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극장 앞.
멀티플렉스multiplex라는 이름을 달긴 했지만, 조그만 상영관이 3개인 중형 극장이었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영화가 1관과 2관, 두 개를 차지했고, 나머지 3관은 허리우드 전쟁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동빈은 한국 영화를 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 영화를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스윽.
동빈은 시계를 보는 횟수가 많아졌다. 상영 시간이 임박해가건만 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빈은 초조한 마음을 참을 수 없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안하네. 사람들이 많아서 못 찾는 건가?’
혜영이 주변에 있다면 못 찾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동빈은 극장 입구에서 목을 빼고 까치발까지 한 상태였다. 큰 키에 전투화를 신었으니 상당히 튀어 보였다. 그냥 지나치는 행인들조차 ‘뭔 일 있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혹시, 수진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려준 거 아니야? 답답해죽겠네. 왜 전화까지 안 받는 거야.’
극장에 도착하고부터 전화는 계속했었다.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제였다. 상영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고 동빈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오빠! 여기서 뭐 해요?”
‘뭐, 뭐냐! 이 반갑지 않은 목소리는…….’
동빈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충격을 받았다. 누군지 너무나 확실했기에 뒤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열나게 도망치더니 고작 여기 온 거예요?”
‘미치겠네. 오라는 애는 오지 않고… 이대로 도망칠까? 아니야, 혜영이를 기다려야 하잖아. 선아가 뭔 짓을 하건, 그냥 철저히 무시하면? 이것도 아니야… 순순히 물러날 애가 아니잖아.’
동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정말 우린 인연이 많은가 봐요.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어요? 안 그래요?”
‘내 뒤를 따라온 것인가? 설마… 그렇게 빨리 달렸는데. 그럼,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수상한 구석이 많고…….’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나만 떠드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요.”
‘으윽! 목소리만 들어도 골치 아파 죽겠다.’
“계속 이러면 오빠만 힘들어져요. 이게 다 오빠를 위해서예요.”
“야! 넌 여기 뭐 하러 왔어!”
결국 동빈은 대꾸를 하고 말았다. 진짜 가만히 두었다가는 끝도 없이 나불거릴 것이 분명했다.
“극장에 뭐 하러 와요? 당연히 영화 보러 왔지요.”
“그럼 알은척하지 말고 영화나 봐라. 오늘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날인 줄 알아? 제발 떨어져 주라. 응?”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반갑다고 인사한 것뿐인데, 오빠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동빈이 사정 조로 말해도 소용없었다. 선하가 시치미를 뚝 떼니 동빈만 이상해지고 말았다.
“선아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나는 네가 반갑지 않거든.”
“저는 반가워요. 그러면 된 거예요. 그런데… 여자 친구는 아직 안 왔나 봐요? 정말 너무하다. 지가 뭐가 잘났다고 약소도 늦고 그래요?”
“무슨 소리야. 벌써 와서 화장실 간 거야.”
“화장실은 극장 안에 있지 않나요?”
“야! 너 진짜 이렇게 나오면…….”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결정적인 순간 벨 소리가 울리고 말았다. 동빈이 마음 단단히 먹고 거친 소리를 내뱉기 직전이었는데, 하늘도 동빈을 포기하는 모양이었다.
“우와! 벨 소리도 진짜 촌티 난다.”
전화 왔어요. 전화…….
“여, 여보세요. 그래! 수진아. 내가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마지못해 전화를 받던 동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침내 기다기고 기다리던 전화가 온 것이다.
“혜영이한테 약속은 제대로 전해줬지? 아직 안 나와서 말이야.”
동빈은 조용한 자리를 찾으며 통화를 했다. 물론, 선아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동빈을 졸졸 따라다녔다.
“수진아, 혹시 말이야… 혜영이 어디 있는지 알아?”
휘이휘이.
동빈은 손을 휘휘 저으며 선아를 떼어내려 난리를 쳤다. 이런다고 물러날 선아가 아니다. 살금살금 다가서며 동빈의 휴대폰과 거리를 좁혔다.
“뭐, 뭐라고? 혜영이가 옆에 있다고?”
동빈은 놀라서 발길을 멈췄다. 극장에 도착할 시간에 왜 수진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졸졸 따라다니는 선아를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거, 거기 어딘데? 혜영이보고 빨리 오라고 말해!”
미안해, 동빈아.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선아는 통화 내용을 엿듣는 데 성공했다. 통화음이 큰 편이라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진아, 지금도 늦지 않았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동빈아, 혜영이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앗싸! 신난다!’
선아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동빈이 때문에 소리만 지르지 못할 뿐이었다.
“수, 수진아. 무슨 급한 일인데!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여기 공항이야. 혜영이가 캐나다로 이민 가거든.
“캐, 캐나다? 게다가 이민씩이나… 거기는 뭐 하러…….”
동빈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뜬금없이 이민이라니? 전혀 뜻밖의 사건이라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 싶대… 우리도 많이 말렸는데 한국에서는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야!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혜영이 바꿔줘. 내가 한번 말해볼게.”
미안, 직접 통화는 하고 싶지 않대… 마음 약해진다고…….
“그, 그럼… 언제 다시 돌아오는 거야? 혜영이가 올 때까지 극장표 끊어놓고 기다린다고 전해줘.”
‘오, 오빠, 미쳤어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선아는 기가 막혔다. 캐나다에서 언제 올 줄 알고 극장표를 예매한단 말인가? 통화를 하는 수진도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수, 수진아, 내 말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어. 그런데 동빈아… 이민이잖아. 아주 오래 걸릴 거야.
“평생 거기에 있을 건 아니잖아. 언젠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어? 안 그래?”
글쎄, 나도 궁금하다. 언제쯤 혜영이 상처가 아물까… 혜영이 머리가 예전처럼 길게 찰랑거릴 때쯤이면 괜찮을까? 언제 봐도 참 길고 예뻤는데, 다른 애들이…….
“그, 그래…….”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할 것 같았다. 머리를 기르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보였던 혜영의 반응이 떠올랐다.
혜영이를 원망하지 말고 이해해줘. 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이 있잖아? 그래 줄 수 있지?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렇게 학교생활이 힘들었대? 나도 왕따지만 잘 다니고 있잖아. 어차피 학교를 평생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동빈아, 누구나 너 같을 수는 없어. 자세한 것은 돌아가서 말해줄게. 그리고 혜영이가 전해달래. 영화 같이 못 봐서 미안하다고…….
“…….”
미, 미안. 끊어야겠다. 지금 탑승 수속을 밟아야 하거든.
딸깍.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러나 동빈은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젠장… 미안할 짓을 왜 하는 거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휴대폰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나간 표정이다. 누가 봐도 건드리면 폭발할 분위기가 흘렀는데…….
“오, 오빠… 영화 안 봐요? 상영 시간 거의 다 됐는데…….”
선아는 동빈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럴 때는 그냥 사라져주는 게 예의였지만… 그래도 동빈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어디인가. 선아도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난 영화 볼 기분이 아니거든.”
“영화 표 아깝잖아요. 게다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그런 얼굴로 집에 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그래… 전쟁 영화라… 마침… 잘됐네.”
“오, 오빠, 같이 가요.”
마음이 변했는가? 동빈이 성큼성큼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선아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조심스럽던 선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부탁인데, 영화 보면서 떠들지 마.”
“물론이지요.”
“행여나…….”
동빈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예전처럼 이상하게 이루어진 꿈으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