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동빈과 혜영은 길게 휘며 구부러진 길을 나란히 걸었다. 여자의 집까지 바래다주는 미팅의 마지막 단계를 충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동빈아, 오늘 너무 고마웠어. 마술도 재밌었고 차력도 멋졌어. 게다가 이렇게 엄청난 선물까지 주고…….”
“뭐, 이까짓 것 가지고…….”
동빈이 그녀의 집까지 함께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곰 인형들 덕분이었다. 동빈은 가장 큰 인형을 등에 메고 다음 크기는 양팔로 감싼 상태였다. 혜영도 중간 크기의 인형을 가슴에 품고 뒤를 따랐다. 덩크의 대가로 받은 것은 모든 종류의 인형이었다.
“진짜로 다 왔다. 저기가 바로 우리 집이야.”
혜영은 담장이 높은 빌라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었다. 앞장서서 걷던 동빈은 자신이 들고 있던 인형들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들고 가려고?”
“괜찮아. 경비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되지.”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인사를 끝낸 동빈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표정. 결국 연락처의 꿈은 무산되는 것인가!
“저, 저기… 동빈아.”
‘앗싸!’
혜영의 가녀린 목소리가 동빈의 발길을 붙잡았다. 동빈은 쾌재를 부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동빈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연락처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은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지?”
“훗… 알고 있었어?”
하긴,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동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민감하게 반응해서 미안해. 이젠 괜찮으니까 물어봐.”
“지, 진짜 물어봐도 돼?”
“응…….”
허락은 얻었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모자라 애먼 땅바닥을 쓸데없이 걷어차고 있었다.
“빨리, 동빈아. 이런 말… 나도 용기 내서 하는 거야.”
“그럼 말할게. 저기 말이야, 또 만나고 싶은데…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 좀…….”
“……!”
이번에는 혜영이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동빈의 얼굴도 그녀의 표정을 따라 변했다.
“혜영아, 너무 어려운 부탁이야?”
“아, 아니. 그런데 정말 그걸 묻고 싶었던 거야?”
“물론이지. 그럼 내가 뭘 질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왜 왕따를 당하는지 물어볼 줄 알았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걸 제일 궁금해하던데…….”
혜영도 당황스럽고 동빈도 마찬가지였다. 오해가 밝혀졌으니 제대로 푸는 일만 남았다.
“이상하다?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묻지?”
“나에게 문제가 있으니까 왕따를 당한다고… 그, 그러니까 말이야, 내 성격이 이상하거나… 아니면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 말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세상에 왕따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왕따를 시키는 놈들이 문제가 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말이야… 빨리 연락처나 줘!”
동빈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돈 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오해를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정말 고마워. 나는 석진이 때문에 예의상 잘해주는지 알았어…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딴 거 가지고 무슨 초라함씩이나!”
동빈도 제법이다. 혜영의 말투까지 흉내 내며 그녀를 즐겁게 만들었다.
“나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수진이에게 하면 돼. 요즘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거든.”
“알았어. 다음번에는 더 재미있게 놀자.”
“그래. 조심해서 잘 들어가.”
동빈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뒤돌아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이다. 신성한 미팅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으니… 이런 느낌은 군대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혜영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
동빈은 실실거리는 얼굴로 큰길을 지났다. 하늘의 축복인가?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동빈의 벅찬 마음을 축하해주었다.
꾹.
동빈은 휴대폰을 꺼내서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길어지자 동빈은 초조한 기색을 보였는데…….
“응! 나 동빈이.”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뻔한 상황이었다. 속전속결. 동빈이 가장 선호하는 전략이었다.
“그럼, 당연히 잘했지. 그런데 수진이 전화번호가 몇 번이야? 지금 옆에 있다고? 다름이 아니라… 뭐 알고 있다고? 그래, 문자로 보내주면 더 좋지. 아니야, 집으로 가는 중이야.”
동빈은 잔뜩 들뜬 상태였다. 목소리도 높아지고 발걸음도 괜히 빨라졌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학교에서…….”
멈칫.
기분 좋게 전화를 받으며 걷던 동빈이 주춤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통화 중이라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너, 너는 뭐야?”
동빈을 기다린 것인가? 가로등을 등지고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그만 키에 약간은 도전적인 자세. 동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걸어오는 것이다.
“너가 뭐예요! 분명히 가르쳐줬잖아요. 다시 말해줘요? 내 이름은 선아예요.”
“…….”
불량스런 여중생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동빈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