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24)

동빈과 주철은 최근 리모델링 한 건물로 들어섰다. 약속 장소는 2층에 위치한 아담한 카페였다.

주철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고 동빈은 소심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딸랑딸랑.

주철은 간판을 확인하고는 무작정 카페 문을 열었다. 청량한 방울 소리가 상당히 크게 울렸다. 주철은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오호! 뜻밖인데? 뭉기적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뭉기적은 무슨…….”

주철의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동빈은 잠시 주춤하는 행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당한 표정으로 주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정말 동빈이 새롭게 거듭난 것인가? 숨겨진 이유가 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내 동체 시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얼만데… 이놈아,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상황을 확인했다.’

동빈은 그 짧은 시간에 카페의 동정을 파악했다. 여학생들이 도착하지 않은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동빈아, 주철아, 이쪽이야.”

창가 자리에서 석진이 손을 흔들었다. 여섯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는 석진과 그의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여학생뿐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인사해라. 이쪽은 내 여자 친구, 수진이.”

“석진이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김동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 난 주철이.”

동빈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고 주철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동빈과 주철 모두 그녀를 처음 만났다.

“안녕. 나는 이수진이야. 동빈이 맞지? 우리도 말 놓자.”

“그, 그래…….”

동빈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주철에게 밀렸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한 것인가? 아무래도 주철의 행동을 보고 배워야겠다.’

동빈은 주철을 살짝 곁눈질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철은 너무나 자연스런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경직될 수도 있는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동빈이하고 주철이는 키가 비슷하네. 뭐야? 석진이만 작잖아.”

모두가 자리에 앉자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 친구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다. 주철과 동빈에 대한 칭찬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비슷하다니? 내가 훨씬 큰데?’

동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신장은 187cm. 오늘 아침에 잰 따끈따끈한 신장이었다. 반면, 주철은 180cm가 갓 넘는 키였다. 5cm가 넘게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동빈의 궁금증은 주철의 신발을 보고서 풀렸다.

‘이놈이 군복을 입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바로 전투화!’

동빈은 주철의 주도면밀함에 깜짝 놀랐다. 군대에서 신는 전투화 굽은 상당히 높았다. 동빈이 운동화를 신을 것을 감안하면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어머, 너희는 운동 많이 했나 봐. 근육이 장난 아니다.”

“그냥 시간 날 때마다 꾸준히 하는 거지.”

주철과 수진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주철이 입고 있는 국방색 티셔츠의 비밀이 밝혀졌다. 진짜 군용은 아니었다. 몸에 딱 붙는 것이라 근육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동빈은 계속 감탄사만 연발하는 상황이었다.

“제발, 우리 석진이도 운동 좀 시켜줘. 너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서 문제야.”

“글쎄, 저놈은 공부만 해서 말이야. 운동은 하루라도 빼먹으면 효과가 떨어지거든.”

‘주철아! 클럽이나 나이트에서 춤추는 것도 운동이더냐?’

춤도 운동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빈의 기준으로는 아니었다. 소외된 느낌 때문인지 동빈의 불만은 점점 심해졌다.

“친구잖아. 억지로라도 끌고 가. 석진이는 정말 운동 부족이야.”

‘절대 안 돼. 석진이를 타락시킬 수 없어!’

석진은 동빈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예쁜 여자 친구까지 있으니 선망의 대상이었다. 석진이 주철에게 물들어 유흥 문화에 빠지는 장면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딸랑딸랑.

카페 안에 방울 소리가 울리자 동빈이 흠칫했다. 재빨리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드, 드디어…….’

여학생 두 명이 들어오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동빈은 서둘러 고개를 원위치시키고 시치미를 뗐다. 걸어오는 여학생들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미안해, 수진아. 우리가 조금 늦었지.”

“괜찮아. 이쪽으로 앉아. 차가 많이 막혔어?”

여학생들이 반대편 의자에 앉자 자리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남녀가 세 명씩 마주 보는 상황이었다. 이제야 미팅이라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크, 큰일이다. 도무지 시선 처리가 되지 않아!’

동빈은 약간 고개를 숙인 자세를 고수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주철이와 비교되면 안 되는데…….’

동빈의 자신감은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주철처럼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인사해. 내 친구 연주와 혜영이. 그리고 이쪽은 동빈과 주철이.”

“아, 안녕…….”

인사는 해야 했기에 고개를 들었다. 동빈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세, 세상에… 둘 다 괜찮잖아!’

누가 파트너가 되어도 걱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연주는 어깨까지 기른 머리에 활발한 성격처럼 보였다. 그리고 혜영은 단발머리에 여성스런 느낌을 물씬 풍기는 소녀였다.

주철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절로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미팅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주선자인 석진과 수진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 대 이 미팅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 것이다.

“몰랐어? 걔는 얼굴하고 턱하고 모두 수술했다니까!”

“정말이야?”

“그럼, 내가 아는 형이 기획사 쪽에 있거든. 직접 들은 사실이야.”

주철의 활약은 주선자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았다. 모든 대화의 시작과 끝이 주철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째 주철이 놈은 모르는 것이 없냐? 밥 먹고 그런 것만 연구한 거야?’

처음 화제는 드라마였고 자연스럽게 연예인 쪽으로 관심이 흘렀다.

동빈은 무표정하게 자리만 지킬 뿐이다. 스포츠면 모를까, 동빈은 드라마나 연예계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불리해. 뭔가 전환점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대로 계속 밀릴 수는 없지. 마지막 방법을 쓸까… 아, 아니야.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아.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동빈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파트너가 누구든 상관없지만 떨거지가 되기는 싫었다.

“주철아. 너무 우리끼리만 떠드는 거 아니야? 동빈이도 말 좀 하라고 그래.”

“뭐야? 이놈 또 딴생각에 빠졌네?”

너무나 골똘히 고심한 것이 문제였다. 동빈은 주변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어머나, 우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성격이 활달한 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객관적인 조건을 보면 남자 쪽이 훨씬 괜찮았다. 주철은 여자들이 선호하는 외모였고 동빈은 믿음직한 인상이었다. 자신들 때문에 삐친 게 아닌가 걱정스런 반응이었다.

“아니야. 이놈이 가끔 이러거든.”

“정말?”

“그럼, 동빈이가 얼마나 재미있는 놈인데. 잠깐만 기다려봐. 야, 동빈아!”

“응? 뭐, 뭔데?”

주철이 목소리를 키우자 동빈이 정신을 차렸다.

잠시 딴생각을 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주철을 바라보았다.

“너는 인생을 왜 사냐?”

“나야 당연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옛날 버릇이 또 나오다니, 학교에서처럼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비겁한 자식! 날 웃음거리로 삼다니!’

오늘은 정말 주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위기를 모면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봤지? 동빈이도 얼마나 재밌는 놈인데.”

“호호호. 그러네? 동빈이도 유머 감각이 풍부한 편이구나.”

상황이 반전되었다. 대화의 틈에 끼지 못하던 동빈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동빈이, 너 진짜 여자 친구 없어?”

환하게 웃던 연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무리 말주변이 없어도 외적인 조건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난감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학교를 찾아왔던 불량 여중생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있다고 해도 안 믿었는데, 이번에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추궁을 당할 분위기였다.

“동빈이가 외국에서 왔거든. 아직은 여자 친구가 없어.”

주철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어디에 있었는데? 미국? 캐나다?”

“거긴 아니고… 가깝고도 먼 곳에 있었지…….”

“가깝고도 먼 곳? 일본을 말하는 거야?”

“시시하게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 중요한 것은 동빈이 아직 여친이 없다는 사실이지. 말이 나와서 그런데, 동빈이가 우리 학교 운짱이야.”

‘운짱? 군대 운전병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분명히 운동을 잘한다는 의미의 운짱일 거야. 고맙다, 주철아.’

조금씩 주철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입지가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아마 못하는 운동이 없지. 네가 특공 무술이 5단인가?”

“공인 5단. 비공인 7단.”

“게다가 이 정도 몸이면 완벽한 하드웨어지. 키가 185?”

“아니, 187. 오늘 아침에 쟀거든.”

“어머, 진짜 크다.”

여자들의 감탄은 동빈에게는 행복이었다. 자꾸만 비행기를 태우는 주철이 결코 밉지 않았다. 고마워 미칠 것 같았다.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니야. 피아노도 기가 막히게 친다. 여자를 꼬실 조건은 완벽한데 조금 숙맥이라서 말이야.”

“우리 혜영이도 피아노 잘 치는데… 물론 남친도 없어. 너무 성격이 조용해서 탈이야.”

“어머, 얘는…….”

서서히 파트너가 정해지는 분위기였다.

수줍은 듯 얼굴이 붉어진 혜영과 머리를 긁적이는 동빈. 둘 다 그리 싫은 모습은 아니었다.

“자자. 확실하게 파트너를 정해볼까?”

“주철아. 따로 정할 필요가 있을까? 혜영이하고 동빈이가 너무 잘 어울리는데?”

마침내 동빈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인가? 주철과 연주가 동시에 밀어주니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뜻밖의 방해꾼이 출현한 것이다.

“정혜영! 너 여기서 뭐 하니?”

“……!”

혜영과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척 봐도 불량스러운 모습으로 혜영을 노려보았다.

“이년아,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지랄한다. 꼴에 남자까지 만나고…….”

“그, 그게 아니라…….”

혜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여학생들과 동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방은실. 지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 이년아. 너도 똑같이 당하고 싶어!”

“…….”

연주가 안타까워 나섰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친구는 아닌 듯싶다. 우연히 만난 것도 조금 수상했다. 그녀들은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이야, 천박한 파마. 그냥 꺼져주시지?”

주철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분이 상했다는 증거였다.

“군복, 넌 빠져. 이건 여자들만의 문제야.”

“이런 싸가지를 봤나. 조금 논다고 뵈는 게 없지? 허이구! 천박한 파마에 지저분한 화장하고는…….”

주철은 은실의 얼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머리와 화장으로 어떻게 밖으로 나왔냐는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말조심해.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미친년. 기껏 해야 서일여고 일진 아닌가?”

불쑥.

주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투화까지 신었기에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서일여고 일진이 주춤하는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너 미쳤니? 알면서 이러는 거야? 학교생활 하기 싫어?”

“천박한 년아.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지 알아?”

“아, 안 돼! 주철아!”

주철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동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일여고 일진들은 더욱 주춤하는 반응을 보였다. 동빈의 체격은 주철보다 좋았다. 그런데? 동빈은 무슨 이유로 주철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것인가?

“동빈아, 놔봐. 이런 년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제발 참아라! 너는 대책 없이 큰소리만 치는 놈이잖아!’

깡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책이 없다고 해야 하나? 주철은 사고부터 치는 성격이었다.

“천박한 파마. 난 여자라고 봐주지 않거든? 특히, 너처럼 재수 없는 년들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

“뭘 노려봐, 이년아! 너 같은 년은 병신 만들고, 난 해외로 뜨면 그만이야. 우리 집이 좀 살거든. 네년이 병신 되고도 잘 살 수 있나 두고 보자.”

“시팔! 존나 재수 없게… 가자.”

주철의 위협이 통했다. 서일여고 일진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완전히 카페를 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자리에 앉아서 동빈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수습되자 주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왕따냐?”

“…….”

물론 혜영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를 망쳤다고 생각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주, 주철아, 말이 조금 심하다. 솔직히 우리도 거의 왕따잖아. 석진이가 성격이 좋아서 그렇지…….”

“그래? 오늘 참 잘 모였네. 왕따끼리 모였으니 말이야.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놀고 싶지만 걸림돌이 너무 많아.”

“무슨 걸림돌이 많다는 거야?”

일단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동빈은 어떤 문제가 남아있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주철은 동빈에게 직접 설명하지 않고 혜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혜영이 너 말이야. 내일 당장 학교 가면 어쩔 거야? 아니, 우리와 미팅 끝나고부터가 문제겠지. 저년들이 가만둘 것 같아?”

“괘,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저년들이 일부러 따라다니며 괴롭힐 정도면 대충 짐작이 가는데.”

동빈도 이제야 무슨 걸림돌인지 짐작했다. 미팅은 짧고 학교생활은 길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주철아, 그러면 자리를 옮길까? 다른 카페로 말이야.”

“자리 옮겨도 소용없다. 저년들이 죽어라 쫓아올 거야. 나는 천박한 파마 년 눈치 보면서 놀기 싫거든.”

“그럼 어쩌자고.”

“결정은 혜영이가 해야지. 어떻게 할 거야?”

주철의 시선은 다시 혜영을 향했다. 그녀의 뜻에 따라서 이번 미팅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나, 나는 정말 괜찮아. 자리 옮기지도 말고… 그, 그냥 아까처럼 재미있게 놀자.”

“정말이지. 네가 결정한 거다.”

“응…….”

“좋아. 그렇다면 재미있게 놀지, 뭐. 그리고 인상 좀 펴라. 저년들이 노려본다고 쫄 필요 없단 말이지.”

“고마워 주철아. 그리고 동빈이도…….”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동빈은 혜영의 감사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번 일은 주철이 혼자서 해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동빈이, 너도 왕따라며 나를 위로해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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