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24)

수용 능력 2만 명을 넘는다는 주 경기장의 위용은 대단했다. 잘 가꾸어진 초록 잔디는 붉은 트랙과 매우 잘 어울렸다. 열심히 뛰고 달리는 학생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구경 온 사람들이 이렇게 없어서야…….”

전체적인 풍경을 살피던 체육 선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텅 빈 관중석이 문제였다. 아무리 연습이라도 이처럼 썰렁할 수 없었다.

“이게 누구야? 명성고 심 선생 아니야!”

누군가 체육 선생을 보고 알은척을 했다. 회색 트레이닝 복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였다.

“오랜만이야. 김 선생도 잘 있었어?”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거지. 그나저나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상당한 친분이 있는 관계인 모양이었다. 괜한 인사치레가 아니고 정말 반갑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겠나? 애들 연습시키러 왔지.”

“무슨 소리야? 명성고에는 육상부가 없잖아.”

“아주 좋은 재목을 발견해서 말이야. 시험 삼아 뛰게 해보려고… 마침 잘됐군. 그러지 않아도 자네를 찾으려 했는데.”

“뭐야, 선수 등록 못 한 걸 봐달라는 뜻인가?”

“내가 이래서 김 선생을 좋아한다니까. 우린 통하는 게 너무 많아. 오랜만에 만났으니 끝나고 술 한잔 하자고.”

“…….”

체육 선생은 당연한 요구인 듯 말했지만 김 선생은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된다, 안 된다,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 선생, 왜 이래?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능력이야 되지. 아니, 자네의 부탁이면 목숨 걸고 들어줘야겠지. 그러나 가능성이 별로 없는 학생이면 곤란해. 자네의 안목을 믿긴 하겠지만…….”

뛰어난 육상 인재를 발견하면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나 이상한 애가 나와 망신을 당하면 김 선생의 입지도 난처하다는 뜻이었다.

“김 선생도 보면 놀랄걸. 하늘이 내려준 체격이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그렇게 뛰어난 학생이 왜 육상을 하려 들겠어? 혹시 자네가 억지로 끌고 온 거 아니야? 선수 등록도 안 한 것이 수상하고 말이야.”

육상 발전을 저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재의 유출이었다. 괜찮다 싶으면 다른 인기 종목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그놈은 육상을 무척 좋아하는 놈이야.”

“좋아하는 것과 현실은 또 다르지. 인기도 없고 돈도 안 되는 육상을 누가 하겠나? 그건 자네가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그놈이 얼마나 뛰는 것을 좋아하는지 말해줄까?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을 뛰어다녀. 그것도 애들을 줄줄이 달고 말이야.”

“그 정도나?”

체육 선생은 완벽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건 동빈이가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장면이었다. 그렇기에 말리지 않은 것인가? 체육 선생은 동빈이 쫓기는 장면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곤 했었다.

“하여간 기록만 잴 수 있게 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께.”

“다시는 제자 안 키운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말이야. 예전처럼 후회나 말게나. 심 선생, 자네가 선택한 일이야.”

제자의 실력이 모자라면 실망이 클 것이고, 좋은 재목을 발견해도 고민이었다. 육상인의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고마워. 오늘은 진짜 술 한잔 쏜다!”

“어쭈! 안 들어주면 안 쐈다는 소리잖아?”

거북한 문제가 해결되자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장난삼아 툭툭 치면서 못 다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김 선생, 이제 그만 좀…….”

“뭐가 그만이야. 내가 심 선생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고… 지, 진짜 그만! 도, 동빈이가 보고 있다고!”

열심히 장난을 치던 체육 선생이 주춤했다. 제자 앞에서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동빈이?”

“내가 방금 부탁한 학생 말이야.”

“잘됐군.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이나 해볼까?”

“여부가 있겠나. 대신, 놀랄 준비는 미리 하시지?”

체육 선생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김 선생의 호기심을 잔뜩 부추겼다. 김 선생은 얼마나 잘났는지 직접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는데…….

“……!”

김 선생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끼고 있던 선글라스까지 벗고 동빈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끄덕끄덕.

김 선생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재목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바삭바삭.

육상복으로 갈아입은 동빈이 걸어왔다. 주변의 시선이 만만치 않은지 조금은 멋쩍은 표정이었다. 민소매 상의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상태라 잘 발달된 근육을 볼 수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상위 랭크의 외국 단거리 선수들과 비슷했다.

“동빈아, 인사드려라. 한양 체고의 김원석 선생님이다.”

“안녕하십니다, 명성등학교 김동빈입니다.

“그래그래.”

동빈을 가까이서 대하는 김 선생의 눈길이 수상하다. 진귀한 보물이라도 감정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올해 몇 학년이지?”

“2학년입니다.”

“신장은 몇인가?”

“187입니다.”

“아주 좋아! 그래, 몸무게는?”

“85kg…….”

김 선생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또박또박 대답하던 동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간단한 인사 수준이 아니라 당황하는 것이었다.

“발달된 근육을 보니 운동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전에 육상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닙니다. 그냥 산이나 달리는 수준이었습니다.”

“혹시 말이야. 농구나 축구, 야구, 배구 등의 코치들이 꼬시지 않던가?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좋으니 한번 해보자고 말이야.”

“제가 외국에서 학교를 다녀서 말입니다. 그런 운동은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혼자 공 차고 놀고…….”

“그럼 특별히 배운 운동은 없다는 건가?”

김 선생의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동빈의 대답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사…격하고 격투기 쪽을 조금… 지금은 취미로 격투기만 연습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남다르다 했어. 꾸준히 운동을 했다니 정말 다행이야.”

‘체육 선생님, 제발 말려주세요. 너무 부담스러워요.’

언제까지 질문을 받아야 하는가? 동빈은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크윽! 체육 선생님 표정도 부담스럽다.’

흐뭇한 미소만 짓는 체육 선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쫓겨서 운동장을 달릴 때, 창문 너머 지켜보던 모습과 흡사했다.

“동빈 학생, 공부는 잘하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지?”

“어허! 이 사람, 왜 그런 것까지 묻나?”

동빈의 애처로운 눈빛 호소가 통했는가? 마침내 한발 물러나 있던 체육 선생이 나섰다.

“미안하네.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이제 질문은 그만 하는 게 좋겠어. 동빈이도 몸을 풀어야 하니까.”

“할 수 없지… 대신 연습 끝나고 동빈 학생과 잠시 이야기 좀 해도 괜찮을까?”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체육 선생님!’

마침내 부담스런 대화가 끝이 날 모양이었다. 김 선생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자 동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 하냐? 동빈이 너는 저쪽에서 몸을 풀어라.”

“네! 알겠습니다.”

동빈은 활기찬 음성과 함께 자리를 떴다. 홀가분한 마음 때문인지 잔뜩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몸 풀고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100m 트랙으로 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동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학생들이 몸을 풀고 있는 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다시는 질문 공세에 시달리지 않겠다는 확고한 뜻이었지만, 체육 선생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하하하. 저렇게 좋을까!”

“뛰는 것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야. 정말 예전의 자네를 보는 것 같아. 나도 괜히 기분이 좋은걸.”

“이런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쁘겠나. 나도 처음 트랙을 밟을 때 얼마나 좋아서 난리를 쳤었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야.”

착각도 전염이 되는가? 김 선생도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동빈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런 미소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육상 선수들이 주 경기장을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목적은 프로 축구 경기장이었고 나머지는 기업체 행사로 이용되었다. 가끔 육상 대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육상 연습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늘처럼 특별한 경우였다.

“1조 선수, 위치로!”

100m 기록 측정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진행 요원의 외침이 들리자 트랙에서 몸을 풀던 학생들은 스타트라인에 정렬했다.

“동빈 학생의 100m 기록은 얼만가?”

“비밀…….”

체육 선생과 김 선생은 피니시 지점에 위치한 기록실에 있었다. 출발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동빈이 뛰는 모습은 1조 경기가 끝나야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답답해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래. 동빈이가 트랙에서 뛰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렇다면 할 말 없고.”

김 선생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일반 운동장과 트랙에서 뛰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라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었다. 그만큼 체육 선생이 신중함을 보인다는 뜻이기에 김 선생이 조용해진 것이었다.

타앙!

출발 신호가 울렸다. 체육 선생과 김 선생도 이제야 뛰는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자 최선을 다해서 뛰어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출한 재목은 보이지 않는군.”

체육 선생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열심히 달리지만 박차고 나오는 선수가 없었다. 모두 고만고만한 실력이라 실망했다는 뜻이었다.

“너무 걱정 말게. 괜찮은 애들은 모두 2조로 편성했으니까.”

“……!”

김 선생의 반격에 체육 선생은 할 말을 잃었다. 2조라면 분명 동빈이 속해있는 조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만큼 김 선생도 기대하는 것이 많다는 뜻인가?

후우웅.

바람을 가르며 학생들이 피니시를 통과했다. 실력 차이가 별로 없기에 한꺼번에 우르르 지나치는 장면이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동빈이는 트랙이 처음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체육 선생은 김 선생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기분이 상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글쎄, 내가 너무 앞질러 생각했나? 자네도 이것을 원할 것이라 생각했지.”

“처음은 뭐든지 어렵지. 괜히 동빈이를 위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제자의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체육 선생이 원했던 것은 동빈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좋은 기록은 좋은 경쟁자들이 있어야 가능하지. 평소에 자네가 즐겨 쓰는 말이 아니었나? 제자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소심해졌어.”

“소심이 아니라 조심하는 거야.”

“자네와 내가 잘 통했던 것은 육상을 보는 눈이 비슷했기 때문이지. 얼굴 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두고 보자고. 어허, 인상 좀 펴라니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는데… 어쨌든 기분 나빴어.”

김 선생은 웃으며 매달렸지만 체육 선생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호탕한 성격답지 않게 단단히 삐친 행동이었다.

“2조 선수 위치로!”

진행 요원의 외침과 함께 체육 선생과 김 선생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스타트라인에 다가서는 동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빈 학생의 신장이 가장 크군.”

멀리서 보아도 신장의 차이는 뚜렷했다. 다부진 체형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어떤 선수가 가장 기록이 좋아?”

“3번하고 5번 레인. 특히 5번 레인은 현 고등부 기록 보유자야.”

“점점… 잘하는 짓이다.”

동빈은 4번 레인에 위치했다. 양옆의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선수, 제자리에!”

진행 요원의 목소리에 2조 선수들은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크라우칭스타트. 단거리에서 쓰는 출발 방식이었다.

동빈은 스타팅블록starting block에 양발을 갖다 붙였다. 두 손은 양어깨 사이 너비보다 조금 넓게 잡았고, 뒷다리의 무릎을 굽혀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여 자세를 고정시켰다.

“출발 자세는 제대로 가르쳤군.”

“이봐, 기본도 안 가르치고 온 것 같은가?”

동빈은 기본에 매우 충실한 자세를 따랐다. 어떤 동작을 해도 자세가 나오는 타입이라 안정감이 느껴졌다.

“차렷!”

출발선을 담당하는 진행 요원이 신호총을 치켜들었다.

스윽.

동빈은 엉덩이를 들어 올려 지면과 평행한 자세를 취했다. 땅을 짚은 양손과 앞다리 쪽에 체중을 이동시키는 과정이었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채비로 들어선 것이다.

“잘 뛰겠지?”

“말 시키지 말게.”

100m의 가장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체육 선생의 눈은 스타트 라인에 고정되었다. 단거리의 스타트는 기록 단축과 바로 직결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타앙!

우렁찬 총소리와 함께 8명의 선수들은 일시에 뛰쳐나갔다. 지면을 박차는 다리의 움직임과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세차게 팔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스피드가 붙기 시작했다.

“좋아!”

체육 선생은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했다. 한 고비는 넘긴 셈이다. 동빈은 뛰어난 선수들과 나란히 스타트를 끊었다.

“달려! 달려! 달려!”

본격적인 스피드가 붙기 시작하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조금씩 실력 차이가 드러났다.

“좋아∼.”

3, 4, 5레인이 선두권을 형성했다. 4번 레인의 동빈은 50m까지 뒤지지 않고 내달렸다. 세 명의 거리 차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동빈아! 뒤처지면 안 돼!”

70m를 지나면서 5번 레인이 두각을 나타냈다. 고등부의 기록 보유자답게 엄청난 속도를 유지했다. 점점 뒤쳐지는 3번과 4번 레인. 이대로 가면 동빈이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래! 뛰쳐나가!”

동빈이 뒷심을 발휘했다. 80m를 지나면서 차이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스퍼트에 따라서 승리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동빈아∼.”

후앙!

3번과 4번 레인이 거의 동시에 피니시를 했다.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피니시 지점에 있던 체육 선생도 판정을 하지 못했다.

“기록! 기록 어떻게 나왔어?”

정확한 사실은 기록이 말해줄 것이다. 체육 선생은 기록실에 있는 모니터를 주시했다.

“10. 63… 10. 64… 어떤 것이 동빈이 기록이야? 그래! 사진판독! 김 선생 사진판독 나왔어?”

체육 선생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기록이 10. 34였고 고등부는 10. 54였다. 처음 뛰고 이 정도 기록이면 상당한 것이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0.01초를 더 얻으려는 체육 선생의 의지는 대단했지만 너무 흥분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정식 대회도 아닌데 무슨 사진판독이야? 계측기 빌려 쓰는 것도 어딘데…….”

“맞다. 사진 판독이 안 되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체육 선생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쉬워했다.

“10초 6대 초반이면 대단한 기록이야. 어디서 저런 재목을 구했나! 정말 섭섭하네. 동빈 학생이 엄청난 선수인 줄 알면서 아까는 왜 그리 삐친 척한 거야?”

동빈을 기록이 좋은 조에 끼워 넣은 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여 김 선생도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자네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단단히 준비했는데, 먼저 선수 치니 억울해서 그랬지.”

“뭐, 뭐라고?”

“자네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렸네.”

체육 선생은 친구를 속인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김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 선생은 오직 동빈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난 말일세, 동빈이를 단거리를 주 종목으로 키웠으면 좋겠네. 격투기로 단련된 근육을 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글쎄…….”

김 선생은 흥분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장난을 받아주지 않은 친구가 못마땅한지 체육 선생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체격 조건을 보면 충분하고 넘칠 정도야. 순간적인 폭발력까지 겸비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해.”

“글쎄…….”

김 선생 혼자서 난리를 치는 것인가? 체육 선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을 듣고는 있나? 뭐가 자꾸만 글쎄인가? 한국 단거리 육상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일이야.”

“동빈이의 발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세계적인 선수들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꾸준히 성장해도 잘해야 동메달 정도… 최고가 될 수 없는 것이 문제지.”

체육 선생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욕심이 많아졌어. 육상 동메달이 장난으로 보이나?”

“운동을 하면서 많이 생각했지. 순간적인 파워와 스피드 그리고 뛰어난 유연성과 지구력… 서로 상반될 수도 있는 능력이 최적화된 인간의 근육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모든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몸 상태… 아마도 동빈의 신체를 두고 한 말일 거야.”

“동빈 학생을 위하는 자네의 마음은 알겠는데 말이야, 조금 과장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하겠지. 사실… 우리 동빈의 주 종목은 장거리야.”

“뭐, 뭐라고 장거리!”

김 선생은 눈까지 부릅떴다. 주 종목이 장거리라니? 전혀 뜻밖의 발언이라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허튼소리 하는 거 봤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동빈이는 육상계의 슈퍼스타가 될 거야.”

“이보게, 내가 도와주겠네. 동빈 학생이 한양 체대에 입학할 수 있도록 내가 힘써 보겠네. 물론, 전액 장학금에 해외 전지훈련까지 보장하지. 기록을 세울 때마다 보너스도 지급하겠네.”

“저, 정말인가?”

파격적인 제의에 체육 선생은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전국 대회 성적도 없이 이러한 대우를 받기는 힘들었다. 순수한 가능성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어쩌면 이런 반응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우가 너무 파격적이라 체육 선생도 놀라는 것이었다.

“물론이지! 딴 종목에서 채 가기 전에 얼른 계약하자고. 동빈 학생도 내년이면 수험생이 되지 않나? 공부에 대한 부담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야.”

“고맙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

“모두가 육상의 발전을 위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세상을 한번 깜짝 놀라게 하자고.”

체육 선생과 김 선생은 손을 부여잡고 의기를 투합했다. 육상의 발전을 위하여… 또한 체육 선생의 못 다한 꿈을 위하여…….

“아 참! 이 기쁜 소식을 당사자에게도 알려야겠지. 동빈아! 잠시 이쪽으로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숨을 고르던 동빈은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의 부름은 절대적이었다.

“동빈아, 어서 인사드려라.”

“네? 아, 아까 인사드렸는데요?”

동빈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질문이 넘쳐나던 한양 체고 선생님이 아니던가?

“이번에는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트랙에서 뛰어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어허, 그게 아니라… 김 선생께서 너의 짐을 덜어주셨다.”

“선생님… 짐이라니요?”

“기뻐해라. 너의 진로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한양 체대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정말 엄청난 소식 아니냐?”

“한양 체대요?”

“그래!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좋다고 소문난 체육대학이다. 좋은 코치도 많고 최상급 시설을 보유하고 있지. 이제부터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단 말이다.”

“죄, 죄송하지만 제가 왜 체대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동빈의 표정에는 의아함만 가득했다. 기뻐서 날뛸 거라 여겼던 체육 선생의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무, 무슨 소리야? 너도 체대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그래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 그러나 너희 담임에게 물었더니… 예체능계를 준비한다고 하던데?”

“저는 벌써 진로를 정했습니다.”

“젠장! 농구부 선생이 꼬셨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체육 선생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또다시 다른 종목에 인재를 빼앗기는 것인가! 눈까지 충혈된 상태에서 난리를 쳤는데…….

“저는 음대에 갈 겁니다. 전문 연주자가 어릴 적부터 꿈이었습니다.”

“으, 음대에 간다고……!”

제대로 충격을 받은 체육 선생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다른 운동 종목도 아니고 음대… 전혀 뜻밖의 사태인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열심히 노력하여 음대에 들어가겠습니다. 전문 연주자의 꿈을 이루어 반드시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도, 동빈아… 내, 내 꿈은 어쩌고…….”

“선생님의 꿈이라니요?”

“머, 머리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도, 동빈아… 내 꿈을… 제발…….”

비틀비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체육 선생은 휘청거리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 선생님! 괜찮으세요?”

“마, 말도 안 돼… 이놈의 음대… 다 부숴버리겠어…….”

동빈이가 서둘러 부축했지만 소용없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체육 선생은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추,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겠어.”

김 선생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체육 선생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눌렀다.

띠띠띠.

“여, 여보세요. 119죠? 네? 114라구요? 그럼 119는…….”

내색은 안 했지만 김 선생의 충격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허둥거리는 모습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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