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무서워
무더운 날씨는 계속되었다.
햇볕이 한창 기승을 부릴 시간이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를 정도였다. 버스 정류장의 풍경도 더운 날씨의 영향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워메, 더운거. 이놈의 날씨는 수그러들 줄을 모르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땀을 닦았다. 오지 않는 버스보다 무더운 날씨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뚜벅뚜벅.
동빈은 쨍쨍한 햇볕을 받으며 힘차게 걸었다. 땀조차 흘리지 않았고 더위에 지친 기색도 없었다. 걸음도 빠른 편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슬금슬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은근슬쩍 동빈을 쳐다보았다. 교복을 입었기에 학생인 것은 확실했다. 착실하게는 보였지만 지금은 학교 수업이 한창일 시간이었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벨 소리를 너무 키웠는지 주변의 시선이 만만치 않았다. 동빈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기에 분주했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
딸깍.
“여, 여보세요.”
벨 소리가 멈추자 일단은 안도하는 표정이다. 멋쩍은 표정을 감추려는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통화했다.
“네,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네? 어, 얼마나요?”
동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약속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네,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끼이익.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버스가 도착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올랐다. 그러나 동빈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한 시간 동안 뭘 하며 기다리지?’
부르릉.
동빈은 버스가 떠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적당히 시간 때울 장소가 없었다. 집에 가기도 마땅치 않고, 근처에 피시방이 있지만 꽉 막힌 느낌이 싫었다.
“맞다!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었지?”
버스를 타고 몇 번이나 지나쳤던 기억을 떠올랐다. 한 번도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적당한 곳이 없었다. 꽉 막힌 공간보다는 훨씬 낫다는 판단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편히 쉴 수 있는 장면을 생각했는지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집 근처 공원은 동빈의 예상보다 훨씬 작고 한산했다.
공원 중앙에 놀이 기구가 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니 그늘진 벤치가 보였다.
‘학교생활…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동빈은 벤치에 앉자마자 잡생각부터 떠올랐다. 꿈에도 그리던 학창 생활이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뭔가 벙 떠있는 느낌. 아직도 적응을 못 했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부스럭부스럭.
‘뭐야?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나?’
이상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가장 후미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이, 이런! 어린 중학생들이… 그, 그것도…….’
여자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교복을 보니 인근 중학교가 분명했다. 동빈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등을 돌리는 학생도 있었다.
‘왜 공원이 조용한가 했더니…….’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 자체가 없었다.
더운 날씨 탓도 있지만 불량 학생들에게 공원을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쯧쯧쯧… 한창 공부해야 할 놈들이 말이야, 학교도 가지 않고 저런 불량스런 짓이나 하니…….’
눈살은 조금 찌푸렸지만 충고할 생각은 없었다. 충고한다고 말을 들을 애들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에이, 괜히 신경 쓰지 말자. 요즘은 중학생들이 더 무섭다고 하던데…….’
동빈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불의를 보고 참는다?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쉬는 것이 어디냐. 군에 있으면 만날 산이나 오르고… 총이나 쏘고…….’
푸른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예전 같으면 훈련받느라 한참 정신없을 시간이었다.
공부가 힘들다고 하지만 군대 훈련보다 심하진 않았다. 민간인이 된 것을 감사할 따름이었다.
“저, 저기요.”
“……!”
동빈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귀여운 여자의 목소리! 하늘로 향했던 동빈의 고개가 급하게 돌아갔다.
“나? 나를 부른 거야?”
“네…….”
귀여운 여자가 수줍은 듯 보고 있지만 동빈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좀 전에 보았던 불량 여중생이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 무슨 일로…….”
“담뱃불 좀 빌려주세요.”
‘요것 봐라, 정말 대책 없는 놈들이네.’
자신을 놀리는 것이 확실했다. 후미진 곳에서 지켜보던 여학생들의 키득거리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난감하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동빈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냥 눈만 깜박이면서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없으면 말지!”
“…….”
동빈의 고민을 눈치 챘는가?
담뱃불을 빌려달라던 여학생이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별꼴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선 것이다.
동빈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정말 이런 일도 다 있네.’
뒤에서 지켜보던 여학생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불 빌려달라고 놀렸던 여학생을 하이파이브까지 하며 맞이했다.
‘참자! 중학생들이 더 무섭다고 했지. 그래, 참자!’
동빈은 단짝이자 염세주의자인 주철의 충고를 떠올렸다. 정말 조용히 지내고 싶으면 고등학생보다 중학생을 더 조심하라는 충고였다. 지금은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귀엽게 봐준다. 할 일이 없으니 오죽하겠냐.’
조금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화까지 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동빈은 다시 푸른 하늘을 보려 했지만 또 다른 방해꾼과 직면하게 되었다.
“저기요.”
이번에는 남자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학생을 볼 수 있었다.
“넌 또 무슨 일인데?”
“담배 좀 빌려줘요.”
“…….”
교복을 보니 좀 전의 여학생과 같은 학교였다. 덩치도 꽤나 있었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 상태였다.
“저기요, 담배 좀 달라고요. 귀가 먹었어요?”
“나는 담배 안 피워.”
동빈은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짧은 대답과 함께 외면했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수상했다.
“그럼, 담배 사게 돈이라도 줘.”
“……!”
이건 명백한 위협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허참… 이제는 중학생 놈들까지…….’
같은 동기들에게 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울화가 치밀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저절로 주먹에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벌떡.
동빈은 매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185cm가 넘는 키에 특공 무술로 다져진 몸이다. 경직된 표정까지 지으면 효과는 충분했다. 두어 번 정도는 정한수도 조용히 물러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중학생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일어나셈? 그냥 돈만 주면 되는데?”
실실 웃으며 한번 해보자는 행동을 보였다. 머릿수에서 앞서니 무서울 게 없는 모양이다.
“너희들 미쳤냐? 나 고등학생이야.”
“누가 뭐래? 찌질이 명성고인 거 잘 알고 있거든. 내가 지금 가도 짱 먹을 학교잖아!”
‘이놈들은 진짜로 겁이 없네?’
동빈은 황당함밖에 남지 않았다.
명백한 하극상!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중학생들의 반응이 점점 거칠어졌다.
“씨발새끼, 어딜 도망가려고! 좋은 말 할 때 털어. 쎈타 까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씩 알지?”
“세, 쎈타?”
알 수 없는 은어까지 사용해서 동빈을 당혹케 했다.
쎈타는 뭘까? 버릇 고쳐주는 셈치고 박살 내 버릴까?
동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뭐 하냐? 이런 새끼는 무조건 선빵부터 날려야지!”
후웅.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갑자기 한 놈이 튀어나오며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동빈은 당황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삭.
동빈은 가볍게 몸을 틀며 공격을 피했다. 헛손질한 놈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자 재빨리 멱살을 잡아챘다. 반사적으로 놈의 얼굴을 가격하려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주춤.
장군의 충고가 떠올랐는가?
동빈은 꽉 움켜쥔 주먹을 뻗을 수 없었다. 불량 학생도 학생은 학생이었다.
화악.
“귀찮으니까 그냥 돌아가라.”
결국 상대를 풀어주고는 싸울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극명한 실력 차이를 보여주었으니 충분하다 생각했다. 다시는 덤비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그건 동빈만의 착각이었다.
“씨발, 좀 한다 이거지. 고딩이라 다르긴 다르네?”
“야, 연장 들어! 다구리로 뭉개버리자.”
학생들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맞아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지만 동빈이 폭력을 쓸 수 없으니 문제였다.
“오랜만에 고딩 좀 잡겠는데?”
“씨발. 명성고 잡아야 별것 없는데 말이야.”
놈들은 거만하게 다가오면서 동빈을 위협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각목과 쇠 파이프까지 꺼내 든 상태였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친다. 이것들을 진짜…….’
동빈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열 명이 넘는 상대라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푸념이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어. 어서 돈 내놔. 그러면 적당히 패주고 끝낼 수도 있지.”
‘이것들이 정말… 진짜 실력을 보여줘?’
사삭.
동빈의 발에 힘이 실렸다. 공격적인 자세가 분명했다. 중학생들도 흠칫하며 멈춰 선 상황이었는데…….
“에이… 씨!”
분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군의 명령을 어길 수 없던 것이다.
“저, 저놈 졸라 빠르다!”
동빈은 공원 담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대로 돌진하여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었다. 작은 산책로가 이어진 숲길을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빨리 잡아! 고딩 잡았다고 소문내자!”
“그래 씨발! 졸라 재미있겠다!”
학생들도 동빈을 따라 공원 담장을 넘었다. 사람 괴롭히는 것에 재미 들렸는지 마냥 신났다는 표정이었다. 동빈이 사라진 방향으로 떼를 지어 몰려갔다.
“야! 우리도 따라가자.”
“어떻게 남자 애들을 따라잡아.”
공원에는 여학생들만 남았다. 좋은 구경거리였지만 남자보다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공원 뒷길은 공사장으로 통하잖아.”
“맞아. 길이 하나밖에 없지!”
여학생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곳에서 많이 놀다 보니 지리는 훤했다. 지름길로 간다면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빨리 가자. 아까 그 고딩 열라 빠르더라.”
“그래야지. 열라 서둘러!”
여학생들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빈이 도망쳤던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중간에서 만나게 되어있기에 놓칠 염려는 없었다.
부스럭부스럭.
여학생들은 폐허가 된 공사장으로 들어섰다. 꽤나 으슥한 길이었고 짓다 만 건물들이 방치되어있었다. 부도가 나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소문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긴 장소라 노는 아이들의 아지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뭐야? 누가 벌써 왔는데?”
4층 건물 앞에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근방에서 노는 애들이 아닐 것은 분명했다. 좀 더 무서운 존재가 확실했다.
“깍두기 놈들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선아야 어, 어떻게 하지?”
“일단은 가까이 가보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조금 앞선 모양이다. 여학생들은 조심스럽게 버려진 건물로 다가갔다.
“수, 숨어.”
화다닥.
건물 내부가 보이는 장소까지 이동해서 몸을 낮췄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남자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리를 좁혔기에 건물 내에서는 하는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년아, 왜 남의 뒤를 캐고 그래. 앙!”
“누, 누가 뒤를 캤다고 이래요.”
거친 남자의 목소리와 겁먹은 여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여자가 위험에 처한 것이 분명했다.
“선아야,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미, 미쳤어. 그러다 땡땡이친 거 들키잖아.”
핸드폰을 꺼낸 여학생은 주춤했다. 선아의 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괜히 사건이 커지면? 증인으로 경찰에 불려 갈 것이 분명했다. 학교를 빼먹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공중전화라면 몰라도 발신자 번호가 뜨는 휴대폰이었다.
“어떻게 하지? 같은 여잔데 도와야 하지 않겠어?”
“조금만 기다려봐. 곧 남자 애들 오잖아.”
“근데 깍두기들을 이길 수 있을까?”
“일진이니 뭐니 큰소리쳤으니 두고 봐야지.”
“좋아, 남자 애들의 실력이 어느 정돈지 기다려보자고.”
여학생들은 몸을 감추며 사태를 주시했다. 상황이 더욱 재미나게 돌아간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멀리서부터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동빈이가 확실하다. 얼마나 빠른지 뒤따라오는 중학생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후앙.
진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사장 부근을 지나치는데, 바로 그때였다.
“하, 학생, 경찰 좀 불러줘!”
끼이익.
열심히 달리던 동빈이 급하게 멈췄다.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겨, 경찰?”
중학생에게 쫓긴다고 신고하란 소린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경찰까지…….”
스윽.
동빈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 건물을 들여다보았다. 자신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진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뭘 봐, 이 새끼야. 다치기 싫으면 그냥 꺼져.”
“제발 도와주세요. 조폭들이 날 위협하고 있어요.”
“야! 꺼지라는 소리 안 들려!”
도와달라는 애원과 꺼지라는 위협이 이어졌다. 동빈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조폭과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저 고딩 뭐 하는 거니? 다치기 싫으면 열라 도망가야지.”
“글쎄 말이야. 중학생 애들한테도 쫓기는 주제에 말이야.”
“그래도 용기는 가상하다. 열라 터지겠지만.”
동빈이 조폭들을 향해 다가서자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주제넘은 행동이란 반응이었다. 몰론, 동빈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다.
“저기… 죄송한데요…….”
동빈이 입을 열자 조폭들은 더욱 거칠게 나왔다. 정말 본때를 보여줄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 있던 건달 둘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죽고 싶어? 죄송이고 뭐고 꺼지라니까.”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학생이십니까?”
“학생? 이 자식아! 내가 어딜 봐서 학생처럼 보여?”
우락부락한 인상의 조폭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나이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학생하고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옆에 계신 분은 저와 비슷한 나이 같은데…….”
조금 마른 체격의 건달은 동빈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검정 양복에 수염까지 길렀지만 고등학생 정도가 분명했다.
“씨발! 내가 학교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혹시, 가난해서 관둔 거야? 공부는 하고 싶지만 집안 형편이 안 됐거나, 아니면 어머니가 병에 걸려…….”
“미친 새끼. 내가 학교 관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다니기 싫어서 때려치웠다!”
언성은 높았지만 꼬박꼬박 대답은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동빈의 얼굴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학교 관둔 거 후회한 적 없어?”
“이게 어디서 맞먹으려고… 절대 없다, 씨발놈아!”
“쯧쯧쯧… 계속 다니지 그랬어. 지금부터는 후회하게 될 거야!”
차작.
동빈은 양손을 치켜들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위험에 처한 여자를 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상대가 학생이라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동빈의 눈빛이 냉철하게 변했다.
임무를 부여받으면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한다. 또한, 공격 목표를 정했으면 빠른 시간에 제압해야 마땅했다.
촤악.
동빈의 발차기는 단순하고 깨끗했다.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사전 행동이 없다. 한눈파는 척하며 상대를 기만하는 수법도 제법이었다.
“뭐, 뭐야!”
마른 체격의 조폭은 바로 눈앞의 발을 보고야 반응했다. 흠칫하면서 물러났지만 완전히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퍼억.
경쾌한 타격음.
그러나 피해는 엄청났다.
피가 사방으로 터지는 잔인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입술이 터진 것은 기본이었고 코뼈까지 주저앉았다.
“이런 개새끼!”
뜻밖의 기습.
우락부락한 조폭이 깜작 놀라서 덤벼들었다. 자신의 육중한 체격을 믿는지, 양팔을 휘두르며 무조건 낚아채려고 혈안이었다.
덩치가 워낙 좋아서 위협적이다. 그러나 행동이 느리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빠악.
동빈은 조폭의 무릎 부근을 걷어차며 뒤로 빠졌다.
신속한 공격이었지만 충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건달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덤벼들려 했는데…….
휘청.
“……!”
덩치 큰 건달은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빈의 공격에 충격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자신도 기가 막힌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휘휙.
절호의 기회를 보고만 있을 동빈이 아니었다. 동빈은 발차기를 하려는 동작으로 상대를 교란시켰다. 조폭이 놀라서 주춤하자 돌려차기로 깔끔히 마무리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거구가 날아가다시피 했다. 동빈의 파괴력은 일반인의 상식보다 훨씬 뛰어났다. 순식간에 조폭 두 명을 해치운 것이다.
우르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나머지 조폭들이 뛰쳐나왔다. 눈 깜박할 사이에 두 명이나 당했다. 상대가 교복을 입은 학생이니 더욱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시팔! 힘깨나 쓴다는 놈들이 학생에게 맞아!”
조폭 우두머리는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동빈을 재껴 두고 피 범벅이 된 수하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크윽… 죄, 죄송합니다, 형님.”
“이번 일 끝내고 보자.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 기습을 당해서…….”
동빈에게 맞은 건달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고개조차 못 들었다.
“입 다물어! 변명은 듣지 않는다. 아무리 기습이라도 학생에게 당하면…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하는군.”
우두머리는 이제야 동빈에게 관심을 보였다. 균형 잡힌 체격과 강인한 인상에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이, 겁대가리 상실한 고딩새끼.”
“나 불렀냐?”
동빈의 반응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학교에서 좀 놀았나 본데,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나 있나?”
“매우 잘 알고 있지… 학생이 아니라며?”
상대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폭력을 일삼는 존재들이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다. 주먹을 쓰는 싸움에선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완전히 또라이 새끼구만. 상대를 봐가며 덤벼야지.”
“내가 또라이면? 대낮부터 여자 괴롭히는 놈들은 어떤 새끼야?”
동빈은 말투까지 달라졌다.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것이 동빈의 행동 규칙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그냥 밟아버려!”
“네, 형님!”
새로운 조폭 두 명이 뛰어들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숫자상으로는 동빈이 불리했다. 동빈에게 맞았던 조폭들도 곧바로 합세한 것이다. 우두머리까지 한꺼번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다수의 조직 폭력배와 학생 한 명이 벌이는 기막힌 대결이 시작되었다.
오 대 일의 싸움. 그러나 동빈은 밀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조폭들을 무너트렸고 세 명의 여학생들은 몸을 바싹 숨긴 채 구경에 열중했다.
“세, 세상에… 정말 대단하다. 조폭 다섯과 싸우네!”
선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불을 빌려달라고 놀렸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정말 중학생에게 쫓겨 다니던 어벙한 고딩이 맞단 말인가!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선아야, 뭘 그리 놀라? 우리 반 창수는 칠 대 일로 싸워서 이겼잖아?”
“이년아. 그건 초딩 애들이었잖아. 그것도 3학년이었다며?”
“들리는 소문에는 8반 영우가 중딩 다섯하고 싸웠다고 하던데?”
“싸우긴 뭘 싸워. 졸라 게기다가 열라 맞기만 했지. 넌 머리 좀 치워. 앞이 안 보이잖아.”
선아라는 여학생은 동빈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노는 아이들을 따라서 싸움 구경을 많이 했지만 이처럼 멋있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어서, 빨리 핸드폰 꺼내. 동영상도 찍을 수 있지?”
“찍어서 뭐 하려고?”
“뭐 하긴! 열라 멋있으니까 찍는 거지. 참, 너는 디카도 있지? 잔소리 말고 빨랑 찍어.”
선아가 무리의 리더인 모양이었다.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다른 여학생들은 두말없이 핸드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너는 이쪽, 너는 저쪽. 가까이 가서 잘 찍어. 제대로 못 찍으면 알아서 해.”
“이게 뭔 짓이야.”
“그러게…….”
선아의 명령에 따라 여학생들은 양 방향으로 흩어졌다. 물론, 선아도 동영상을 찍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퍼퍼퍼- 퍽.
동빈은 현란한 손기술을 선보였다. 조폭의 주먹을 막아내면서 얼굴 공격을 퍼부었다. 너무나 빨라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와! 이소룡보다 훨씬 빠르다!’
선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실제 이소룡의 손기술을 본 적은 없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들은 풍월 덕분이었다. 그들은 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는지 허다하게 말싸움을 했다. 이소룡이 어떻고 최배달이 어떻고, 시라소니가 최고라는 등. 거의 대부분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손기술은 이소룡이 가장 빠르다고 입을 모았다. 선아는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개자식! 진짜 죽여버린다!”
부웅부웅-.
왜소한 체구의 조폭은 각목을 들고 설쳤다. 그러나 동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말 그대로 설친다는 표현이 적당했다.
‘피해! 피해! 피해!’
가까이서 보니 현실감이 엄청났다. 동빈은 전혀 맞을 것 같지 않았지만 선아는 손에 땀까지 쥐며 열심히 응원했다.
파악.
기회를 엿보던 동빈이 옆차기를 날렸다.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몽둥이 갖고 설치던 조폭의 턱 부근을 가격한 것이다. 조폭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렇지! 잘한다! 크로캅의 하이킥보다 파워가 넘친다!’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이번에도 주워들은 풍문이 작용했다. 요새는 이종 격투기가 유행이었다. 하이킥은 크로캅이 최고라는 찬사를 기억했던 것이다.
‘그래! 정말 멋있다. 그냥 밀어붙여!’
선아는 마냥 신이 났지만 직접 싸우는 동빈은 난감했다.
‘곤란하데… 시간이 꽤나 걸리겠는걸.’
동빈이 일부러 멋있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쓰는 기술은 살극무를 바탕으로 했다. 기술을 제대로 쓰면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었다. 최고의 실전 무예라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이번 발차기도 원래는 턱이 목표가 아니었다. 발끝으로 상대의 뒤통수를 노리는 살인 기술이었다. 조폭들의 안전을 위하여 급하게 목표를 바꾼 것이다.
“이 새끼들아, 정신 차려! 한 대라도 때리란 말이다!”
“헉헉… 아, 알겠습니다, 형님.”
맷집은 좋은지 조폭들은 계속 달려들었다. 적당히 봐주면서 상대했다가는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죽지 않을 정도만 패자!’
동빈은 힘겹게 달려드는 조폭을 노려보았다. 살인 기술은 쓰지 않겠지만 더 이상 끌기도 지겨웠다.
파파파.
제일 먼저 달려오는 조폭에게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상대가 쓰러지면 조용히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후웅.
퍼억!
“컥!”
쓰러진 건달의 명치 부근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거품까지 무는 장면을 확인하고는 다음 상대에게 다가갔다.
퍼퍼퍼- 퍽!
덩치가 있는 건달에게는 손기술에 이은 발차기를 시도했다. 이렇게 많이 때리는데 조폭은 한 대도 피하지 못했다.
조폭은 눈이 뒤집히며 쓰러졌지만 동빈이 가만두지 않았다.
우득.
중심을 잃은 상대의 어깨를 붙잡고 관절꺾기를 시도했다. 아무리 맷집이 좋은 놈이라도 탈골의 고통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크악! 내 어깨…….”
팔을 축 늘어트린 건달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괴로워했다. 동빈은 한 명씩 박살 내는 작전을 썼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치명타를 퍼부으며 차례차례 무너트렸다.
“젠장! 그, 그만! 다친 애들 빨리 태워!”
동빈이 잔인하게 나오자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나머지 조폭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태우고는 쏜살처럼 달아났다. 그 흔한 ‘두고 보자’는 말조차 남기지 않았다.
싸움은 끝났다.
조폭들은 도망치고 동빈은 당당하게 서있었다.
위험에 처했던 여인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사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빈의 엄청난 무력을 보고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저, 정말 고마워. 학생 덕분에 위기를 넘겼어.”
“아니요. 뭐…….”
그녀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맙다는 뜻부터 전했다.
물론 동빈은 멋쩍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동빈이 예상외로 순박한 행동을 보이자 여인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름이… 김동빈. 명성고등학교 학생이야?”
“네…….”
여인은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교복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는 이름까지 불러주었다.
그러나 동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반응이었다.
“구해줘서 다시 한 번 고맙고… 그런데 지금은 수업할 시간 아닌가?”
“저, 절대 무단으로 학교를 이탈한 것은 아닙니다. 저,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조퇴를…….”
“아, 아니야. 난 그냥 고마워서… 시간 되면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했지.”
동빈이 강하게 변명하자 여인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큰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에게 그런 것을 문제 삼겠는가? 더 큰 보상을 하겠으니 시간을 내라는 뜻이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시, 식사는 조금 어렵겠습니다.”
“그냥 보내면 내가 미안하잖아. 연락처라도 주겠니?”
“연락처야, 뭐… 018 쓰고요…….”
그냥 됐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번호가 튀어나왔다. 군인의 병폐인가?
제대한 지 반년이 지났으니 치마만 두르면 예뻐 보일 때는 지났다. 그렇다면 뒤늦은 사춘기?
“잠깐만… 핸드폰에 저장 좀 하고…….”
‘우와! 자세히 보니 정말 예쁘다.’
콩닥콩닥.
동빈의 심장 박동 수는 점점 빨라졌다. 학교에서 만날 대하는 여학생들하고는 느낌부터 달랐다.
뚜뚜뚜.
“018… 다음 번호는 뭐지?”
“둘, 하나, 삼……!”
또박또박 말하던 동빈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알기 쉽게 국번부터 부른 것은 아니었다. 동빈의 핸드폰 국번은 네 자리였다.
“213… 그리고 뭐지?”
“아, 아무래도 나중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 무슨 일인데?”
동빈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여인도 바싹 긴장했다.
조직 폭력배도 아무렇지 않게 박살 내는 존재가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엄청난 상대일 거라는 예상밖에 할 수 없었다.
“나,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랑 같이 피해야 합니다!”
“여, 여기가 더 안전할 거야. 경찰에 신고를 했거든. 경찰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나을 거야.”
“이놈들은 경찰도 소용없어요.”
“뭐? 경찰도 소용없어? 도대체 누구기에…….”
여인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빈이 아까부터 불안하게 쳐다보는 방향이었다.
우르르.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았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헉헉… 차, 찾았다. 시팔새끼… 졸라 빠르네.”
“어쭈구리! 게다가 연상의 여자하고 같이 있잖아?”
“주, 중학생이잖아? 동빈이는 저런 애들이 무서워?”
위험한 아이들 같지만 조직 폭력배보다는 아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동빈의 반응은 심각했다. 주춤거리며 도망갈 채비까지 끝냈다.
“어디를 가려고… 전화번호는 마저 불러주고…….”
“죄, 죄송합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저, 저기… 이건 내 명함이야. 꼭 연락해.”
“…….”
여인은 명함을 전해주었지만 동빈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중학생들만 신경 쓰는 눈치였다.
“시팔! 어서 잡아!”
“에이… 씨!”
학생들이 달려들자 동빈은 다시 뛰었다. 매우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여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분위기를 살펴보는 모습이었다.
“좋아! 저 새끼도 지쳤다. 빨리 잡자!”
와르르.
동빈이 지쳤다고 판단했는지 학생들은 잔뜩 고무되었다. 눈에 불을 켜고 동빈을 잡으려 아우성쳤다. 중학생들로서는 정말 다행인 상황이었다. 만약, 여자를 해코지하려 했다면, 조직 폭력배와 같은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