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동빈은 계속 딴생각에 빠져 들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조용한 음악처럼 느끼며 상념에 젖어 든 것이다. 현란한 화면이 비치는 동빈의 표정은 다채롭게 변했다. 풀리지 않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결국, 동빈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났다.
우르르.
영화가 끝나자 극장 앞은 더욱 분주해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영화에 만족했는지 대부분의 표정이 밝았다. 동빈처럼 고뇌에 찬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오빠, 맛있는 거 사줘요. 초코파이 말고요!”
‘이게 무슨 꼴이지… 교관님은 좋겠다.’
선아의 수다에 복잡한 마음이 금방 정리되었다. 자신의 신세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빠, 맛있는 거 사줘요.”
“싫어.”
“좋아요. 오빠가 영화 보여줬으니, 내가 맛있는 거 살게요.”
“그것도 싫어.”
동빈은 모든 게 귀찮다는 반응이었다. 선아가 징징거리고 매달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 속력을 내서 빨리 걷기 시작했다.
“어머나! 너, 동빈이 아니야?”
“……!”
동빈은 매우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는 발길을 멈췄다. 극장을 빠져나가는 행렬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 정말 뜻밖이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어라? 유나가 여기는 웬일이야?”
“웬일은… 나도 영화 보러 왔지.”
부반장인 오유나를 여기서 만나다니……. 그러나 잘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학교에서 가깝고 괜찮은 극장은 이곳밖에 없었다.
“유나도 영화를 보는구나. 공부만 하는지 알았는데?”
“내가 무슨 공부하는 기계니? 가끔은 머리도 식혀야지.”
“어떤 거 보러 왔는데?”
“아니야, 나는 벌써 봤어. 참! 너도 같이 본 거 아니야? 이 영화 정말 괜찮지 않니? 주인공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장면이 너무 멋있어.”
“난 전쟁 영화 봤어…….”
아쉽게도 둘이 본 영화는 달랐다. 동빈이 본 영화의 주인공은 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렸다.
“전쟁 영화도 괜찮지. 남자 애들이 특히 좋아하잖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대화는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동빈은 선아와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여자는 또 뭐야? 이번에는 진짜 만만치 않네. 말을 들어보니 공부 잘하는 범생 같고… 얼굴도 예쁘고,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 보이네. 아이! 속상해.’
속이 타는 것은 선아였다. 혜영이 떠나서 안심했는데 뜻밖의 경쟁자를 만난 것이다. 물론, 선아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유나는 같은 반 친구로서 동빈을 대했다.
“어머, 동빈이 너 제법이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이복동생…….”
“이복동생?”
“아, 아니! 그, 그냥 아는 애. 맞아, 그냥 아는 애.”
동빈이 허둥거리자 유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복동생이 아닌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의아한 것이다.
딩딩딩딩. 딩딩딩딩.
위기의 순간. 선아의 핸드폰 소리가 동빈을 구했다. 유나와 동빈은 조용한 통화를 위해서 잠시 목소리를 낮췄다.
“여보세요. 그래… 아까 전화했… 뭐! 내가 취소하라고 했잖아! 오, 오빠, 잠시만요.”
통화를 하던 선아는 깜짝 놀라서 자리를 피했다. 동빈이 알면 안 되는 내용이 분명하다. 당황스런 얼굴로 동빈의 눈치를 보는 것이 조금 수상했다.
“동빈아, 꽤 귀엽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골치 아파 죽겠구만. 그나저나 넌 누구하고 온 거야? 설마, 혼자 온 건 아니겠지?”
“혼자 오긴… 잠시 화장실 가셨어. 너도 잘 아는 분이야.”
“나도 잘 안다고? 게다가 분?”
동빈이 아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있었다. 게다가 존칭을 썼으니 그 범위는 더욱 줄어든 셈이었다.
“마침 저기 오시네.”
“어째 불길한 예감이…….”
동빈은 아주 천천히 유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동빈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교, 교관님…….”
“동빈이구나. 극장표를 다시 구했구만기래.”
말쑥한 정장 차림의 송 교관을 볼 수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되는 상황이었다.
“네, 전쟁 영화 봤습니다.”
“어쨌든 축하한다. 근데, 전쟁 영화 보려면 그렇게 군복을 입어야 하는 거네?”
송 교관은 농담까지 건넸지만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좀 전의 동빈의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엄마가 시간이 안 돼서 내가 대신 왔어. 정말 보고 싶은 영화였거든. 정말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고맙긴…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우. 그냥 아저씨라 불러도 상관없어야.”
“네, 아저씨.”
복이 없기는 스승이나 제자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억지로 웃음 짓는 송 교관을 보니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근데… 유나야, 너는 남자 친구 없네?”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송 교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기에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행동이었다.
“영화는 말이야, 남자 친구와 봐야 의미가 있는 기야. 그런 의미에서 당장 남자 친구 사귀라우. 참! 여기 있는 동빈이는 어떠네?”
“어머나? 동빈이와 사귀라고요?”
“뭘 그리 놀라네. 체격 좋지, 운동 잘하지, 공부는 유나, 니가 잘하니 금상첨화구만기래”
송 교관이 급했다. 동빈이보고 양다리 걸치라는 뜻인가?
“아저씨도 참… 동빈이는 여자 친구 있잖아요.”
“마, 맞다. 이놈도 여자가 생겼지. 그런데 동빈아, 여자 친구는 어디 있네? 구경 좀 하자우.”
“여자 친구 없습니다. 캐나다 갔습니다. 방금…….”
“이건 또 뭔 소리네? 벌써 헤어진 거네?”
사태가 점점 복잡하게 돌아갔다. 송 교관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고,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빈아, 저기 있는 애가 여자 친구 아니야?”
“그냥 아는 애라고 했잖아.”
모든 시선은 선아에게 집중되었다. 그것도 모르는 선아는 큰 소리로 통화를 계속했다.
“이년아! 지금 당장 취소해!”
매우 중요한 일인지 목청을 높이는 선아였다. 동빈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선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 그거 올리면 정말 난리 난단 말이야.”
점점 더 수상하다. 잔뜩 움츠린 자세로 슬금슬금 눈치까지 보고 있었다.
“동빈아, 너 원조네? 꼬마 숙녀가 왜 저리 우리 눈치를 보고 그러네?”
“그, 글쎄요.”
궁금하긴 동빈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약한 선아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정말 잘못한 거 없네?”
“없어요. 무슨 잘못을…….”
“아무리 봐도 꼬마 숙녀가 곧 도망칠 분위기구만기래?”
“설마요…….”
설마가 아니다. 선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몸을 사렸다. 도독이 제 발 저리는 풍경. 조만간 줄행랑을 놓을 태세까지 끝마친 것이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주춤주춤.
동빈이 불러도 소용없었다. 선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뒷걸음만 쳤다. 그러고는.
“에이… 씨!”
선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자로서는 꽤 빠르고 민첩한 편이다. 인파가 붐비는 거리를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