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결전의 때가 왔다. 동빈은 현관 앞의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요즘은 주철이 놈이 너무 고맙단 말이야. 맞아, 솔직히 내가 입었던 옷은 조금 촌스러웠지.”
수많은 군복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가장 즐겨 입었던 옷이라 포근한 느낌이었다.
“설마, 진짜 군인처럼 보이지는 않겠지?”
동빈은 얼룩무늬 바지에 하얀 티를 기본으로 삼았다. 국방색 조끼로 마무리하여 깔끔함을 유지했다. 특별히 제작된 군복이라 패션 용으로 보이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추가적인 이점도 찾을 수 있었다. 조끼는 방탄 기능을 갖추었고 바지는 웬만한 칼날도 이겨낼 만큼 질겼다. 물론, 일반 사회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는 기능이었다.
“잠깐, 교관님과 만나면 안 되는데…….”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한 가지가 영 마음에 걸렸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 비록 보는 영화가 다르다고 해도 마주칠 가능성은 높았다.
“그래!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교관님도 나를 피하는 입장이고 말이야.”
동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니던가. 괜히 부정 타면 안 된다는 조심스런 마음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전투화는 무엇으로 고를까…….”
동빈은 신발장을 열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신발이 있었던가! 생각의 변화가 삶의 질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덜컹.
들뜬 기분 때문인지, 철문 닫히는 소리까지도 기분 좋은 음악 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대문을 나온 동빈은 시계부터 확인했다.
스윽.
“늦지는 않았지? 아니, 너무 이른가?”
정확히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철이 집에 들러 극장표를 받아 가도 넉넉한 시간이었다.
“어디… 본격적으로 출발해볼까!”
동빈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주변을 살필 것도 없이 큰길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여유가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실없이 웃는 얼굴이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 증명해주었는데… 그때였다.
“너, 너, 너, 너는 뭐야?”
뜻밖의 장애물이 출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동빈은 화들짝 놀라며 몸까지 사리는 반응을 보였다.
“오빠는 엄청 잘사네요? 집이 엄청 커요?”
“집이 큰 게 무슨 상관이야. 넌 왜 나타났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불량소녀. 장애물도 이런 장애물이 없었다. 가장 만나기 싫은 시점에서 보았으니 더욱 문제였다.
“길도 못 지나가요? 제 친구가 이 근처에 살아요.”
“그럼 빨리 지나가.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근데, 오빠 군대 가요? 왜 군복을 입고 그래요?”
“밀리터리룩!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잖아.”
“그거 한물간 지가 언젠데요. 게다가 군복 바지에 줄은 왜 잡았어요? 청바지 같은 데 줄 잡는 것 봤어요?”
“네가 뭘 모르는데, 원래 군복은 줄 잡는 거야.”
“잡아도 그렇게 빳빳하게 잡을 필요는 없잖아요? 정말 촌티 나게 시리…….”
“촌티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줄 잡아!”
얼마나 신경 써서 꾸민 패션인데 이런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특히 바지의 줄을 잡기 위해 엄청 공을 들였다. 특수한 천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만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오빠는요, 단정하게 입는 게 훨씬 어울려요.”
“내가 뭘 입든 무슨 상관이야. 너나 똑바로 입으란 말이야. 체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윗옷은 왜 그리 작아?”
“좋아요, 옷 크게 입을 테니 그 언니 만나지 마요.”
“싫어! 그냥 꽉꽉 끼게 입어!”
정말 막무가내인 선아였고 당연히 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혜영을 만나지 말라는 조건을 붙이는 게 싫었다.
“그렇게 화내지 마요.”
“내가 화 안 내게 생겼어? 도대체 너는 개념이 있는 거야?”
“좋아요. 그럼 우리 협상해요.”
“협상?”
동빈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선아가 양보하는 뜻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협상요. 의견이 맞지 않으니 대화로 해결해야지요.”
“글쎄…….”
협상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협상의 대상이 미덥지 못하기에 주저하는 것이다.
“오빠가 손해날 건 없어요. 그 언니 만나는 거 봐줄게요.”
“야! 누가 누굴 봐준다는 거야? 하여간 그래서?”
순간적으로 욱했던 동빈은 급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오빠가 그 언니를 자유롭게 만나는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부탁이 뭔데?”
“저도 따라갈게요. 귀찮게 않고 조용히 따라만 다닐 거예요.”
“싫어! 그런 협상 필요 없어!”
동빈이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이처럼 불평등한 협상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누가 봐도 동빈에게만 불리한 조건이었다.
“뭐가 문제예요? 방해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따라만 다닌다고요.”
“니가 왜 날 따라다녀? 혜영이가 물으면 대체 뭐라고 하냐고!”
“여동생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너무 간단하네.”
“뭐가 간단해. 너랑 나랑 닮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냐?”
“걱정 마요. 그럴 때는 이복동생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예요.”
“야! 그따위 변명을 혜영이가 믿을 것 같아?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대꾸할 가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대화를 거부했어야 옳았다.
“비켜! 나 갈 거야.”
“못 가요.”
동빈은 화를 억누르고 자신의 길을 가려 했지만 선아가 막아섰다. 잔뜩 부릅뜬 눈이 꽤나 매서워 보였다.
“뭐야? 나 장난칠 시간 없거든!”
“오빠, 그냥 떠나면… 진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예요.”
“요것 봐라? 협상이 안 되니까 이젠 협박으로 나오는 거야?”
동빈은 선아를 노려보았다. 장군의 명령이 없었다면 꿀밤이라도 몇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약한 소녀에게 어찌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오늘까지는 참겠는데,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알았어?”
“싫어요. 날 버리면 정말 정말 골치 아플 거예요.”
“널 보는 것이 더 골치 아파!”
“난 그런 거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야! 어딜 잡아! 안 놔! 남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선아가 팔까지 잡고 매달리자 동빈은 기겁을 했다. 졸지에 매정한 남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팔 놓으면 도망칠 거잖아요. 오빠는 열라 빨라서…….”
“정말 미치겠네…….”
선아는 무당의 딸이란 말인가? 마지막 작전이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선아와 함께 가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상황이었다.
“오빠 같이 가요. 네? 정말 귀찮게 안 할게요.”
“에이… 씨! 난 싫어!”
“오빠∼.”
동빈은 선아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내달렸다. 최선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속력을 높여서 달렸기에 벌써 선아의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좋아요. 이렇게 나왔단 말이지요.”
선아는 동빈이 사라진 길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꽉 다문 입술로 보아 단단히 삐쳤다는 표정이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응, 나야.”
통화가 연결되자 선아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내가 시킨 대로 진행해. 괜찮아. 내가 다 책임질게.”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가? 통화를 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동빈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렀다.
“걱정 마. 너만 믿고 끊는다.”
딸깍.
“동빈 오빠. 누가 이기나 보자고요.”
통화를 마친 선아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감이 넘친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띵띵띵띵띵, 띵띵띵띵띵.
선아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기 전에 벨 소리가 울렸다.
선아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수영아.”
“벌써 버스를 탔다고? 빠르긴 엄청 빨라…….”
통화 내용이 수상하다. 선아는 동빈이 도망치는 사태를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 계속 따라가. 몇 번 버스 탔다고? 알았어, 수고.”
딸깍!
선아는 기분이 좋은지 세차게 홀더를 닫았다.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표정이었다.
빙글빙글.
“오빠는 제 안테나를 벗어나지 못해요.”
선아는 핸드폰을 빙빙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게 다 오빠를 위해서예요. 그 언니가 얼마나 이상한데요. 자살하려고 약까지 먹은 적이 있단 말이에요. 나중에 저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에요.”
동빈은 부리나케 뛰어간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너무나 한가로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