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24)

주택가가 끝나고 번화가가 시작되는 지점.

조용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도심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도 많아졌고 길을 걷는 행인들도 점점 늘어났다.

탁탁탁탁.

동빈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현란한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서는 아담한 3층 건물로 들어섰다. 정말 급한 일인가? 동빈은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추르르.

세면대에 도착하자 수돗물부터 틀었다. 하얀 물줄기나 쏟아지자 손부터 씻었다.

“이게 뭐야… 그놈의 중딩들 때문에…….”

붉은 핏물이 줄기 되어 흘러내렸다. 동빈이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조폭들의 피가 분명했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기에 잘 씻기지 않았다.

“젠장… 더 이상은 안 지워지잖아.”

대충 손과 얼굴은 씻어냈지만 옷에 묻은 피가 문제였다. 교복이 하얀색 계열이라 완벽하게 감출 수 없었다.

“참! 몇 시나 됐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이 금방 갔다. 여러 사건에 휘말려 정신없이 보냈던 것이다.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군.”

거울을 보고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고는 곧바로 화장실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멀리 있지 않았다. 동빈은 화장실 바로 위층에 있는 신경정신과 병원으로 올라갔다.

주우웅.

자동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섰다.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가 동빈을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동빈 학생. 약속 시간은 정말 칼이네?”

“운이 좋았습니다.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었습니다.”

병원 벽시계는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는 칭찬이었다.

“어서 상담실로 들어가. 원장님은 이미 기다리고 계실 거야.”

“네, 감사합니다.”

동빈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아야 했다. 여름 방학 동안은 예외로 훈련에 참가했었다. 오늘은 근 한 달 만의 방문이었다.

상담실 내부는 매우 단출했다.

책장 몇 개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전부였다. 서류를 살펴보던 원장은 환한 미소로 동빈을 반겼다.

“미안하네. 급한 약속이 있어서 약속 시간을 바꿨네.”

“괜찮습니다.”

금테 안경에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의사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타입이었다.

“뭐 하고 있나? 이쪽으로 앉지.”

“감사합니다.”

동빈이 소파에 앉자 최 원장은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 몇 가지 사항을 체크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상담받느라 수고… 자, 자네 싸웠나?”

최 원장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빈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건달들이 여자를 희롱하기에…….”

“그래? 정말 다행이군. 요즘은 못 본 척 지나치기 십상인데 말이야. 안 그런가?”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로 여자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아니면 제가 왜 싸웠겠습니까? 솔직히 말썽 일으키지 않으려고 중딩 아니… 중학생들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너무 흥분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믿어.”

“감사합니다. 요즘 오해를 많이 받아서…….”

최 원장이 부드럽게 나오자 동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소파 등받이에 다시 몸을 기대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번 짚고 넘어가지. 중학생들도 피해 다니는 것이 억울하지 않은가? 진짜 싸우면 패할 리 없겠지?”

“물론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학급 정도는 박살 낼 수 있습니다.”

“겨우 한 학급? 내가 상담했던 학생 중 한 명은 학교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고 큰소리치던데? 물론, 몇 명을 먼저 눕히면 나머지 학생들이 지레 겁먹는 효과가 있었겠지.”

최 원장은 실망했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 학급을 통째로 상대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 물론 동빈은 겁먹고 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했을 것이다. 동빈의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가 확실했다.

“국가의 명령이라면 한 학교 정도는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조건인가? 혹시 총이라도 쓰려는 것인가?”

최 원장은 미소를 띤 채 질문을 던졌다. 총 이야기까지 꺼낸 것은 과장된 표현이었다.

“총 같은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무기가 필요 없다고? 그럼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허락입니다. 죽이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맨손으로 전부를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

최 원장의 웃음이 사라졌다. 동빈의 말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진한 외모를 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키운 살인 병기였다.

“너무 무서운 대답 같은데… 자네의 사회생활은 내 판단에 달려있어. 보고서 한 장이면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할 거야.”

“무서운 대답이 아니라 정직한 대답입니다. 원장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뭐든 사실대로 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원장은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질문인데…….”

“무엇이든 질문하십시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원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자 동빈은 개의치 말라는 태도를 보였다. 이럴 때는 진짜 군인다운 모습이다. 자신이 확신하는 행동 규칙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지켜나갔다.

“어떤 계기가 된다면 말이야, 어떤 계기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하여튼, 정말로 학생들을 몰살시키는 행동을 할 수 있겠나?”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못합니다.”

“이유가 뭔가? 마음의 변화라도 생겼나?”

“저는 군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학생이기에 학생의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최 원장은 홀가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지. 개인적인 질문인데… 아직도 장군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것인가?”

“저는 장군님이라는 호칭이 편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다니? 조선 시대도 홍길동도 아니지 않은가? 장군님이 부담스러워할까 그러는 것인가?”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아직은 장군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싶습니다.”

최 원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빈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자네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물론 의사의 신분으로 질문하는 것일세. 군에서는 어떤 일을 담당했나?”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군에 관한 내용은 모두가 비밀입니다. 특히, 제가 했던 작전은 일급으로 분류됩니다.”

“참으로 난감하군. 그럼, 자네의 인생에서 언제부터가 비밀이 아닌가? 의사인 내가 상담자의 신상 정보를 너무 모르니 말일세.”

“글쎄요. 국가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언제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

최 원장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드디어 동빈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인가? 의사의 신분으로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꼭 듣고 싶었던 내용이다.

“정확히 여덟 살 무렵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였군. 그때는 어디에 살았나?”

“강원도에 있는 자그만 절입니다. 동자승으로 있었습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절이라… 매우 낭만적으로 들리는군. 그 당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피아노 소리입니다. 맑고 청명한 피아노 소리.”

“피, 피아노? 절에서 피아노를 친단 말인가?”

그윽한 풍경이나 목탁 소리가 아니라 피아노? 전혀 뜻밖의 대답이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불공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저를 길러주신 스님이 피아노를 아주 잘 치셨습니다. 무척 자상하신 분입니다. 저에게도 잘해주셨습니다.”

“스님의 개인적인 취미였던 모양이군. 절에 있었다니 묻겠는데, 자네는 불교를 믿는가?”

“아니요. 저는 종교 활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렸을 적 부처님께 간절히 기원한 적이 있는데… 조금 실망했습니다.”

“무슨 기원을 했는데?”

“제발…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푸훗!”

최 원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동자승도 스님 아니던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사항이었다.

동빈이 심각하게 말했기에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미, 미안하네… 어렸을 때라 엉뚱한 기원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실망까지는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이라도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 있는 법이지.”

“아니요. 부처님은 제 기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얼마 뒤 저는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기는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인가? 어쨌거나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그러나 뭔가 감추인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부처님께 실망했는지 모르겠군. 고기를 실컷 먹었으니 소원 성취 한 것 아닌가?”

“저는 절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스님하고 오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상한 방식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님이 싫었습니다.”

“무슨 사고였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싫습니다.”

동빈의 대답은 단호했다.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국가 비밀인가?”

“아니요. 개인적인 비밀입니다.”

동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열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최 원장도 이를 깨달았는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참! 오늘이 집중 상담의 마지막 날이라네. 다음부터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만 상담하면 될 거야.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원장님이 더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원장이 악수를 청하자 동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나야 국방부에서 돈 받고 상담하는 것이고… 자네의 사회 적응에 대한 판단은 오늘로써 매듭을 짓겠네.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원장님.”

동빈은 최 원장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좋은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민간인이 되기 위한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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