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24)

동빈의 학교생활은 매우 순조로웠다. 만날 자신을 괴롭히던 정한수는 아직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중간고사도 잘 본 편이었고, 결정적으로 여자 친구까지 생겼다.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동빈아, 혜영이하고는 잘되고 있냐?”

“물론이지.”

“내가 잘못 들었나? 미팅 끝나고 한 번도 못 만났다며.”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동빈과 주철은 그늘진 벤치에서 쉬고 있었다. 당연히 화제는 여자 문제였다.

“혜영이가 매우 바쁘단다. 기다려줘야지.”

“내 생각에는 혜영이가 거리를 두는 눈치야. 네가 마음에 들었다면 적극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

“참 성격도 급하시네. 미팅 끝난 지 삼 일이다,삼 일!”

“넌 손해 보는 느낌 없냐? 혜영이가 착한 건 확실하지만 뭔가 확 당기는 맛은 없어. 내가 진짜로 괜찮은 여자 소개해줄까?”

“됐다. 나는 누구처럼 복잡한 여자관계는 싫거든!”

동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자가 여자를 사귄다면,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 동빈의 생각이었다. 여러 여자와 다리 걸치면서 만나는 주철과의 의식 차이는 극명했다.

“어머! 동빈이, 여기 있었구나.”

“부반장이 무슨 일이야?”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찾아다닌 것인가? 동빈의 얼굴을 보고는 반가운 미소부터 지었다.

“체육 선생님이 찾고 계셔. 오늘 약속을 했다고 하시던데?”

“맞다! 오늘이 목요일이지.”

동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자가 생겼다고 너무 들떠 지낸 것이 화근이었다. 하늘 같은 선생님과의 약속을 까먹은 것이었다.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준비해. 체육 선생님이 굉장히 서두르시는 눈치였어.”

“동빈아, 또 운동하는 거냐? 아직 수업도 끝나지 않았잖아.”

체육 선생은 동빈에게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 볼 때마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수업이 끝나면 따로 육상을 지도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밖으로 나간다고 하던데?”

“그럼 조퇴까지 하는 거야?”

“응.”

동빈도 무슨 약속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무작정 시간을 내라는 것이었고, 모든 문제는 체육 선생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들었다.

“동빈아, 서둘러.”

“아, 알았어. 주철아, 나중에 보자.”

“그래. 하여튼 잘 갔다 와라.”

유나가 다시 재촉하자 동빈은 교실을 향해 뛰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가야 했다. 선생님과의 약속은 절대 늦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부우웅.

낡은 갤로퍼 한 대가 약간 정체되는 도로를 달렸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운전이 상당히 거칠어 보였다.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더니 좌회전 차선까지 치고 들어갔다.

“서, 선생님. 운전이 너무 과격하십니다.”

“걱정 마라. 거의 다 왔다.”

갤로퍼에는 동빈과 체육 선생이 타고 있었다. 동빈은 안전벨트도 모자라 손잡이까지 꽉 쥐고 있는 상태였다.

“저 때문에 늦은 겁니까?”

“아니, 내가 터프하게 운전을 하는 스타일이라… 신호 떨어졌다. 꽉 잡아!”

끼이익.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자 체육 선생은 힘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길게 찢어지는 음향과 함께 갤로퍼가 튀어나갔다. 잠시 방심했던 동빈의 몸이 크게 휘청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십니까? 다 왔다고 하신 것 같은데…….”

“바로 저기…….”

“오늘 육상 대회라도 있습니까?”

갤로퍼가 속력을 줄이며 들어선 장소는 종합 운동장이었다. 동빈은 가끔 체육 선생이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한번쯤 육상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오늘은 대회 없다.”

“그럼 야구나 축구를…….”

“야! 어떻게 선생이 수업 빼먹고 그런 구경을 하냐? 그것도 아끼는 제자를 데리고 말이야.”

“그럼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서울 지역에 있는 육상부가 함께 연습하는 날이거든. 너도 진짜 트랙 한번 밟아봐야지.”

“예?”

동빈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습이라도 이렇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은 탐탁지 않았는데…….

“짜식! 놀란 표정하고는… 그렇게 좋으냐?”

“…….”

이 난관을 어찌 극복할 것인가! 체육 선생은 일부러 이런 일을 꾸민 것이었다. 동빈이 기뻐할 것이라 미리 판단한 것이다.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그냥 좋아하는 척하자.’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었다. 마음 착한 동빈은 서둘러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트랙에서 달려보고 싶었습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뒷자리에 있는 가방 좀 열어봐라.”

“가방요? 이거 말인가요?”

동빈은 파란색 가방을 앞자리로 가져왔다. 동빈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자신의 운동복과 운동화를 넣어두는 가방이었다.

“뭐 해? 어서 열어봐.”

“네, 알겠습니다.”

부윽.

동빈은 조심스럽게 가방 지퍼를 열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가방을 열자마자 동빈의 얼굴이 변했다.

“선생님 이 신발은…….”

“트랙 용이다. 비싼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빈은 계속 감동받은 표정을 유지했다. 물론 아까와 같은 가식적인 감동은 아니었다.

부르릉.

갤로퍼는 주 경기장 앞에서 멈췄다. 체육 선생은 시동을 끄고 물끄러미 동빈을 쳐다보았다. 정성이 통했는가! 동빈은 트랙 용 육상화만 바라보며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뭐 하냐? 빨리 내려라.”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됐고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라. 경기장 안에서 보자.”

“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인가? 경기장 탈의실로 향하는 동빈의 발걸음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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