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224)

커튼 뒤에 설치된 라커룸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학생들은 서로 먼저 옷을 갈아입으려 난리도 아니었다.

“뭐야? 오늘은 왜 이리 안 온 놈들이 많아!”

도복으로 갈아입은 원생들이 차례차례 등장하자 사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보다 숫자가 많이 모자랐다. 늦게 온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결석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중죄에 속했다.

“급한 일이 좀 있어서요.”

“학생들이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또 쌈박질 하는 거 아니야?”

“…….”

사범의 물음에 원생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도복을 갈아입는 학생들은 흠칫하는 모양까지 보여 더욱 의심을 샀다.

“내가 분명 충고했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과 싸움짓거리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이야. 고등학생이나 됐으면서, 그 차이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저희들은 함부로 안 싸웁니다.”

“맞아요. 사범님이 가르쳐주신 거 믿고 설치다가 제가 얼마나 맞았는데요.”

“너는 말이다. 하는 말다마 맞아요, 맞아요, 하니까. 진짜 맞는 거야. 하여튼, 쓸데없이 싸움하는 놈들은 내가 아작을 낸다. 뭐 해? 옷 다 갈아입었으면 뛰어.”

우르르.

사범의 명령이 떨어지자 원생들은 도장을 뛰기 시작했다.

“그냥 뛰지만 말고 상체도 함께 움직여. 그래야 책상에 앉아서 굳었던 몸이 풀릴 것 아니야.”

사범의 가르침에 따라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자에 맞는 몸 풀기 동작을 하면서 도장을 크게 돌았다.

“벌써부터 헉헉거리는 놈들은 뭐야? 너희들은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컴퓨터 게임은 며칠 밤낮을 새우고도 멀쩡한 놈들이 말이야. 힘들다고 대충하지 말고 제대로 뛰어.”

사범은 중앙에 위치했다. 학생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동작이 흩어지지 않게 충고했다.

“공부도 체력이란 말이다. 악과 깡으로 책상에 앉아있다고 공부가 되는 게 아니야. 몸이 건강해야 집중력도 생기는 거야.”

“사범님, 오늘따라 많이 이상해요. 신입 원생이라도 왔어요?”

“맞아요.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면 이상하잖아요.”

진중했던 분위기가 서서히 무너졌다. 사범의 태도가 평상시와 다름을 눈치 챈 것이다.

“이것들이 또 사범을 모독하는 것이냐! 신입 원생에 대한 욕심은 절대 없다.”

“그럼… 예쁜 여자가 구경하고 있나요?”

“맞아요. 아까 사무실을 보니까…….”

“운동하기 싫으니까 엄살이나 부리고 말이야. 잔말 말고 뛰어!”

“넵!”

잠시 무너지려 했던 분위기는 금방 수습되었다. 사범의 호통 소리와 함께 학생들의 움직임도 기민해졌다.

‘휴∼ 요즘 애들은 눈치가 너무 빨라…….’

사범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입 회원과 예쁜 여자. 오늘은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물론, 사무실에 있는 동빈과 윤지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자 누나.”

“왜?”

동빈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밖에서 들으면 안 될 내용임을 짐작했는지, 윤지나는 얼굴을 바싹 붙이며 대답했다.

“부탁이 있는데요.”

“말만 해. 뭔데?”

“차에 있는 모자 좀 빌려주세요.”

“…….”

모자를 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괜히 비밀스레 물어보는 동빈의 태도가 의아했던 것이다.

“저기… 어려운가요?”

“아니, 너무 쉬운 부탁이라…….”

“사실은 더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사범님하고 대화를 좀 나눠주십시오.”

“원생들을 살펴보려고?”

“네.”

사범이 아니라면 원생 중의 하나라는 뜻이었다. 동빈은 원생들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학생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기에 모자는 위장용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은 어느 정도나?”

“최대한 오래요.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물론이지. 상당히 재미있겠는데?”

동빈은 얼굴까지 붉혀가며 어렵사리 부탁했지만 윤지나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동빈의 무거운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한편, 사무실 밖의 사범은 도장 중앙으로 학생들을 모았다. 몸 풀기 과정을 끝냈으니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야 했다.

“난 잠시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테니, 각자 부족한 부분을 연습하도록 한다.”

“네, 알겠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하는 부분은 끝마쳤다. 단단히 충고했으니 자율 훈련을 실시해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안 본다고 대충하지 말고.”

“넵!”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를 듣고서야 사범은 발걸음을 돌렸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끼이익.

사범은 염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기 사무실이 아니라 남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모양새였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통 말을 안 들어서…….”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까 했던 이야기를 계속해주세요.”

“어떤 말을…….”

“정말 태권도가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나요?”

“당연하지요!”

사범의 목소리는 대번에 커졌다. 윤지나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다이어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부슥.

동빈은 사범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범이 앉자 몸을 일으켰고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사범은 윤지나에게만 관심이 있는지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퍼퍼퍽.

사무실 밖으로 나서자 운동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발차기로 샌드백을 공격하는 학생이 동빈의 눈길을 끌었다.

‘괜찮은 실력이지만 그놈은 아닌 것 같은데.’

유연성과 파괴력을 동시에 갖춘 학생이었다. 괜찮은 실력처럼 보였지만 동빈의 기준으로 보면 아니었다.

‘저 애는 완전히 아니고…….’

동빈은 도장 밖으로 나가면서 학생들을 관찰했다. 열심히 낙법을 하는 학생은 미리 제쳐놓아야 마땅했다. 다른 학생들도 꾸준히 살펴보았지만 의심 가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범이 의심스러운데…….”

실력 차이나 너무 났다. 사범에 대한 동빈의 의심만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끼익.

동빈은 도장을 나서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를 눌렀고 계단 중간쯤에서 통화가 이루어졌다.

“여보세요. 교관님, 접니다.”

무슨 일이가? 용건만 간단히 하라우.

송 교관의 목소리가 수상하다. 동빈이라서 실망스럽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30세 초반 정도의 인물입니다. 이름은 공현철. 교관님이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내가 가르친 놈이 어디 한둘이야? 정 여사가 전화할지도 모르니까 날래 끊으라우.

역시나 송 교관의 관심은 피아노 학원 원장뿐이었다. 귀찮은 듯 전화를 끊으려 하자 동빈이 다급해졌다.

“자, 잠시만이요.”

어허! 잠시는 무슨 잠시만이가?

“교관님. 살극무를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됩니까?”

글쎄?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꼽지… 그건 왜 묻고 그러네?

“수상한 인물을 발견해서 그렇습니다. 혼자서 처리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보고는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설마, 너의 무술을 알아보는 놈이 있네?

“그렇습니다.”

송 교관은 아무런 대답도 안 했다. 진짜로 전화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라 판단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방금 말한 공현철인가 하는 놈이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 예측일 뿐입니다.”

동빈은 계속 통화를 하면서 윤지나의 차량으로 다가갔다. 미리 받은 차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빈이 원했던 모자는 차량 뒤편에 있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니야. 아무래도 장군님께 말해서 조사를 해야겠어.”

“네? 조사요?”

모자를 집으려 했던 동빈의 손길이 주춤했다. 조사라는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왜? 장군님께 말하면 안 되는 일이가?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로…….”

사소한 일 아니야. 살극무에 대해서 알려면 비밀 코드까지 조사해야 한단 말이디.”

“그, 그렇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우. 걱정이 돼서 충고하는데, 만약 살극무를 아는 놈과 만나면 절대 싸우지 말라우.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살극무와 관계된 이상 전화상으로는 말 못 해야. 장군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라우.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동빈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름표는 강남으로 오면서 뗀 상태였다. 상의 또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항상 피가 튀기에 여벌의 옷을 미리 준비했는데 의외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반드시 범인을 찾아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목을 속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차 안에서 나온 동빈은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 늦게 온 원생 중에 의심 가는 인물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동빈아, 시간 더 필요해?”

“어…….”

계단을 내려가려 했던 동빈이 멈칫했다. 사범과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하는 윤지나가 올라오는 것이다.

“뭐야? 시간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잖아.”

계단을 다 올라온 그녀가 재차 물었다. 사범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가? 그녀의 심정도 이해해야 했고 범인을 반드시 잡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네… 늦게 오는 원생들을 살펴보려면… 그러나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 안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말이야. 나는 사범님과 함께 잠시 나갔다 올게. 일 끝나면 전화 줘.”

“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장 문을 열고 나온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계단을 올라왔다.

“하하하! 정말 뜻밖입니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어머나, 지금 빼시는 거예요?”

“빼기는요. 남아 일언은 중천금.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지요.”

사범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빼는 게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문제라는 표현이었다.

“약속하셨어요. 사범님의 애버리지가 200점이니 30점 잡아주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승부는 냉정한 것이니 지는 사람이 밥 사는 겁니다.”

“좋아요.”

볼링 내기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범은 승패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도장까지 버려두고 그녀를 따르기로 결정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가 아는 스포츠 센터가 있는데 조금 걸어야 합니다.”

“제 차를 타고 가면 되겠네요.”

“그렇습니까? 정말 잘됐습니다.”

“동빈아, 차 키.”

“여, 여기요.”

윤지나가 손을 내밀자 동빈은 키를 전해주었다. 너무 부탁을 잘 들어주는 그녀가 고맙기도 했고, 속아 넘어가는 사범이 불쌍하기도 했다.

윤지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옆자리에 앉은 사범은 계속 실실거렸다.

부르릉.

“동빈아, 도장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냉장고에 사이다 있다. 다 마셔도 좋아!”

그녀의 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사범은 손까지 흔들어주는 아량을 보였지만 동빈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특공 무술의 달인이지?’

동빈은 사돈 남 말하는 듯한 내용을 중얼거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는 것인가? 살극무의 달인은 왕따로서 유명했던 전설이 있었다.

사범이 빠진 도장. 학생들은 딴청 피우지 않고 운동에만 열중했다. 사범이 없어도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특출한 인물은 없는데…….’

동빈은 한쪽 구석에 앉아서 학생들을 관찰했다. 사범이 미리 언질을 주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애도 아니고… 저 애도 아니고…….’

늦게 합류한 학생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고등부에 없다면 일반부에서 찾아야 했다.

윤지나가 전화를 했었다. 고등부가 끝나면 일반부가 모인다는 정보를 준 것이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사이다도 다 마셨는데…….’

그녀는 고등부가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다시 오기로 했다. 볼링에서 지는 사람이 밥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 고등부처럼 사범은 준비 과정을 끝내고 다시 나오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기자 누나한테 많이 미안하네.’

동빈은 윤지나가 고마웠다. 일부러 시간을 끌어 일반부까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든 것이다. 동빈은 더 이상 학생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그때였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을 하던 학생들도 무슨 일인가 하여 하던 일을 멈추었다.

덜컹.

“헉헉… 사, 사범님 계시냐?”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도장에 다니는 학생인 모양이었다. 지각한 것이 문제인가? 학생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헉헉… 잘됐다. 모, 모두 나가자.”

“어딜 가자는 거야? 사범님 돌아오시면 어쩌려고.”

“지금 사범님이 문제야? 김동빈이 강남에 떴대!”

“뭐라고! 김동빈!”

원생들은 경악했고 동빈은 흠칫하여 몸을 사렸다. 벌써 이곳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다.

‘낭패다. 얼굴을 들키면 곤란하데.’

요란을 떨던 강진고등학교 학생들이 떠올랐다. 이곳저곳 전화하더니 여기까지 파장이 미친 모양이었다.

“그놈 정말 미친놈 아니야? 왜 조용한 강남에 온 거야?”

“강북의 박준혁 잡고 내친김에 강남 정벌하러 왔대!”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원생들이 신 나게 떠들었다. 동빈은 변명을 하고 싶지만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헛소문일 수도 있잖아. 그놈이 그렇게 한가한 놈이냐?”

“맞아. 그놈은 먼저 건들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고 하던데?”

정말 다행이다. 제대로 퍼진 소문도 있었다. 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그놈 선전포고까지 하고 왔단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