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누구?
윤지나의 차량은 지상고가 높은 4륜 차량이었다. 여성이 타기에는 벅찰 정도로 육중해 보였다. 여러 가지 튜닝을 했는지 엔진 소리부터 달랐다. 운전 실력도 상당한 편이라 체육 선생의 차보다는 훨씬 안정감이 느껴졌다.
“저기… 선글라스가 참 멋있습니다.”
“동빈 학생은 칭찬이 어색하네. 그냥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내가 정말 어려울 때 도와줬잖아.”
오후 5시가 넘어도 햇볕은 따가웠다. 석진에게 들러 편지를 받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이 되어가자 지나는 차량도 점점 늘어났다.
“주소는 확인해봤습니까?”
“그럼, 나만 믿으라고. 그런데 혹시 말이야,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정말 없습니다. 저도 답답해죽을 지경입니다.”
한번 말문이 터지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우선적인 화제는 지금 찾아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부류인지도 전혀 모르겠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어느 정도에… 대략 어떤 목적으로 동영상을 올렸는지. 범위를 줄여서 생각해본 적은 있을 것 아니야.”
“글쎄요. 상당히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성격 같습니다. 또한 이상한 곳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면도 있고…….”
“그리고 또?”
“무술의 고수입니다.”
“무술 고수? 왜 그렇게 생각하지?”
확신에 찬 음성이었기에 그녀가 반문하는 것이다. 범위가 확 줄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제가 신경을 집중한 상태에서 기척을 숨겼습니다. 시야의 사각지대를 아는 놈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오른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난 모르겠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 조금 있으면 정체가 밝혀지겠지. 나도 누군지 궁금해지네.”
부르릉.
한강 다리를 넘은 차량은 좌측 코너로 들어섰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넘어야 했기에 속력을 높여야 했다. 경쾌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차량의 뒷모습은 빠르게 사라졌다.
윤지나의 차량이 도착한 지역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강남의 번화가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고 빌라와 단독주택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주택가를 조금 지나자 상가 건물이 하나 둘 나타났다.
부릉-.
천천히 운행하던 그녀의 차가 멈추었다. 원하던 장소를 찾았다는 뜻이었다.
“주소를 보니 저기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요.”
“정말 족집게다. 무술의 고수일 가능성이 높아졌잖아?”
동빈과 윤지나의 시선은 삼거리 부근에 고정되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2층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에는 도장 간판이 걸려있었다.
“정말 낡아 보인다. 진짜 엄청난 고수가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 보면 알겠죠.”
차에서 내린 동빈과 윤지나는 도장 입구에 멈춰 섰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최신 설비는 아니었지만 신비감을 자아내는 특색을 가졌다.
“준비됐어, 동빈아? 이상하게 나까지 떨리네…….”
“물론입니다. 제 뒤만 따라오세요.”
동빈이 먼저 계단을 내려갔고 윤지나가 뒤를 따랐다. 괜히 발길까지 조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끼이익.
“죄송합니다. 여기가…….”
동빈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약간 열린 상태라 노크를 생략했는데…….
“죄송하면 일찍 오란 말이다!”
후앙.
기습이다. 우렁찬 음성과 함께 발차기가 날아왔다. 동빈조차 당황할 정도로 매서운 공격이었다.
“……!”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뒤를 따르는 윤지나도 있기에 동빈은 팔목을 사용해 방어했다.
스팟.
정체 모를 상대의 공격은 동빈의 팔을 스치며 지나갔다. 충격은 별로 없었다. 악의가 없던 것인가? 결정적인 순간 상대는 방향을 틀어버렸다.
“어, 얼레? 넌 누구야?”
“…….”
완전히 적반하장 아닌가? 30대 초반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먼저 기습을 해놓고 물어보다니? 동빈은 방어 자세를 풀지 않고 노려보는 상황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나는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원생들인지 알았지. 정말 미안. 그런데… 도장에 가입하러 왔나?”
“아, 아니요. 그냥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상대가 먼저 사과를 하자 동빈도 경계심을 풀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으니 의심받을 상황은 충분했다.
“뭐가 궁금하지? 관비는 한 달에 10만원일세. 그러나! 3개월을 한꺼번에 등록하면 27만원도 가능하지. 또 한 가지 보너스. 이번 주 내로 등록하면 도복도 공짜로 준다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저기 관비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싸움 잘하는 기술이 궁금한 거지? 나한테 배우면 절대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야. 사범인 내가 장담하지.”
“…….”
“뭐야? 이것도 아니야?”
사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뭐 하러 왔냐는 반응이었다. 조금 어색하게 흐르는 상황. 그러나 윤지나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어머나… 도장 안은 밖하고 상당히 다른 분위기네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 차림.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얼굴은 상당한 미인에 속하는 그녀였다.
“이럴 수가! 아름다운 여자 분도 계셨군요. 실내 분위기에 신경 좀 썼습니다. 요즘은 깨끗하지 않으면 원생 모으기 힘듭니다.”
여기 사범은 사람을 많이 차별한다. 윤지나가 등장하자 사범의 관심은 온통 그녀에게 쏠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저희 사무실로 들어가서 말씀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같은 용건이라도 대접이 달랐다. 사범은 한쪽 곁에 마련된 사무실을 가리키며 정중하게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여기는 제 사촌 동생이에요.”
“하하! 그렇군요. 그런 줄 알았으면 관비를 깎아 부르는 건데…….”
“사범님,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죠?”
“물론이지요. 저는 마실 것 좀 준비하겠습니다. 아가씨는 뭘 좋아하시는지요?”
사범은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다. 직접 음료수를 대접하겠다는 호의를 보인 것이다.
“저는 그냥 커피 주세요.”
“커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학생은?”
“저는 사이다…….”
“그냥 커피 먹어. 응!”
“네…….”
동빈은 주문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사범의 이마에 주름이 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장 사무실은 아담했다. 칸막이를 세워서 밖과 구별을 했고 중앙에는 손님용 소파가 마련되어있었다. 벽면을 따라 가지각색의 트로피가 즐비했고 사진 몇 장도 걸려있었다.
“아직 덥지요. 특별히 냉커피를 만들어 왔습니다.”
“어머나, 죄송해서 어쩌지요?”
“괜찮습니다.”
사범은 얼음까지 동동 띄운 냉커피를 내려놓았다. 물론, 동빈의 커피는 김이 펄펄 나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더워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자리에 앉은 사범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반응을 보였다. 윤지나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혹시, 이 편지를 보내셨습니까? 제 사촌 동생에게 온 것이에요.”
그녀는 석진에게 받은 편지를 꺼내 보였다. 필적은 알 수 없었다.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프린터로 출력한 봉투였다.
“우리 도장 주소는 맞는데… 저는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여기 주소를 썼을까요?”
“글쎄요. 원생 중에서 도장 주소를 사용하는 놈이 있지만… 성적표가 아닌 것은 처음이군요.”
“그, 그래요…….”
대화가 막히고 말았다. 사범이 아니라면 원생 중 하나란 소리였다. 그녀도 차마 원생명부까지 보여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아가씨도 무술을 배워봄이 어떻습니까? 요즘 세상이 워낙 험악하지 않습니까? 다이어트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자 사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꼭 가르치고 싶다는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주로 어떤 것을 가르치나요?”
“태권도, 유도, 특공 무술 등등 닥치는 대로 가르칩니다.”
윤지나도 대화를 거절하지 않았다. 사범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모색했다.
“사범님은 상당히 많은 종류를 가르치시네요.”
“하하하. 이래야 학생들을 모을 수가 있어서 말입니다. 원하시면 한창 유행하는 격투기도 가르쳐드립니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계통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지요. 누구에게 배우냐가 중요한데……!”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던 사범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사범님, 왜 갑자기… 아니, 동빈이 너까지…….”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동빈의 행동까지 이상했다. 사범과 동빈의 시선은 아무도 없는 도장을 향해 있었다.
웅성웅성.
그녀는 잠시 멍했지만 곧이어 이유를 깨달았다. 미세한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런 기척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도장 밖이나 안이나 모두 조용하다. 뭔가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덜컹.
문이 열리면서 학생 하나가 몸을 날리며 뛰어들었다.
추악.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습 공격을 피하려는 동작이 분명했다. 낙법을 사용해서 떨어지고도 안심을 못 했다. 계속 데굴데굴 몇 바퀴 더 구르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엥? 오늘은 발치기가 안 날아오네?”
힘들게 낙법까지 펼친 학생은 뚱한 반응을 보였다. 사범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머지 원생들이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우르르.
“뭐야? 사범님이 없는 거야? 괜히 겁먹었잖아!”
“조, 조용히 해라. 사무실 쪽으로 고개 돌리지 말고…….”
기고만장했던 원생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문이 반쯤 열린 사무실에서 강한 살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부슥.
“하하하. 아이들이 왔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사범이 몸을 일으켰다. 원생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양새는 열린 사무실 문 틈으로 모두 볼 수 있었다.
“저기…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게.”
사무실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동빈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질문인지 사범도 흔쾌히 들어주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혹시… 특수부대 출신입니까?”
“……!”
너무 날카로운 질문인가? 사범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쪽팔려서 그런다. 난 방위 출신이거든.”
꽝.
사범은 기분이 상했는지 사무실 문까지 세게 닫았다. 여자 앞에서 방위라고 말한 것이 창피했던 것인가? 무술을 가르치는 입장이라 더욱 그럴 수도 있었다.
“동빈아, 그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해?”
“제 질문이 잘못됐습니까?”
그녀는 동빈의 경솔한 행동을 지적했지만, 동빈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빈 학생도 군대를 갔다 오면 알겠지만… 방위 나온 게 자랑은 아니잖아. 진짜 사정이 있어서 현역에 못 간 남자도 얼마나 많은데. 방위 나온 사람한테 특수부대냐고 묻다니 말이야.”
“방위도 방위 나름입니다. 여기 사범님은 분명 특공 무술의 달인입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의 발차기… 실전 무술의 달인이 아니면, 그렇게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지 못합니다. 제 결심을 깰 만큼 뛰어난 고수입니다.”
“결심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오늘따라 그녀는 반문을 많이 했다. 개인적인 결심과 사범의 무술 실력의 연관성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부터 손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민간인은 발로도 충분하고 생각했는데…….”
“저, 저기 동빈 학생… 내가 민간인의 정의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조폭이나 무술 사범도 민간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깜박깜박.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발로만 싸우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조직 폭력배나 무술 고수까지 포함해서? 이제 슬슬 그녀도 동빈이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도장 전체는 시끄러웠다. 지각한 원생들을 혼내는 사범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네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죄송합니다.”
사범은 무술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목청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기가 질렸는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늦게 온 것도 모자라서 잔머리나 굴리고 말이야.”
“사, 사범님의 발차기는 너무 무서워요.”
“맞아요. 우리는 연약한 학생들이란 말이에요.”
원생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소호했다. 늦게 온 것은 인정하지만 잔머리를 굴린 것은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반항을 하네… 내가 진짜로 때린 적 있어? 나처럼 신사적인 남자를 감히 폭행 사범으로 몰아붙인단 말이지?”
“그치만요, 사범님이 실수하면 바로 골로 가는 거잖아요.”
“맞아요. 도장에 들어올 때마다 심장마비 걸릴 것 같아요.”
“난 실수 안 해. 그러니까 사범 하는 거야!”
“…….”
원생들의 변명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억울하면 사범 하라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요즘 놈들은 덩치만 커졌지 체력도 없고 배짱도 없어. 오늘은 대충 이 정도로 끝내겠는데…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거다. 다들 옷 갈아입고 뛰어.”
“넵!”
“대답만 하지 말고 빨리빨리 뛰어다녀.”
우당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