“공부 잘하는 놈도 일진이야?”

동빈은 상대를 관찰하면서 궁금한 점만 언급했다. 그러면 맞아요는 열과 성의를 다해서 보충 설명을 거들었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이지. 일진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라고 설치고 다니는 놈이야. 일진들이 싸움만 하고 다닌다는 부정적인 시각에 면피를 제공해주는 놈이지.”

“…….”

귀공자 정성태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다른 놈들과 계속 잡담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가로등에서 떨어져 있는 놈이 서창환. 한때는 유명한 운동선수였는데 부상을 당하서 저 꼴이 되었대. 성격이 지랄 맞지. 운동 못하는 분풀이를 다른 학생들에게 하고 있다는 소문이야.”

가로등과 떨어져 있기에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으로 보아,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맞아요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가로등을 등지고 서있는 놈이 최대철. 한번 빡 돌면 물불 안 가리는 놈이야. 사고도 많이 쳤는데 학교 이사장인 아버지 빽으로 버티고 있지.”

“요즘 같은 민주화 사회에서 말이야, 아직도 그런 게 있어? 잘못해도 그냥 넘어가는 거 말이야. 소설이나 영화에만 나오는지 알았는데?”

“진짜야. 내가 저놈하고 같은 중학교 나왔잖아. 학교에서 막지 못하니까 저놈이 더 활개 치고 다니는 거야.”

“사대천왕… 정말 환상적인 조합이네.”

설명을 다 들은 동빈의 한마디였다. 학생들 사이에 계급사회가 형성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고교를 평정한다고 장담했던 김동빈에 대해서 알려주지!”

“김동빈… 그건 됐는데…….”

“왜?”

맞아요는 뚱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뜻이었지만 동빈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놈에 대해서는 나도 대충 알거든.”

“그래? 하긴, 인터넷에서 유명한 놈이니까. 그러나 이거 하나는 명심해라. 너도 체격이 좋아서 이상한 놈들이 유혹을 할지 모른단 말이야. 일진은 폭력을 합리화시켜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놈들이야. 절대 그런 놈들하고 어울리지 마. 사회 범죄의 대부분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벌인데.”

“넌 참 아는 게 많구나.”

“그럼! 아니까 안 속는 거지. 이젠 일진 하라고 애원해도 절대 안 한다. 사실, 사범님께 들키면 난리 나거든.”

‘갈수록 복잡해지네. 원생 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사범의 가르침은 확실했다. 폭력의 수단으로 무예를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운 놈의 정체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날이 더욱 어두워졌다. 달빛도 없기에 주변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낡은 가로등만이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다. 사대천왕이 앞에 나섰고 나머지 놈들은 뒤에서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시불. 우리가 속은 거 아니야?”

결국 김동빈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운동선수였다는 서창환이 불만을 터트리자 귀공자 정성태가 제지하고 나섰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 이놈 겁먹고 튄 게 분명해.”

“이 정도로 겁먹을 놈이 아니다. 어딘가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

정성태가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게 확실했지만 동빈은 괜히 뜨끔했다.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빈보다 더욱 과민하게 반응하는 놈도 있었다.

“씨발! 기분 나쁘게 숨어있다는 말이지.”

정성태의 말에 서창환이 발끈했다. 누군가 자신을 몰래 보고 있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김동빈, 어디에 숨어있냐! 당장 나와라!”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곳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겁먹은 거냐? 한꺼번에 덤비지 않고 맞짱 받아줄 거니까, 빨리 나와라! 미친 새끼야!”

가로등에 몰려있는 인원은 대략 40명 정도였다. 서창환은 동빈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인지 계속 목청을 높였다.

“김동빈! 정말 사람 돌게 만들 거야! 네놈이 먼저 선전포고 했잖아. 어서 나와!”

‘제발 참아라. 나도 돌아버리겠다.’

동빈은 마음속으로 서창환을 위로했다. 아무리 도발을 해도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동빈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정체 모를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개 같은 새끼! 네놈이 강남 연합을 협박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네놈 말마따나 안 나오면 우리가 쳐들어간다. 내일 아침 당장 쳐들어갈 거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젠장 또 꼬였네…….’

동빈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내일은 아침 운동이 과할 것 같다. 저 인원을 상대하려면 지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동빈! 마지막 충고다. 남자답게 나와서 결판을 내자!”

“그만 해라. 소리친다고 나올 놈이 아닌 거 같다.”

정성태는 서창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나머지 사대천왕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놈 안 올 모양이다. 우리도 돌아가는 게 좋겠다.”

“씨발! 별 거지 같은 새끼 때문에…….”

결국 사대천왕은 동빈이 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내일 인터넷에 무슨 내용이 뜰지 기대가 크다.”

“김동빈이 쫄았다고 난리도 아니겠지?”

자신들의 입지가 올라갈 것이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증인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기분도 그런데 어디서 술 한잔 할까?”

“안주는 필요 없겠다. 김동빈 새끼 씹으면 되니까.”

사대천왕과 그들의 패거리들은 가로등 밑에 모였다. 떠날 준비를 하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파장 분위기로 들어서자 구경꾼들도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이게 뭐야… 김동빈이 구라 깐 거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학원까지 땡땡이치며 왔는데 말이야.”

“미친다. 나는 삼촌한테 매달려서 캠코더까지 가져왔는데.”

구경꾼들은 불만을 터트리며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모두가 동빈을 원망하는 모습이었지만 맞아요는 달랐다.

“뜻밖이네… 김동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렇게 도망칠 놈이 아닌데 말이야.”

‘정말 고맙다…….’

동빈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자신의 말 못 할 신세에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저번에 우리 도장 애들이 모여서 동영상을 분석했거든. 몸놀림이나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래? 혹시 사범님도 보셨어?”

“아니, 사부님은 싸우는 동영상 싫어해. 우리끼리 몰래 모여서 봤는데… 소름이 끼치도록 잘 싸우더라고. 오늘은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맞아요도 조금 실망한 모양이었다. 어두워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가자. 너무 늦었다.”

“그래.”

맞아요가 몸을 돌리자 동빈도 따라붙었다. 욕을 듣기는 했지만 나서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체 모를 놈을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따라와.”

“…….”

“넌 집이 강남이 아니라며. 버스 끊겼는지 모르겠다. 야, 뭐 해?”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자 맞아요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웠지만 동빈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당한 체격으로 버티고 있는 동빈을 볼 수 있었다.

“안 갈 거야? 사범님이 너 잘 간수하라고 했단 말이야.”

“그놈이 온 것 같은데…….”

“그놈?”

맞아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 이런 분위기에서 그놈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김동빈이 나타났다는 거야!”

“뭐라고 김동빈!”

우르르.

맞아요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자리를 떠났던 구경꾼들이 다시 몰려들면서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럼 그렇지. 천하의 김동빈이 도망칠 리 없지.”

“비켜봐. 여기 내 자리였어!”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혼란은 구경꾼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파장이 강남 연합까지 옮겨갔다.

“무, 무슨 일이야?”

“김동빈이 나타났다는 것 같은데?”

“……!”

떠날 채비를 했던 강남 연합이 멈칫했다. 동빈이 진짜 나타났다고 하니 상당히 긴장하는 모습이다. 시시덕거리며 웃던 행동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순간적으로 흐르는 침묵. 그리고…….

챙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낡은 가로등이 박살났다. 유일한 불빛이 사라진 것이다. 주위가 어둠에 휩싸이면서 강남 연합은 크게 당황했다.

“모, 모여! 흩어지지 마!”

“비겁한 김동빈 새끼…….”

퍼억.

“크악!”

“왜 그래!”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한 놈이 쓰러졌다. 처절한 비명은 강남 연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끝까지 모습을 숨기겠다 이거지…….’

동빈은 어둠으로 변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침투. 동빈도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 강남 연합과 동빈의 대결로 착각하는 싸움. 동빈이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갔다.

“씨발! 누가 누군지 알아야지!”

“조심해! 아무나 패지 말란 말이다!”

속절없이 쓰러지는 강남 연합의 숫자는 늘어났다. 상대를 찾을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한 상항이었다.

우두득.

“크악… 파, 팔이 부러졌어!”

“존나! 내 다리 잡은 게 누구야!”

우둑.

“으악! 내, 내 다리…….”

정체 모를 침입자는 양의 무리에 뛰어든 늑대였다. 잔인하지만 확실하게 상대를 제압했다. 강남 연합은 너무나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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