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24)

전쟁을 끝낸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시험이 절반 정도 지난 시점. 벌써부터 학생들의 반응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시험 자체를 포기한 학생도 있었고 재기에 성공하여 자신감을 회복한 학생도 있었다.

“동빈아, 그만 웃어라. 입 찢어지겠다.”

“그냥 놔둬라. 오늘 아니면 언제 웃겠냐.”

석진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자 주철이 만류했다. 기쁨은 잠시라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동빈은 여전히 행복할 따름이다. 계속 실실거리며 교문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어라? 쟤는 뭐냐?”

석진은 교문 중앙을 막고 있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하얀색 상의에 붉은 계열의 체크무늬 치마. 명성고등학교의 교복은 아니었다. 동빈은 좋아서 정신이 없었지만 주철은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이야! 요즘 중딩은 상당히 용감하네?”

여학생은 주눅이 든 표정이 아니었다. 교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쯤 짝다리를 짚은 채 당당함을 유지했다. 지나치는 선배들의 시선조차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혹시 주철이 너…….”

“내가 미쳤나! 젖비린내 나는 중딩을 건들게?”

석진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주철은 팔짝 뛰었다.

여학생의 눈빛이 변한 것은 자신들을 발견한 다음이었다.

그렇다면 동빈이가?

석진과 주철의 고개는 동시에 돌아갔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한 동빈은 주춤했다. 결과가 좋아 한창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무엇을 의심하는 것인가?

“나 커닝 안 했어. 정말이야. 부정행위는 교칙에 걸리잖아.”

동빈의 순수한 눈빛을 보라! 석진과 주철은 곧바로 잘못 짚었음을 인정했다.

“이놈도 아닌 것 같은데?”

“글쎄 말이다. 그럼 누구지?”

모두가 아니라는 이상한 결론에 봉착했다. 주철과 석진이 의문을 품은 상황에도 여학생의 발길은 계속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빈 일행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

마침내 범인이 밝혀졌다.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동빈의 얼굴이 변한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더니… 우리 먼저 갈게.”

“재주도 좋다. 어떻게 중딩을 꼬실 생각을 했는지 몰라?”

불청객은 조용히 사라져주겠다는 뜻인가? 석진과 주철은 동빈을 남겨두고 떠났다. 의뭉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이 동빈을 당황케 만들었다.

“아, 아니야. 기, 기다려…….”

“어디 가요, 오빠.”

동빈이 친구들은 따라가려 했지만 여학생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막아서더니 동빈의 팔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이거 놔. 애들이 보잖아. 도대체 누구야!”

친구들을 따라잡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교문 앞에서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니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야! 제발 놓고 말해. 도대체 누구냐니까!”

“싫어요. 오빠는 열라 빠르잖아요.”

“여, 열라… 그러고 보니…….”

약간은 불량스런 말투에 동빈이 빠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동빈은 친구들을 따라잡는 것을 포기하고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애는 아니었다.

‘뭐야? 공원에서 봤던 불량스런 학생이잖아?’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서 잠시 착각했다. 담뱃불 좀 빌려달라고 장난을 쳤던 여중생이었다.

“난 담배도 안 피우고 불도 없거든? 그러니 이거 좀 놓을래?”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불 달라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왔어? 지금 시험 기간 아닌가?”

“시험이 뭐 대순가요? 그냥 보고 싶어 왔어요.”

이렇게 무대책으로 당당할 수가!

동빈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주변의 시선도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다 좋은데 말이야, 팔은 좀 놓고 이야기하자.”

“싫어요. 도망칠 거 뻔한데…….”

“도망 안 가. 절대! 그러니까 제발 놔라. 응?”

“약속했어요. 쌩 까지 마세요.”

“쌩? 그, 그래…….”

여학생은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서 팔을 놓아주었다. 동빈은 급한 불을 껐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나는 전혀 반갑지 않거든.”

“인사부터 할게요. 저는 선아에요, 진선아.”

악수를 하자는 뜻인가? 선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동빈은 뚱한 반응을 보였다.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딴청을 피웠다.

“난 공부해야 하거든? 무슨 일로 왔는지 빨리 말해.”

“맛있는 거 사줘요.”

“지금은 시험 기간이야. 너도 공부해야 하잖아?”

“난 공부 취미 없어요. 맛있는 거 사줘요.”

“…….”

진짜 이런 막무가내가 다 있을까? 동빈의 마음은 바싹 타들어 갔다. 선아의 강경한 태도를 보니,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좋아. 내가 맛있는 거 사주면 다신 안 올 거야?”

“뭘 사주는지 봐서요.”

“따라와.”

동빈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뭘 사줄지 결정은 못 했지만 우선 학교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곁눈질로 살펴보며 숙덕거리는 여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오빠, 도망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내가 원래 빨리 걸어.”

선아는 동빈을 따라잡기 급급했다. 무슨 걸음이 그리도 빠른지, 거의 뛰다시피 해도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편의점.

동빈과 선아는 파라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동그란 테이블 앞에는 작은 상자와 음료수가 놓여있었다.

부스럭부스럭.

맛있는 거 사달라고 떼를 썼던 선아는 잔뜩 풀이 죽었다. 상자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 집었지만 뜯지도 않고 미적거렸다.

“나 이거 먹기 싫은데…….”

“무슨 소리야? 맛있는 거 사달라며.”

동빈은 선아의 불만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왜 먹지 않느냐는 눈치였다.

“다른 거 사줘요.”

“정말 입맛도 까다롭네. 초코파이가 얼마나 맛있는데 말이야.”

동빈이 맛있다고 사준 것은 초코파이였다. 동빈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였다.

“다른 거 사줘요. 난 초코파이 싫어요.”

“싫으면 관둬. 난 맛있는 거 사줬으니까.”

동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학교가 아니라 걸릴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선아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계속 초코파이를 먹었다.

우적우적.

동빈은 자기 몫을 해치우고 선아가 내려놓은 초코파이까지 먹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다.

‘지, 질렸다. 초코파이 한 통을 그냥 다 먹네!’

선아는 동빈의 엄청난 식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코파이 귀신이 들렸는가? 앉은자리에서 한 상자를 박살 냈고 1.5ℓ 사이다까지 단숨에 마셔버렸다.

“크아! 정말 맛있다. 맛있는 거 사줬으니, 난 간다.”

동빈은 사이다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뜻이었다.

“자, 잠깐만요.”

“뭐가 또 잠깐이야?”

“오빠는 여자 친구 없죠?”

“……!”

동빈은 뜨끔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이 여자 친구 하겠다고 나설 분위기였다.

‘거짓말은 나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 그래! 얼마 뒤면 소개팅도 한다. 거짓말이 아니야.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언급이지!’

동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타이르려 했는데, 먼저 선아가 선수를 쳤다.

“조용한 걸 보니 없다는 뜻이네요. 그렇게 알고 먼저 갈게요.”

“그, 그게…….”

잠시 머뭇거린 것이 실수였다. 선아는 동빈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확신을 내려버렸다.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나서는 동빈보다 먼저 파라솔을 떠났다.

“야! 나 여자 친구 있어! 무지 예뻐!”

“구라를 치려면 제대로 쳐요.”

“구, 구라?”

변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선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앞으로 여자 친구 사귀지 마요. 골치 아프게 될 거예요.”

“뭐, 뭐야? 날 겁주는 거야?”

“겁주는 건지 아닌지 나중에 보자구요.”

“야! 하나도 안 무섭다.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난 불량스런 여자는 싫어.”

“오빠, 나중에 봐요. 빠이∼.”

선아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동빈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선아의 뒷모습만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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