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간. 단발머리 혜영은 빌라 옥상에 앉아있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지 멍하니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다.
“혜영아, 안녕?”
“어머나! 도, 동빈아… 어, 어떻게 여기를 올라왔어? 옥상 문이 잠겨있을 텐데?”
갑작스런 동빈의 출연에 혜영은 당황했다. 이곳은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문까지 잠갔는데, 어떻게 올라올 수 있단 말인가?
“몰랐구나. 침투는 내 전공이거든. 그만 놀라고 이거나 받아.”
불쑥.
동빈은 마술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을 뻗자 빨간 장미꽃이 튀어나왔다. 실력이 점점 늘고 있었다.
“고, 고마워…….”
“고맙기는 뭐… 수진이한테 전화하니까 여기에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오늘도 학교 안 간 거야?”
“응… 그런데 동빈이 너는? 너도 학교 안 갔어?”
“아니, 체육 선생님이 어디 좀 가자고 해서 일찍 조퇴를 했어. 종합 운동장에 갔는데 갑자기 쓰러지셔서 일찍 끝났지 뭐.”
“선생님이 쓰러지셨으면 병실을 지켜봐야지, 왜 여기는 온 거야?”
“몰라. 의사 선생님이 그냥 가래. 나를 보면 체육 선생님이 더 흥분하신다고…….”
동빈은 체육 선생이 쓰러진 진짜 이유를 몰랐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 혜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체육 선생님 덕분에 얼굴 보게 된 거네?”
“아마도 그런 셈이지?”
“고마워.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녀도 불쌍한 체육 선생의 사연을 몰랐다. 알았다면 저런 표정이 나올 리 없었다. 동빈을 보게 되어 정말 기쁘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우와! 여기는 경치가 무척 좋다. 어라? 의자도 있네?”
동빈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혜영의 눈빛을 외면했다. 싫어서 피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이 익숙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때문에 그런데, 예전에는 훨씬 좋았어. 그리고… 장미꽃… 정말 고마워.”
“고맙기는… 시장에서 천 원 하는데 뭘…….”
들어간 비용에 비해서 효과가 매우 좋았다. 이 정도 반응까지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 기분이 더욱 좋았다.
“동빈아, 학교생활은 괜찮아?”
“물론이지. 날 괴롭히던 정한수 놈이 입원했잖아. 이젠 도망칠 필요가 없어졌지. 중간고사 성적도 괜찮게 나온 것 같고… 또…….”
“또? 그리고 뭐?”
혜영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동빈이가 마지막 말을 얼버무렸기 때문이다.
‘우와! 미치겠다. 여자 친구 생겼잖아. 바로 너! 이 말이 안 나오네…….’
고백을 하려 노력은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냥 속으로만 외치고 말았다.
‘용기가 없는 걸까?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는 거야?’
마음은 답답한데 기분은 좋았다. 계속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여자 친구라는 존재만 생각해도 좋은 것인가? 아니면, 무안함을 달래려는 반사적인 행동?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 동빈의 마음이었다.
“동빈아, 왜 그렇게 웃기만 하는 거야?”
“아,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냥 뭐, 다 좋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그리고 또…….”
“또 그리고 뭐?”
“…….”
동빈은 또다시 말을 끓었다.
“동빈이 너… 나 놀리는 데 재미 들린 것 같…….”
이제 답답한 쪽은 혜영이었다. 동빈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 판단했는지 삐친 척하려 했는데…….
“혜영이 너도 좋아.”
“……!”
동빈은 결국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전했다. 물론 효과는 확실했다. 금방 얼굴이 붉어지는 혜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하기를 잘했다. 그래 잘한 거야. 내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 혜영이도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주철이가 말했는데… 그놈의 말을 너무 믿었나……?’
혜영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동빈의 마음은 초초해졌다. 긍정적인 반응인지 부정적인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서로 무안한 시간만 흐르는 상황이었는데…….
“나도 동빈이를 많이 좋아해.”
‘우와! 성공이다. 주철아, 고맙다!’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벅찬 기쁨이 밀려왔다. 생전에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예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좋아! 오늘은 아주 특별한 마술을 보여줄게!”
“또 준비한 마술이 있어?”
보너스인가? 장미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혜영은 동빈이가 진짜 마술사가 아닌지 궁금해졌다.
“잘 봐…….”
동빈은 손가락을 쫙 펴서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시켰다. 이번에는 뭘까? 혜영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스윽스윽.
동빈의 손은 이리저리 움직였다.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빙빙 돌리기도 하면서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동빈의 손을 따라가는 혜영의 눈동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짜잔!”
동빈의 손에서 튀어나온 것이 특이했다. 동전도 아니고 꽃도 아니었다. 자그만 종이처럼 보였다.
“그게 뭐야?”
“내가 말하면 재미없지. 뭔지 맞혀봐. 저번에 말한 적도 있으니까 잘 기억해봐.”
혜영은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입장권 같은데, 동빈이 요리조리 움직여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놀이동산?”
“아니, 다른 거.”
“야구장 가자고? 아니면 축구…….”
“…….”
괜히 맞혀보라 했나 보다. 혜영이 정답을 찾지 못하자 분위기가 점점 다운되었다.
“너무 어려웠나?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내가 여자 친구 생기면 뭘 가장 하고 싶었는지 물어봤잖아.”
동빈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혜영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미안, 그런데 극장은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되지, 왜…….”
“무슨 소리! 중요한 건 직접 해야 하는 거야. 함께 갈 거지?”
“당연히 가야지. 그런데 날짜가 언젠데?”
“얼마 안 남았어. 이번 주 일요일.”
“이번 일요일…….”
동빈이 착각한 것인가? 일요일이란 말에 혜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워낙 이런 일이 많기에 그리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왜, 다른 얘들과 약속 있어?”
“아니야. 같이 가자. 나도 극장 간 지 꽤 됐어.”
“고맙다, 혜영아. 그리고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아니야. 동빈이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엄청 덜렁거려서 잘 잃어버린단 말이야.”
“그래. 너는 늦지 말고 몸만 나와.”
동빈은 마냥 기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던가!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기도하기를 잘했다.’
고기 먹고 싶다는 소원 이후로 소원을 빌지 않았다. 들어주긴 하는데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들어주는 것이 싫었다. 다시 속는 셈치고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잘될 모양이다.
‘설마 이번에도 그러지는 않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버렸다. 극장 가는데 벌어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은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