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224)

“무슨 소리야? 주철이와 나는 왕따 맞는데?”

“저, 정말? 너는 특공 무술 5단이라며.”

그녀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서일여고 일진들도 주춤하는 체격이 왕따라니? 게다가 운동 짱에 특공 무술의 대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특공 무술이랑 왕따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 반에 정한수란 놈이 있는데,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는데?”

“어쩌기는? 그냥 도망치면 되는 거지. 내가 열라 빠르거든!”

“…….”

혜영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처럼 진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인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재미있게 놀자며 어째 분위기가 확 처졌네?”

“미, 미안…….”

주철이 나서자 혜영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평소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상황이었다. 한번 깨진 분위기는 다시 살리기 힘들었다.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패 죽일 정도로 재수 없는 파마머리가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혜영아. 내가 비장의 무기… 아니, 재미있는 거 준비해 왔거든?”

“재미있는 거?”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에서 동빈이 나섰다. 꼭꼭 숨겨왔던 비장의 무기를 풀어놓을 모양이었다.

“잘 봐라… 짠!”

“어머!”

동빈의 손에서 500원짜리 동전이 튀어나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동전 마술이었다.

혜영이 감탄사를 터트린 것은 물론이고, 주철이까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너,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물론이지.”

동빈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보여줘.”

“주철이 너 자리 옮겨. 옆에서 보면 안 되거든.”

“알았어.”

주철은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본격적인 마술 쇼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란히 앉은 혜영과 연주 그리고 주철은 호기심 강한 눈빛으로 동빈의 손을 쳐다보았다.

“잘 봐라… 짠! 짠!”

이번에는 양손에서 동전이 튀어나왔다. 눈을 크게 뜨고 노려봤던 일행들은 입만 쩍 벌렸다.

“우와! 가까이 보고도 모르겠네?”

“동빈이 너무 잘한다.”

가식적인 칭찬이 아니라 정말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동빈의 재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다시 잘 봐라. 짜안∼.”

동빈이 양손을 교차시키자 동전이 네 개로 늘어났다. 현란한 손동작은 프로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동빈아, 마술은 어떻게 배운 거야? 보통 실력이 아니잖아?”

“넌 인터넷도 안 하냐? 지식 검색 있잖아. 해법도 많이 나와 있어.”

“뭐라고? 지, 지식 검색?”

동전 마술은 해법을 안다고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꾸준한 연습을 통한 기술 습득이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연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이었다.

“동빈아, 너무 멋있다. 또 보여줘.”

“안 돼. 똑같은 마법을 계속 보여주면 금방 들키거든.”

혜영이 부탁했지만 동빈은 정중히 거절했다. 박수칠 때 떠나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제발 한 번만… 아까는 너무 순식간이라 잘 못 봤단 말이야.”

“그래, 동빈아, 한 번 더 보여줘라. 친구끼리 치사하게…….”

“절대 안 돼.”

혜영이 아양을 떨고 주철까지 가세했지만 소용없었다. 동빈은 고개까지 세차게 흔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동빈아. 그러면 분위기 또 다운된다. 좋은 말로 할 때 마술해!”

“마술은 진짜 안 돼. 대신 다른 걸 보여주지.”

“또 준비한 게 있어?”

“물론이지. 잠시만 기다려봐.”

동빈은 이번 미팅에 목숨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짜안!”

“동빈아. 호, 혹시 그 나무젓가락을 콧구멍에 넣고 꺾으려고?”

“주철이도 알고 있구나. 이게 요즘 뜨는 거래.”

두 번째로 준비한 것은 엽기 차력이었다. 물론 지식 검색에서 찾았겠지만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한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그건 말이야…….”

이미지 관리 차원 때문인가? 주철은 동빈이 하지 않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걱정 마. 나는 할 수 있어.”

“그게 아니라, 대나무 젓가락은 위험해! 그냥 나무젓가락도 조금 잘라놓고 하는 거란 말이야.”

“설마… 그러면 차력이 아니잖아!”

동빈이 어떤 내용을 봤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주철의 만류는 한 귀로 흘려보내고는 차력 준비를 끝마쳤다.

“간다. 잘 봐라. 이건 기합이 포인트거든.”

“동, 동빈아…….”

“괜찮아, 괜찮아. 잘 봐. 따이, 따이, 따이!”

동빈의 요상한 외침과 함께 일행들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동빈이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다. 대나무 젓가락이 완전히 꺾이는 장관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야! 코, 코 괜찮으냐? 진짜 대단하다.”

“어머… 진짜 차력보다 더 위험해 보여.”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모두가 놀라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동빈 일행이 앉은 자리는 떠들썩하게 변했다.

관객들의 반응에 고무된 동빈은 별의별 기술을 다 보여주었다. 묘기 수준에 가까운 것들이라 일행들은 진짜 공연을 보는 기분이었다.

“대단하다. 정말 대나무 젓가락 맞아?”

동빈의 노력 덕분인지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혜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시팔! 존나 유치하게 노네.”

동빈 일행의 즐거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거친 사내들의 음성이 들렸다.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간신히 살려놓은 분위기가 다시 심각해졌다.

“너희들은 뭐야?”

주철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주변을 포위한 인원이 다섯이었지만 전혀 위축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제법 깡다구는 있는 놈이네?”

“야, 남들 재미있게 노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

“네놈이 그놈이구나. 우리 은실이 기분을 잡친 놈이지?”

“은실이? 아! 저기 있는 천박한 파마?”

주철은 감탄사까지 터트리며 과장된 모습을 보였다.

사태를 파악하려는 요량인지 서일여고 일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팔랑팔랑.

비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드는 은실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은 죽었다는 뜻이었지만 주철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스윽.

그녀가 잘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천천히 팔을 치켜들었다. 은실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주철은 가운데 손가락만 힘차게 펼쳤다.

“빠큐!”

“저 뺀질뺀질한 새끼…….”

천박한 파마의 인상이 단번에 구겨졌다. 물론 동빈 일행의 주변을 둘러싼 남학생들의 당황한 기색도 역력했다.

“이런 미친 새끼! 진짜 군바리는 아닌 거 같은데, 너 누구야?”

까만 피부에 당당한 체구를 지닌 남학생이 나섰다. 운동부가 몰려왔는지 대부분이 상당한 체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명성고다. 어쩔래? 너희는 어디 놈들인데?”

“명성? 뭐야… 별 시답지도 않은 곳이잖아. 거기는 정한수 새끼가 있는 곳 아니야?”

“어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너희들은 어디 놈들이냐고 물었잖아.”

“창석고다, 이 새끼야. 이제야 감이 오냐?”

“창석? 그 깡패 학교. 그래서 뭘 바라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야, 이것들아.”

주철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전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사태를 악화시키는 구실만 심어주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네?”

창석고 학생들은 매우 위협적으로 행동했다. 동빈 일행이 앉아있는 자리를 완전히 포위한 것이다.

“쪽수 믿고 까부는 거냐?”

“진짜 겁이 없구만. 왜 남의 구역에서 행패야?”

“구역? 뭣도 모르는 새끼들이 꼭 조폭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다른 애들이 우러러보든?”

“이거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주철과 창석고 학생들의 대치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이르렀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는 왜 천박한 파마머리 도와주는데?”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너하고 상관있어?”

“존나 불쌍한 인생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냐? 아니면 저년이 한번 준다고 한 거냐? 아무리 공자라도 넌 눈깔도 없냐? 나 같으면 저런 걸레 죽어도 안 갖는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주철의 거친 발언은 싸움을 폭발시키기 충분했다. 까만 피부는 탁자를 걷어차며 뛰어들었다.

와장창.

“어머나!”

아수라장으로 변한 분위기. 탁자 위에 있던 물건이 쏟아지고 혜영과 연주는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개새끼. 갈아 마셔 버린다!”

후웅.

까만 피부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무작정 주철에게 달려가서 주먹부터 휘둘렀다. 말발만 강한 주철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몸만 뒤로 움츠릴 뿐, 어떠한 방어 동작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였다.

덥석.

“뭐, 뭐야?”

까만 피부의 주먹은 주철의 얼굴 직전서 멈췄다. 기를 써서 뻗어보려 했지만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제발 그만 해라. 주철이 말이 심하기는 했지만 너희들도 잘한 건 없다.”

동빈이 까만 피부의 공격을 대신 막아냈다. 빠르게 날아오는 주먹을 그대로 낚아챈 것이었다.

까만 피부는 동빈에게 손목을 꽉 잡혀서 꼼짝도 못 하는 상태였다.

“너도 죽고 싶어!”

“아니, 난 살고 싶거든.”

“좋은 말 할 때 놔라. 안 그럼 여기 있는 놈들 다 죽여버린다.”

“경고하는데, 죽인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다른 놈들도 움직이지 마.”

동빈은 움켜쥔 손목에 힘을 가했다. 나머지 인원을 견제하려는 수단이었고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으악, 놔! 시, 시팔 존나 아프잖아.”

까만 피부가 고통에 찬 표정을 짓자 달려들던 학생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양편이 대치 상태로 접어들자 주철이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동빈아, 뭐 하냐? 그냥 부러트려.”

“시끄러. 주철이 너도 잘한 것 없잖아.”

“이게 다 작전이었다. 저놈한테 맞아서 용돈 좀 벌려 했더니… 동빈이 너 때문에 망친 거다.”

“용돈도 좋지만 신성한 미팅에서는 싸우는 거 아니다.”

“아! 시팔… 이거 놓고 말해, 이 새끼들아!”

까만 피부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동빈도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기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하게 끝내자.”

동빈은 까만 피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혜영과 연주가 동빈의 뒤로 피신한 다음이었다.

“민우야, 팔 괜찮아?”

“씨발. 괜찮기는… 존나 아파죽겠는데…….”

까만 피부의 이름은 정민우. 창석고의 짱은 아니고 잘나가는 운동부였다. 고통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이리저리 팔목을 움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난 학생들끼리 싸우는 거 싫어하거든. 조용히 나갈 테니까 따라올 생각 하지 마라.”

동빈이 나서서 창석고와 협상을 벌였다. 대책 없는 주철이 나섰다가는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씨발새끼.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진짜 손목 부러지고 싶어? 이번에는 안 봐준다.”

“아까는 방심한 거지. 너희들을 곱게 보내면 우리 체면이 안 서거든. 명성고 찌질이한테 당할 수는 없지.”

창석고의 민우는 협상을 거절했다. 이대로 보내면 자신들만 손해 보기 때문이다. 잘나가지도 않는 명성고에게 졌다는 소리가 싫었던 것이다.

“좋아.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동빈은 대화로 해결하고 싶었다. 혼자라면 그냥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았다.

“아까 보니까 차력 열심히 하던데. 야! 쇠 젓가락 가져와.”

“아, 알았어…….”

민우는 카페 점원을 향해 소리쳤다. 이 카페가 창석고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큰 싸움이 벌어진 상황에도 카페 종업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손님들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카페 문밖에서 누군가 지키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미, 민우야. 여, 여기…….”

“시팔. 많이도 가져왔네.”

주방에 들어갔던 종업원이 나왔다. 동빈과 비슷한 나이였고 겁에 질린 얼굴로 쇠 젓가락을 뭉치로 전해주었다.

“네놈들 콧구멍으로 부러트려. 그럼 용서해주지.”

챙그랑.

민우는 쇠 젓가락을 탁자에 던졌다. 정말 수량이 만만치 않다. 저것을 부러트리려 했다가는 코가 먼저 끝장날 판이었다.

“정민우라 했지.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그래, 이 씹새야. 싫으면 군복 입은 놈만 놓고 꺼져. 여자들은 데려가게 해주지.”

“친구를 버릴 수는 없잖아. 내가 왕따라서 친구도 거의 없는데 말이야.”

“그럼 젓가락을 부러트려. 아니면…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완전히 개작살을 내줄 테니까.”

“할 수 없지… 너희들이 진짜 차력을 원한다면…….”

퉁.

동빈은 탁자 모서리로 삐져나온 쇠 젓가락을 살짝 발로 내리쳤다. 젓가락이 빙글빙글 돌면서 튀어 오르자 재빨리 낚아챘다. 진짜로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인가? 카페 전체가 조용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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