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224)

하늘이 노랗다. 싸움과 운동은 별개인가? 중학교 일진이라고 폼 잡던 놈들은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다.

“헉헉… 이…젠… 죽어도 못 뛰어…….”

“머, 멈추면… 진짜 죽는 거야. 헉헉… 뛰, 뛰어…….”

남학생들은 하나 둘 퍼져갔다. 뛰는 것이 아니라 기는 수준에 가까웠다.

“시파… 초, 초반에 너무 무리했어…….”

“헉헉… 주, 죽겠다… 더, 더 이상 못 가…….”

추격전의 결말이 서서히 다가왔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동빈을 당해낼 재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히…힘내… 쪼, 쪽팔리게… 선아보다 못 뛰면…….”

“도, 독한 년… 혼자만 살겠다고…….”

“너 몰랐냐… 헉헉… 제 초등학교 때 육상부였어…….”

선아는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내달렸다. 하나 둘 처지는 남자들을 제치며 혼자서 멀어지는 것이다.

“난 포기… 헉헉… 헉헉…….”

“씨발… 나도 포기… 헉헉…….”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남학생들은 벽을 붙잡고 멈췄다. 속이 뒤집히고 구토까지 올라올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었다.

“존나… 우, 우린 죽었다…….”

“뛰다 죽나… 맞아 죽나…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미, 미친다. 저 고딩은 여전히 빨라.”

“빠르기만 하냐… 저놈은 지치지도 않잖아…….”

뒤를 돌아본 학생들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괴물이란 느낌밖에 없었다. 빠른 건 둘째 치고,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 살기 힘들겠지.”

“시바… 누가 사고 쳤기에 저놈이 따라오는 거야?”

“살 떨려 죽겠네… 저 고딩 얼굴 좀 봐라.”

두두두두.

무엇이 동빈을 열 받게 했는가? 인상까지 쓰며 달려오는 동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 확실했다.

“다, 당황하지 마.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미친 새끼… 침착하게 맞아 죽자는 소리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이번에는 정말 말로 끝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시파! 저번과 똑같은 작전이다.”

“이, 이번에도 통할까?”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해봐, 이 새끼야!”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죽지 않으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순간에도 동빈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빨리 결정해. 어, 어쩔 거야? 젠장! 버, 벌써 왔잖아!”

“……!”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예상보다 사태는 심각했다.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동빈의 표정을 보자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밖에 남지 않았다.

“자, 잘못했어요! 형님∼.”

“저는 3대 독자예요!”

풀썩.

학생들의 작전은 진짜 별것 아니었다. 동시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동빈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는 행동을 보였는데…….

“이것들아, 비켜!”

부웅.

뭔가 이상하다. 동빈은 무릎을 꿇고 반성하는 학생들을 외면했다. 급한 볼일이 있는지 남학생들을 뛰어넘으며 지나친 것이었다.

“뭐야? 우, 우리가 아니었어?”

“그러면 여태까지 헛지랄한 거야……?”

살았다는 안도감은 잠시였다. 멍한 표정이 되어 선아를 쫓아가는 동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선아가 너무 열심히 뛴다 했어.”

“비겁한 선아 년… 진작 말이나 해줄 것이지.”

누굴 원망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무작정 달아났던 자신들의 문제가 가장 컸다. 동빈은 더욱 속력을 높여서 뛰었고 마침내 선아를 따라잡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덥썩.

“어딜 도망가!”

“오마나!”

동빈은 가볍게 선아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부리나케 달리던 선아의 다리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네 죄를 알고 있겠지?”

“헉헉… 오, 오빠… 헉헉… 사, 살려줘요.”

선아는 손까지 싹싹 빌어가며 잘못을 빌었다.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숨 가빴던 추격전은 끝났다. 동빈은 선아를 추궁하여 동영상을 올리는 데 일조를 했던 중학생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손 바싹 못 들어? 너희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말이야.”

선아와 그녀의 친구들은 손을 치켜든 상태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 남학생들이라면 주먹부터 나갔겠지만 여자라서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해. 누가 동영상을 올린 거야!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저희도요… 열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선아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가 대신 대답하는데 선아만큼 대책이 없는 모습이었다.

“열라 미안한 건 상관없고, 누가 동영상을 올린 거야! 혹시, 선아 아니야?”

“선아는 아니에요. 쟤는 올리지 말라고 했어요.”

“선아는 올리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맘대로 올렸다는 것이야? 확실해?”

“맞아요. 제 삼촌이 프로덕션을 하시는데 너무 재미있다고 해서… 얼마나 졸라서 편집까지 한 건데요.”

선아의 무죄가 증명되었다. 아니, 동영상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으니 완전히 죄를 씻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럼, 네 삼촌이 나머지 동영상도 올린 거야?”

“아니요! 우린 첫 동영상만 올렸어요. 그다음은 정말 몰라요.”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동영상은 다른 놈의 소행이라는 결론이었다. 원하는 정보는 얻었지만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 첫 번째 동영상이 가장 큰 문제였어. 너희들은 장난으로 올렸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골치 아파 죽을 지경이야.”

“아까도 말했지만요. 저희도 열라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오빠를 돕기 위해 몰래 노력도 많이 했어요.”

“나를 도와? 뭐로 도울 건데?”

“우리가요, 오빠 팬 까페 만들었어요. 정말 인기 짱이에요.”

“맞아요. 회원 수가 장난이 아니에요.”

“미친다…….”

동빈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선아만큼 대책 없는 것이 아니라 선아보다 더욱 대책 없는 아이들이었다. 더 이상 말해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결론에 봉착했다. 동빈은 그냥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뜻밖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이! 남의 학교에서 이러면 안 되지.”

매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해가 생긴 게 틀림없다. 동빈을 학생을 괴롭히는 양아치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오해야, 오해. 난 그냥… 어라? 너는 말이 통하는 놈이잖아?”

“반갑다, 김동빈.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

이 근방 최고의 일진이라는 박준혁이었다. 강진고등학교는 선아의 학교와 가까운 편이었다.

“이 애들이 심하게 장난을 쳐서 혼 좀 내고 있었다. 괜찮지?”

“아니… 여기서는 내 허락 없이 학생들을 괴롭힐 수 없어.”

“……!”

준혁은 동빈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태도를 확실히 했다. 당당한 체구로 동빈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실망인데? 말이 통하는 놈인지 알았는데 말이야.”

“그동안은 주철이 때문에 손을 못 썼지. 지금은 네가 찾아온 것이니 그놈도 뭐라고 하지는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난 저번처럼 피해만 다니지 않아. 덤비는 놈은 무조건 박살 낸다.”

“널 그냥 보낼 수 없는 내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내가 겁먹고 피했다는 소문이 싫거든.”

첫 번째 만날 때하고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동빈이나 준혁이나 싸움을 피할 입장이 아니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터넷의 싸움꾼과 인근 최고 일진의 중요한 대결이었다.

“준혁이가 불리하지 않을까? 저놈은 조폭도 맨손으로 잡는다는 소문이던데?”

“인터넷은 과장이 심하잖아. 저놈도 준혁이처럼 진짜 싸움꾼을 만난 적은 없을 거야.”

강진고 학생들은 준혁의 우세를 점쳤다. 동빈의 경력이 화려하긴 했지만 준혁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준혁이가 싸움을 잘 안 해서 그렇지 제대로 붙으면 끝장이지. 씨름과 유도로 단련했던 놈이잖아. 강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열 1위나 2위를 다툰다는 소문이야.”

“누가 이길지 모르겠지만 싸움은 역시 직접 보는 게 최고야. 인터넷에서 볼 때보다 훨씬 현장감이 넘친다.”

구경꾼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흥분했다. 동빈과 준혁이 눈싸움을 벌이자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박준혁. 조건이 있는데 말이야, 내가 싸울 때는 핸드폰과 디카, 절대 안 돼.”

“모두 들었지? 핸드폰이나 디카 쓰는 놈은 내가 박살 낸다.”

둘의 대결을 몰래 찍으려고 했던 학생들은 서둘러 자신의 물건을 감췄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혼자 덤빌 거야? 단체로 와도 상관없는데?”

“정말 뜻밖이야. 저번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양아치들을 피해 도망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도 만만치 않아. 나한테 혼자 덤비는 놈은 네가 처음이거든.”

“그 정도로는 만족을 못 하지. 너한테 이기는 놈도 내가 처음이 될 거다!”

차작.

준혁은 낮은 자세를 취하며 양손을 뻗었다. 타격보다는 잡는 방식의 싸움에 능숙한 모양이었다. 상체의 엄청난 근육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방어 자세가 형성되었다. 목이 보이지 않았고 머리와 양쪽 어깨만이 불쑥 튀어나온 자세였다.

“이얏!”

짤막한 기합과 함께 준혁이 달려들었다. 체구에 비해서 스피드도 훌륭했다. 무엇보다는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던 학생들까지 흠칫할 정도였다.

사삭.

동빈은 뒤로 물러서며 준혁의 태클을 피했다. 그러나 여기서 동작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극무의 기초는 공격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공격을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파팟.

뒤로 물러섰던 동빈의 다리에 힘이 실렸다. 뒷다리의 체중이 앞으로 쏠리면서 무릎을 앞세운 공격이 이어졌다.

푸악.

준혁은 양손을 교차하여 동빈의 공격을 막아냈다. 완벽한 방어였지만 그 육중한 체격이 주르르 밀려났다.

“저, 저놈 괴물이다.”

준혁이 힘에서 밀리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구경하던 학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동빈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후웅.

동빈의 몸은 땅에 닿자마자 곧바로 튀어 올랐다. 고무공 같은 탄력을 가진 신체였다.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몸을 크게 비틀었고 체중을 실은 발차기가 상대의 등을 향했다.

퍼억.

동빈의 발등이 준혁의 등 중앙을 찍어 눌렀다. 요란한 소리만큼이나 충격도 대단했다. 준혁의 상체는 크게 흔들렸고 충격의 여파는 하체까지 이어졌다.

풀썩.

거구의 몸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두 방의 공격에 준혁이 무너진 것이다.

“세상에… 버, 벌써 끝난 거야?”

“주, 준혁이가… 강북에서 1, 2위 다투는 거 맞아……?”

구경하던 학생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던 싸움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부들부들.

“젠장…….”

준혁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이미 패배를 인정했다. 아무리 기를 써도 발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억지로 일어나지 마라. 딴 놈들 같으면 완벽하게 박살을 냈겠지만 옛정을 봐서 참는 거다. 너 정도의 실력이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듣겠지?”

끄덕끄덕.

결국 준혁은 패배를 시인하고 말았다. 일대일로 동빈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깨달은 것이다.

우르르.

싸움이 끝났지만 학생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동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준혁이랑 인터넷 놈이 싸운다며?”

“벌써 끝났다.”

“…….”

언제나 뒷북치는 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만큼 싸움이 빨리 끝났다는 증거였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동빈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잘 아는 번호인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석진아. 무슨 일이야? 뭐? 정말이야? 그게 어딘데? 강남!”

좋은 소식이 분명했다. 동빈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았어, 고맙다. 문자로 정확한 주소 좀 알려줘. 그래, 끊는다.”

동빈의 손길이 바빠졌다. 급한 일인지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꾹꾹꾹.

“여보세요. 네, 김동빈입니다.”

범인은 잡았어?

“덕분에요. 그런데 방금 중요한 사실을…….”

“오빠? 여자한테 전화하는 거예요?”

“시끄러!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누나에게 그런 말을…….”

선아의 방해에 동빈은 잠시 당황했다. 서둘러 사과를 하고 전화한 목적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친구가요, 저번에 퀴즈를 맞혔는데 상품이 왔대요. 맞아요, 자유이용권.”

동빈은 자리를 벗어나며 통화를 했다. 선아의 방해도 싫었고 주위의 시선도 거슬렸기 때문이다.

“네, 편지가 왔는데 상대방의 주소가 있대요. 누나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물론이지. 지금 어디 있어? 내가 차 가지고 갈게.

“강진고등학교 후문 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강남으로 갈 겁니다.”

큰길까지 나와서 조금만 기다려.

“네, 고맙습니다.”

딸깍.

동빈은 핸드폰을 끊고 심호흡을 길게 했다. 동영상에 대한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잡았고 이제는 두 번째 인물을 찾는 것이다.

“박준혁, 나 먼저 간다.”

동빈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점점 더 몰려와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빠,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은 무슨!”

“저놈이 김동빈이야? 화면보다 잘생겼네?”

“저놈 싸움도 졸라 잘해.”

정말 대단한 인기였다. 동빈은 학생들 사이를 헤치며 힘든 발걸음을 해야 했다.

“근데 저놈 어디 가는 거야?”

“이제 강남 난리 났다. 저놈 지금 강남 정벌하러 가는 거야.”

“정말! 진짜로 전국을 평정하려고 저러는 거야?”

동영상의 여파는 컸다. 학생들은 동빈이 강남을 치러 가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리저리 전화하는 학생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너희 이제 큰일 났다. 정말이야. 지금 간다니까!”

“아, 씨발! 일대일은 불가능해. 최대한 많이 모아!”

그러나 더 큰일 난 것은 강남에 있는 일진들이었다. 김동빈의 방문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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