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 피아노 학원.동빈이 레슨을 받는 장소였다. 부반장인 오유나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이 동네에서는 꽤나 유명한 피아노 학원이었다.
따라랑 따라랑 따라라라랑.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연주자는 김동빈. 음대에 들어간다는 포부답게 상당한 수준의 실력이었다.
“됐다, 동빈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알겠습니다.”
정 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동빈은 연주를 중단했다. 조금은 이른 감이 없지 않은 시간이었다.
‘원장님께서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
동빈은 뭔가를 주저하는 원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매우 자상한 성격이었다. 입을 열까 말까 주저하는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원장님? 제 연주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문제는 무슨… 아주 훌륭한 연주였어. 처음에는 동빈 학생의 손이 너무 거칠어서 걱정했는데… 요즘은 많이 발전하고 있어서 안심이야.”
“그럼, 다른 문제가 있나요? 말씀해주십시오.”
“저기… 레슨 비 때문인데…….”
“레슨 비요?”
동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슨 비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아니, 기한도 되기 전에 미리 전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요번 달에 밀렸습니까? 조금 기한이 남은 것도 같은데…….”
“레슨 비가 밀린 건 아니야.”
“그럼, 레슨 비를 올려달라는 말씀입니까?”
“무슨 소리야? 아무런 이유 없이 레슨 비를 올릴 수는 없지.”
도대체 그럼 뭐란 말인가? 분명 원장은 레슨 비란 명목으로 입을 열지 않았던가? 동빈이 다시 반문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르륵.
낡은 문소리와 함께 하얀 양복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등장했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체구는 당당했다.
“교, 교관님… 아니, 아저씨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밖에서 송 교관을 부를 땐 아저씨란 호칭을 사용했다. 교관이란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할아버지로 부르기도 했지만 송 교관의 강력한 거부에 아저씨로 정정했다.
“동빈이 너, 아직 안 갔네?”
질문은 동빈이 했건만 오히려 송 교관이 반문했다. 빨리 가라는 뜻도 포함된 목소리였다.
“지금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빨리 가라우. 아이고! 예쁜 원장님, 안녕하셨습니까? 동빈이 레슨 비 낼 날이 가까이 됐지요?”
송 교관의 행동이 수상하다. 동빈하고 원장하고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다. 물론, 학원 원장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서 오세요. 번번이 직접 오시네요. 그냥 통장으로 부쳐주셔도 되는데…….”
“제 자식과 다름없는 동빈이를 가르쳐주시는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당연히 직접 와야지요.”
“동빈이를 시켜도 상관없습니다.”
“동빈이 저놈을 어찌 믿습니까?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제야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피아노 학원 원장은 미망인이었다. 부반장인 유나와 그의 오빠를 혼자 키운 사실은 동빈도 잘 알고 있었다. 군복이나 한복을 주로 입는 송 교관이 양복을 차려입은 것도 의심쩍은 행동이었다.
“목이 컬컬한데 커피 있습니까? 그 있잖습니까? 원장 선생님께서 주로 마시는…….”
“네, 잠시 이쪽으로 오십시오.”
‘교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교관님은 커피 싫어하잖아요!’
난처한 것은 동빈이었다. 원장이 왜 레슨 비를 언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억지로 미소를 짓는 원장의 얼굴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동빈아, 뭐 하네? 날래 집에 가라우!”
“네, 아저씨…….”
원장은 마지못해 커피를 탔고, 손님용 탁자에 앉은 송 교관은 동빈을 향해 어서 가라 손짓했다.
“원장 선생님이 저놈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송 교관은 최대한 사투리를 억제했다. 그러나 완벽히 말투까지 고칠 수 없으니 조금 요상하게 들렸다.
“아니요. 동빈 학생처럼 착한 아이가 어디 있겠어요.”
“착하긴요. 저놈이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말입니다, 제가 가끔 찾아와야 저놈이 얌전해집니다.”
송 교관은 동빈을 미끼로 원장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동빈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반항할 위치가 아니었다.
“여기, 커피 여기 있습니다.”
“허허허. 정말 커피가 진국입니다.”
송 교관은 원장이 내민 커피를 보고는 탄성부터 질렀다.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 동빈까지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후룩.
송 교관은 지체 없이 한 모금 들이켰다.
“맛도 끝내줍니다. 한 잔 더 주십시오.”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럼 제가 다 마시면 다시 한 잔 주십시오.”
“…….”
노골적인 접근이 확실했다. 동빈이가 있는데도 이 정도라면 원장의 고충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동빈이 너 아직도 안 갔네? 날래날래 움직이라우!”
“가, 갑니다.”
동빈은 서둘러 피아노 학원을 나섰다.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바람난 것이 분명했다.
“원장 선생님, 제가 극장표를 얻었는데 말입니다. 일요일에 시간 되시면…….”
“그, 극장표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허허허. 동빈이 저놈이 주더군요. 제가 같이 갈 사람이 있다고… 이런 것을 선물하니… 정성이 고마워 안 갈 수도 없고… 허허허!”
‘헉! 내 극장표! 분명 책상 위에 올려두었는데?’
김동빈 최대의 위기다.
이틀 뒤면 일요일. 표를 다시 끊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