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224)

동빈은 평소보다 일찍 학교를 나섰다.

식당 사건 이후에 변해버린 학생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장군의 명령을 어긴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판단했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미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아온 상태였기에 조퇴를 해도 무방했다.

“이상하게, 기다리면 버스가 안 온단 말이야.”

동빈의 시선은 한산한 도로에 집중되었다. 30분은 넘게 기다린 것 같다. 평상시에 그렇게 잘 다니던 버스가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었다.

“뭐야?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아깝다. 기록 세우기 직전인데…….”

급하게 코너를 돌아오는 버스가 보였다. 병원 가는 버스가 확실하다. 너무 오래 기다렸는지 반가움보다는 빈정거림이 먼저 튀어나왔다.

끼이익.

길게 이어지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버스가 도착했다.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아? 오늘 뭔 일 있나?”

버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모습. 꽤나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게다가 등하교 시간도 아니건만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취이익.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렸다. 정말 오늘 무슨 일이 있는가?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르르 내리는 것이다.

“여기가 명성이 확실해?”

“짜증나게 왜 자꾸 묻고 그래. 맞으니까 빨리 내려.”

‘우리 학교에 볼일 있나? 왜 저리 몰려온 거야?’

동빈은 버스에 오르지 않고 슬쩍 쳐다보았다. 줄줄이 내리는 학생들은 많이 수상해 보였다. 거친 말투나 행동에서 불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팔, 얼마나 잘 싸우는 놈인지 존나 기대된다.”

“뻥이기만 해봐라. 명성 놈들 다 작살내 놓을 테니까.”

“조심해. 뭔가 있는 놈이니까 아무나 덤비라고 광고했겠지.”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들이 노리고 온 사람이 누군지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학생, 안 탈 거야?”

“아, 아니요. 탑니다.”

잠시 한눈을 팔았던 동빈이 허겁지겁 버스에 올랐다.

부르릉.

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고, 동빈의 시선은 곧바로 창문으로 이어졌다. 우르르 떼로 몰려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동빈이 다니는 학교가 분명했다.

상담실 내부는 언제 봐도 마음이 편안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인상 좋은 원장의 따듯한 미소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다.

“뜻밖이군. 자네가 먼저 상담실을 찾다니 말이야.”

최 원장은 금테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손을 뻗으며 앉으라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요즘 제가 심적으로 매우 불안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잘 왔네. 육체적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초기에 잡는 게 중요하거든.”

동빈이 소파에 앉자 최 원장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뜻을 보냈다. 가벼운 미소로 바라보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표현임을 동빈은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은 별것 아니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매우 심각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실연도 당했고 또한…….”

“실연?”

최 원장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너무 사소한 것이란 표현인지. 매우 심각하다는 반응인지, 헛갈리는 표정이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작전 중에 동료들을 잃기는 했지만 그때는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처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글쎄… 실연 같은 경우는 말이야, 나보다는 가까운 사람에게 위로를 듣는 편이 좋은 것 같은데? 친구도 좋고… 나이가 있는 송 교관도 괜찮고…….”

“죄송하지만, 교관님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처지를 당해서 말입니다. 오히려 교관님의 푸념만 들었습니다. 뭘 그리 많은 여자들에게 차이셨는지… 북한에 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정말 지겨워죽는지 알았습니다.”

송 교관도 실연의 상처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동빈의 과거까지 조작하여 피아노 원장에게 접근을 했으나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럼, 장군님은 어떤가? 아직도 거리감 때문에 말 붙이기 어색한 것인가?”

“아닙니다. 장군님께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궁금하군.”

“잊으라고 명령하실까 두렵습니다. 다른 동료들처럼…….”

동빈의 목소리는 조금씩 낮아졌다. 그런데 잊으라고 명령한다고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최 원장이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장군이 명령하면 자넨 잊을 수 있나?”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매우 편한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야, 나도 찬성하고 싶지는 않아. 억지로 잊으려고 노력하지 말게. 누구나 겪는 시련이니 말일세. 한마디로 정확한 해답이 없다는 뜻이지.”

“네, 알겠습니다.”

동빈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해답이 없다는 사실은 동빈도 알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확인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동빈 군, 나머지 고민은 무엇인가? 실연보다 더욱 중요한 것 같은데?”

최 선생은 진지하게 물었다. 단순한 실연 때문에 동빈이 먼저 찾아왔다고 믿지 않았다. 진짜 자신을 찾아온 문제를 꺼내라는 독촉이었다.

“…….”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이미 국방부에서 요구한 답변은 보낸 상태야. 이번 상담 내용으로 바뀔 건 없다는 뜻이지.”

“사실은 말입니다… 요즘 많이 화가 납니다. 혜영이가 떠난 뒤로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누구나 화를 내지. 다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야.”

“화를 못 참는 경우가 벌어졌습니다. 학생에게 폭력을 쓸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당한 학생이 맞을 짓을 했는가?”

“제 생각에는 그놈은 맞아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말입니다, 사람을 개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참아줬으면 됐지 말입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니…….”

“자네의 기분은 어느 정도 알 것 같네.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혔으면 좋겠어.”

동빈의 격양된 반응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최 원장은 잠시 안정을 찾으라는 의미로 동빈의 말을 끊었다.

“어쨌든 처음 사회에 나올 때는 안 그랬는데 말입니다, 요즘은 제 자신을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무작정 도망치고 싶지도 않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 이번에는 내 경험을 말해주는 게 나을 것 같군. 나는 자네와 반대로 사회에 있다가 군대에 갔지. 참고로 나는 군의관 출신이 아니야. 사병으로 입대했는데… 산악 행군을 할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

“선생님은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아니야. 그때는 이처럼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어. 하여튼, 산악 행군을 할 때마다 고참의 워커만 보고 억지로 걸었지. 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어. 주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거야. 산 아래로 보이는 판잣집은 정겹게 느껴졌고 산속의 나무들이 그렇게 컸는지 몰랐었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많은 아름드리나무가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지. 그 뒤로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네. 대신 짜증이 났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씻고 싶다는 등… 자네는 이게 무슨 뜻이라 생각하나?”

갑작스런 질문. 그러나 동빈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적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맞아. 어느 정도 군대에 적응이 되었다는 증거야. 나는 20년 동안 사회에 있다가 군대에 입대를 했지. 반대로 자네는 10년 동안 군대에 있다 다시 사회에 복귀한 셈이야. 자네의 고민은 점차 사회에 적응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거야. 군대로 치면 이등병 딱지를 뗀 셈이지. 또한 사회는 군대와 달라서 상관의 명령에 살고 죽을 필요는 없네. 이제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소신이야. 자네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살아갈 때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네,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하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스스로가 해결책을 알고 있지. 자네가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처럼 말이야.”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도움이 돼야지. 이게 내 밥벌인데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고할 것은 폭력은 가급적 피하라는 말일세. 자네에게는 몇 번을 당부해도 모자라는 말이지.”

“선생님 말씀은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상담이 끝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최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정리를 했고 동빈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서 들어가게. 그리고 다음 상담은 언제가 괜찮은가?”

“학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결정적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오늘따라 정신이 없다. 휴대폰을 꺼놓는 것을 깜박한 것이다.

“어서 전화 받게. 적당한 날짜를 잡으면 간호사에게 연락 주게나.”

“네, 감사합니다. 그럼…….”

동빈은 상담실을 나오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석진아. 여기? 상담 좀 받고 있었지.”

복도를 지나서 출입문 앞에 섰다. 간호사가 인사를 하자 간단하게 고개만 숙여 답했다. 석진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들려서 통화를 끊을 수 없었다.

기이잉.

“아니, 난 죄진 거 없는데?”

동빈은 자동문을 지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통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뭐! 날 찾는 놈들이 학교에 쫙 깔렸다고?”

동빈은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석진아, 혹시 정한수 때문이냐? 너도 모른다고?”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정한수 쪽이었다. 앙갚음을 위해 친구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야! 학교를 어떻게 빠지냐? 그래, 여하튼 내일 보자.”

동빈은 전화를 끊고도 계속 황당한 표정을 유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혹시? 정류장에서 봤던 놈들이?”

험악한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가던 광경이 떠올랐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빠질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올 테면 와봐라.”

우선은 부딪쳐보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오히려 동빈이 궁금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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