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좀 하자
군대의 고된 훈련은 실전을 대비한 것이다.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은 실전에서의 피 한 방울과 똑같았다. 열심히 준비를 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동빈은 치열한 전투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의 전투는 시험이 아니던가!
중간고사 첫날. 내신 성적이 중요했기에 물러날 수 없는 한판이었다.
부들부들.
전투 아니, 시험을 끝낸 동빈의 표정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시험지를 부여잡은 손이 잔잔하게 떨렸고, 눈가에는 주름까지 생겨났다.
‘나, 낭패다! 희생이 너무 많아.’
정답을 체크하면서 전투의 승패는 곧바로 드러났다. 곳곳에 보이는 붉은 피! 정확히 말하면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한 자국이었다.
‘실수다. 6번 문제는 그냥 지나쳐야 했는데…….’
참담한 패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초반 기세는 좋았지만 6번 문제에 너무 매달린 것이 실수였다. 중간을 조금 넘게 점검한 결과는 참패의 수준이었다.
“동빈아, 계속 맞춰볼 거야?”
“…….”
정답을 불러주는 학생은 박석진. 전교 5등 안에 드는 수재였다. 염세주의자인 주철과 함께 동빈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동빈아, 그만 할 거야?”
“아, 아니야. 계속 불러…….”
“16번까지 맞췄지. 17번은 2번.”
“2번? 호, 혹시 3번이 아니고?”
“2번이 확실해.”
부윽.
또다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목표인 70점은커녕 반타작도 못 할 상황이었다.
“18번에 1번.”
“좋아.”
“19번에 2번.”
“그래…….”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예상 밖으로 뒷부분의 성과가 좋았다. 불리한 전세를 다시 역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20번은 4번.”
“아싸!”
동빈은 주먹까지 불끈 쥐며 기쁨을 표시했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정답을 불러주던 석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좋아해? 기본적인 문제잖아∼.”
“하늘이 날 도왔어. 찍었는데 맞았거든.”
“하여튼… 21번에 3번.”
“젠장!”
부윽.
기쁨은 잠시였다. 다시 희생자가 속출하더니 주관식은 말이 아니었다. 붉게만 변해가는 시험지. 이번 전투의 참담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동빈은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에 훨씬 못 미친 결과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걱정은 배가 되었다.
‘문제가 너무 강했나? 아니야,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상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공부가 부족해서 벌어진 결과임을 시인했다.
“주철아, 너는 몇 점이나 받았냐?”
“뭐가?”
동빈은 주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철은 시험 결과에는 관심이 없는지 음악만 듣고 있었다. 음악 소리 때문에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았다.
“너! 몇 점이나 맞았냐고!”
동빈은 주철의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이제야 주철도 시험지에 관심을 보였다. 슬쩍 자신의 시험지를 보고는 대충 점수를 확인했다.
“글쎄? 나는 80점 정도 나온 것 같은데?”
“뭐, 뭐야! 말도 안 돼. 너는 나보다 공부 더 안 했잖아!”
이다지도 억울할 수가!
동빈은 주철의 방탕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공부라도 했단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미련하긴… 공부도 다 요령이거든.”
“요령은 무슨! 운이 좋아서 점수가 좋았겠지.”
동빈이 발끈했다.
요령?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불변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었다.
“동빈이 너는 어떻게 공부했는데?”
“나야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열심히…….”
“야야야! 너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냐? 그건 예전에 대입 수석 한 애들이나 했던 소리라고. 지금은 부잣집 애들이 더 공부 잘하는 시대란 말이야. 알간?”
“무슨 소리. 교육부 장관께서도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고 했어. 국가에서 하는 일에 요령은 있을 수 없지!”
“웬 교육부 장관? 바로 눈앞에 결과가 나와 있잖아. 내가 만날 노는 것 같아도, 공부할 때는 하거든. 물론, 비싼 돈 주고 과외 받았던 것이 아∼주 도움이 됐지.”
“…….”
공부도 현대 전투와 비슷해지는 것인가?
요즘은 최첨단 장비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다. 엄청난 투자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총 들고 열심히 뛰던 시대는 지나갔다.
신성한 학교에서까지 같은 논리가 적용되다니, 정말 땅을 치며 한탄할 노릇이었다.
“주철아,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석진이를 봐라. 부자는 아니지만 공부 잘하잖아.”
동빈에게 석진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공부를 잘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격도 좋았다. 그렇기에 약간 이상한 동빈이나 주철과도 친구가 됐던 것이다.
“석진이도 나처럼 과외 받으면 성적이 더 오를걸?”
“아니야, 석진이는 그런 거 아니고도 잘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놈은 성실하니까. 그래서 내가 석진이를 인정하는 거야.”
염세주의자인 주철도 석진에 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동빈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이 부러운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사는 게 보기 좋다는 이유였다. 여하튼, 동빈과 주철 그리고 석진은 꽤나 잘 몰려다니는 친구였다.
“야,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슨 말들이 그리 많아? 무안하게시리…….”
뚱하게 지켜보던 석진 끼어들었다. 칭찬은 고맙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면 상당히 민망했다.
“어라? 석진이, 너 아직 안 갔냐?”
동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 답안 맞추고 앞자리로 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어볼 말이 있어서 다시 왔어. 동빈아, 주철아. 너희들 시험 끝나고 뭐 할 거야?”
“공부해야지. 무엇이 틀렸는지 확실히 체크해서 다음 시험에는 절대 틀리지 않아야지.”
“그래, 동빈이 너는 열심히 공부해라. 나는 클럽이나 가서 신나게 놀란다. 스트레스를 풀어줘야지.”
동빈과 주철은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대화 내용만 들으면 동빈이 훨씬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철아, 혹시 소개팅 할 생각 없어?”
“소개팅?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지.”
석진은 주철을 집중 공략 했다. 공부를 한다고 선언한 동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클럽 가서 논다며? 그냥 한 번만 만나줘라. 상당히 괜찮은 애야.”
“귀찮아. 차라리 동빈이한테 부탁해라.”
“야, 동빈이는 공부한다고 하잖아. 학생의 본분에 충실한 동빈이가 소개팅 같은 걸 할 것 같으냐?”
“저놈 표정을 보니 확실히 할 것 같은데?”
“정말?”
석진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눈빛과 마주치게 되었다. 동빈의 얼굴에는 소개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철철 넘쳐흘렀다.
“동빈이 너… 정말 소개팅 할 거야?”
“석진이 네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부, 부탁까지는 아니고… 공부한다고 했잖아. 정말 괜찮아?”
“물론이지. 친구의 부탁인데…….”
“그, 그래… 부탁이라고 치자. 시험 끝나고 할 거고… 시간과 장소는 나중에 알려줄게. 이제 그런 표정 좀 거둬 줄래?”
석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만약, 안 된다고 말했다가는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딩동댕동.
두 번째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석진은 앞자리로 돌아갔고 시험관이 들어왔다.
“책상에 있는 거 모두 집어넣어.”
‘드, 드디어인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단 말인가!’
동빈은 반쯤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시험에는 관심이 없는지 교실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동빈아, 뭐 하냐?”
“무, 무슨 일인데?”
주철의 목소리에 동빈은 놀라서 반문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 못 차린 반응이었다.
“시험 안 볼 거야? 빨리 시험지 받아.”
“아, 알았어.”
앞자리에 있던 학생이 계속 시험지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야 정신 차린 동빈은 서둘러 시험지를 받았다.
‘열심히 하자. 여자들도 공부 못하는 남자는 싫어할 거야.’
첫 시험을 망쳤던 동빈이 활활 불타올랐다. 샤프를 불끈 쥐더니 시험에 매달렸다. 뭔가 일을 낼 것 같은, 강인한 집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