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224)

달빛이 무척이나 밝게 느껴지는 밤.

동빈은 심각한 얼굴로 마당을 서성였다. 좁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행동이, 그의 초초한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런 달밤에 보자고 했서야?”

송 교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동빈은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동빈의 얼굴은 바싹 굳어있었다.

“뭐가 그리 심각하네? 날래 말을 하라우.”

“저기… 교관님, 극장표 말입니다. 제 책상 위에 있던…….”

“아! 그거. 요즘 유행하는 영화 맞디? 참 고맙게 쓰갔어.”

“…….”

어렵사리 말을 꺼냈건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동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고? 나 주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냐?”

동빈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송 교관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만 동빈도 절실히 극장표가 필요한 입장이었다.

“네… 제가 보러 가려고 끊어놓은 겁니다.”

“쯧쯧쯧. 극장은 말이야, 남녀가 함께 가야 의미가 있는 기야. 동빈이 너는 나중에 가라우. 시험도 끝났으니 시간도 많지 않네?”

“여, 여자 친구와 함께 갈 겁니다.”

“……!”

송 교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직은 노환으로 귀가 잘못될 정도는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극장표를 다시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다. 이미 원장 선생님과 약속을 했기에… 어쨌든 여자 친구 사귄 거는 축하한다. 그런데 장군님은 알고 계시나? 아직 학교생활에 적응도 못 했는데 말이디?”

협박성 발언이었다. 장군님께 말하지 않을 테니, 이번만은 양보하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대한민국의 학생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장군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야! 그러지 말고 양보하라우.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예매를 하지 않네? 딴 거 보라우.”

송 교관의 사투리가 점점 심해졌다. 조금씩 흥분한다는 증거였다.

“제가 예매한 영화는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남녀 간의 영원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린 수작입니다. 인터넷으로 확인했지만 이미 매진된 상태입니다.”

동빈도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헛고생으로 끝나 버렸다. 그렇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송 교관과 담판을 지으려는 것이다.

“극장이 서울에 하나뿐이간? 잘 찾아보라우.”

“저 혼자라면 제주도도 상관없지만 여자 친구가 문제입니다. 적당한 거리와 알맞은 시간대를 고려하면, 제가 예매를 했던 극장만큼 합리적인 곳은 없습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까짓 극장표가 뭐라고, 스승과 제자가 심각하게 대치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럼 다른 영화 보라우. 요즘 재미있는 거 많지 않네?”

“적당한 거리에 떨어진 극장은 모두 세 곳입니다. 불행히도 다른 영화도 전부 매진입니다. 그날만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비디오방 가라우. 다 늙은 내가 비디오방 갈 수는 없지 않네?”

절실하기는 송 교관도 마찬가지였다.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눈총까지 무릅쓰며 만들어낸 기회였다. 동빈의 간절한 마음은 잘 알지만, 양보를 못 하는 그의 심정 또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디오방은 제 여자 친구가 싫어할 것입니다. 이번 한 번만 양보해주시면… 아니, 제 극장표를 다시 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일이 바로 약속 날이라 시간이 없습니다.”

“동빈아, 극장표 가지고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쓰갔네?”

“저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빈이, 네가 양보한 것으로 믿고 먼저 들어가겠서야. 10년 만에 영화를 본다니 마음이 설레서 말이야.”

“교, 교관님…….”

동빈은 스승과 제자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멀어지는 송 교관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신세였다.

“휴우… 결국 주철이가 마지막 희망이란 말인가!”

송 교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동빈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최후의 방어선이 남아있다는 행동이었다.

뚜우∼.

동빈은 주저 없이 단축키를 눌러서 주철과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음이 길게 이어지자 초초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밝아 환하게 보였지만 벌써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여, 여보세요. 주철이냐?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거기 어디야? 왜 이리 시끄러워?”

어디긴 나이트지. 그런데 이 시간엔 웬일이야?

통화가 되어 다행이었다. 주철이가 늦게까지 나이트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내가 오죽했으면 이런 시간에 전화했겠냐? 제발 나 좀 살려다오. 응?”

친구를 죽게 할 수는 없지. 대체 뭔지나 들어보자.

“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너도 영화표 예매했잖아. 그 표를 말이야. 나, 나에게 줄 수 있을까?”

뭐야? 너는 전쟁 영화는 싫어한다고 했잖아.

“정말 어쩔 수 없게 됐다. 제발 부탁이다.”

시간과 장소는 절대 바꿀 수 없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전쟁 영화면 어떤가? 지금은 이것도 없어서 못 구하는 형편이었다.

별것도 아니네? 고작 그런 일로 전화한 거야? 내일 우리 집에 잠시 들러. 내 거 줄게.

“고, 고맙다. 친구야!”

동빈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철이 이렇듯 흔쾌히 부탁을 들어줄 것은 예상치 못했다.

동빈아, 너무 고마워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고맙지. 그리고 네 여자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중에 내가 더 재미있는 거 보여준다고 말이야.”

괜찮아. 이제는 슬슬 바꿀 때가 됐지. 내가 여자랑 극장 가는 건 만나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이야. 같이는 놀아줘야 되는데 신경 쓰기 귀찮고… 그런 장소로 극장이 딱이거든!

“그래! 어쨌든 고맙다. 내일 보자.”

너무 일찍 오지는 마라. 오늘은 늦게까지 놀 거야.

“알았어. 신나게 놀고 푹 자라.”

딸깍.

동빈은 전화를 끊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못마땅했던 주철의 행동이 계속 도움이 될 줄이야… 사람의 앞날은 진짜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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