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웅성.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이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방학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동빈아, 오랜만이다.”
“뭐야? 주철이 너는 지금 오는 거냐?”
양주철은 동빈의 단짝이었다. 1교시가 지나서 왔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개학 첫날부터 정상 수업이라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나저나 동빈이 너는 얼굴 많이 탔다? 어디로 놀러 갔었냐?”
“놀러 가긴… 그냥…….”
동빈은 뭐라 대답할지 막막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동원 훈련 갔다 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서해안으로 갔었다. 대천 해수욕장 갔는데, 사람 장난 아니게 많더라. 넌 어디로 갔어? 말해봐.”
“글쎄… 사, 산이라고 해야겠지. 강원도에 있는…….”
훈련을 받은 부대가 산에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놀지 못하고 훈련만 받은 것이 문제였다.
“강원도에 있는 산이라… 정말 좋았겠다.”
“별로 좋지는 않았어.”
동빈과 주철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그러나 동빈이 워낙 말재주가 없기에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시끌벅적했던 교실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자 학생들은 침묵을 지켰다. 2교시 수업이 시작된지 알았건만, 막상 교실로 들어온 사람은 부반장이었다.
“이번 시간은 자습이야. 떠들지 말고 부족한 과목 공부하래.”
“수업보다는 자습이 낫지.”
진짜로 부족한 과목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 책이나 올려놓고 잡담을 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았다. 동빈은 수학 책을 꺼내서 공부하려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참! 김동빈. 너는 담임이 오래.”
“나?”
“응, 지금 상담실로 가봐.”
“알았어.”
담임이 부르는데 어찌 거절할 것인가? 동빈은 책상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동빈이 너 방학 동안 사고 친 거 있냐?”
“아, 아니, 전혀 없는데?”
“잘해봐라. 나는 이상하게 담임이 마음에 안 들더라.”
“무슨 소리야?”
주철이 겁을 주자 동빈은 주춤했다.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혼자만 면담받는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담임의 이중적인 태도가 싫어. 담임의 눈빛을 보면 어떤 학생을 편애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지. 잘사는 학생과 못사는 학생의 구별이 너무나 확실하지.”
“설마…….”
“우리가 재수가 없는 거야. 대부분의 선생님은 잘하려고 하는데 담임 같은 선생 때문에 싸잡혀서 욕을 먹는 거야. 됐다. 늦기 전에 어서 가봐라.”
“…….”
동빈의 힘이 쭉 빠졌다. 정말 친구가 맞는가? 주철은 겁만 잔뜩 주고는 외면해버렸다.
‘그래, 이놈은 상당히 부정적인 놈이었지?’
단짝인 양주철은 세상에 대한 불만이 무척 많았다. 그의 염세주의적인 사고를 감안하면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학교 면담실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담임은 서류만 뚫어지게 살펴보았고 동빈은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동빈이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건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부슥.
몸이 불편한지 자세만 고쳐 잡을 뿐이었다. 턱을 괸 손으로 보아,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뜻이었다.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네, 말씀하십시오.”
담임이 마침내 입을 열자 동빈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어색하게 앉아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참으로 대단하다. 아무리 외국에서 생활했어도 말이야, 이제야 생활기록부가 넘어오다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동빈이 사과할 내용은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에 생활기록부 차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장군은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것처럼 서류를 꾸민 것이다.
“널 부른 건 말이지,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어디 보자…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계급이 어떻게 되시나?”
“그, 그게…….”
또박또박 대답했던 동빈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장군 또한 특수한 신분이었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따로 있거든?”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 수상 경력을 써야 하는데 말이야, 방학하기 전에 네가 직접 작성한 내용을 살펴볼까? 어디 보자… 대통령 표창 1회. 국무총리 상 3회 그리고 국방부 장관 표창 수십 회… 이거 사실이야?”
“몇 가지 빠진 게 있지만 모두 맞습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내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기에 특별히 신경 써서 작성한 부분이었다. 동빈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담임의 반응은 무척이나 격렬했다.
퍼억.
말보다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가 먼저 날아왔다.
“이놈이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지금 선생하고 장난하냐?”
담임의 표정 또한 복잡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낼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서, 선생님,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이놈이 끝까지 오리발이네? 대통령 표창을 아무나 받는지 알아? 외국에서 생활한 놈이 어떻게 대통령 표창을 받아? 나도 길게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 억울하면 증명서 가져와.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증명서를 가져와서 불명예를 씻겠습니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데, 증명서 안 가져오면… 진짜로 알아서 해.”
담임은 한발 물러서는 행동을 보였다. 물론 동빈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귀찮아서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격증 같은 거 있어? 아까처럼 쓸데없는 거 언급하지 말고…….”
“뭐… 학생으로서 필요한 자격증은 없습니다.”
특수한 기술? 배운 건 많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특수하여 자격증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담임의 얼굴이 또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으로서 필요한 자격증이 따로 있던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꾹 참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특기가 뭐지? 남들보다 잘하는 거.”
“사격하고 특공 무술…….”
동빈의 목소리는 현저히 낮아졌다. 담임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했다.
“사격? 외국 학교 따닐 때 사격부에 있었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그런데 특공 무술은 몇 단이지?”
“공인은 5단이고 비공인 7단입니다.”
“이놈이 정말! 나도 지겨우니까 증명서 가져와.”
“네…….”
동빈이나 담임이나 둘 다 지친 것이 분명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지만 조용조용 해결하려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분야에 흥미가 있지? 운동 종류인가?”
“아, 아니요.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피아노?”
“네, 학원에서 따로 레슨까지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잘 아실 겁니다. 부반장인 오유나의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하시는데…….”
“알았어. 취미는 피아노… 그리고 진로 사항만 결정하고 마무리하자. 사격과 특공 무술이 특기면… 혹시, 사관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거야?”
“아니요, 아니요. 절대 군대는 다시 안 갑니다.”
“뭐? 다시는 안 가? 언제는 뭐 군대 갔었냐? 뭘 그리 놀라고 난리야?”
동빈은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금 제대한 군인이 다시 영장을 받은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습니다.”
“아버지도 군인이라며? 아버지가 사관학교를 원하시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아버지도 절대 원치 않으실 겁니다.”
“좋아. 생활기록부는 대충은 끝났고… 학교생활 하면서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봐.”
“저기… 이건 소원수리 같은 건 아니지만…….”
“소원수리? 김동빈, 너를 보면 말이다 가끔 예비역을 대하는 착각이 들어.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야?”
소원수리는 군대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었다. 보통 학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 그래… 열심히 시정하고 불편한 사항 있으면 말해봐. 회의가 있어서 빨리 일어나야 하거든.”
물론, 시정이란 단어도 학생들에게 흔한 단어는 아니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정한수 있지 않습니까? 학생으로서 조금 품행이 단정치 못한…….”
“정한수? 그놈이 뭐 어쨌는데?”
담임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필, 그 이야기를 꺼내느냐는 반응에 가까웠다.
“상당히 폭력적인 학생인 것 같습니다. 저도 조직 생활에 대해서 조금 알지만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군대 폭력도 많이 사라지는 실정인데 말입니다. 신성한 학교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유감? 나한테 감정 있다는 소리야?”
“아, 아닙니다.”
담임이 유감이란 뜻을 몰라서 반문하는 것인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질책과 흡사했다.
“골치 아픈 일 만들지 말자. 사내자식이 고자질이나 하고 말이야. 너는 특공 무술 유단자라며? 왜 맞고 다니는 거야?”
“…….”
“요즘 일진인지 뭔지 때문에 학교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지? 괜히 벌집 쑤시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동빈도 힘들게 꺼낸 이야기였다. 담임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자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뭐 해? 다 됐으니까 이제 나가봐.”
“감사합니다.”
담임은 동빈이 나가는 것도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터벅터벅.
동빈의 걸음걸이에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중요한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학교를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없으니 문제였다.
“어이, 김동빈. 담임한테는 왜 찾아갔었나?”
주춤.
고개를 숙이며 걷던 동빈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많이 듣던 목소리.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정한수가 확실했다.
“하하… 오, 오랜만이네…….”
“설마, 우리가 괴롭힌다는 고자질은 안 했겠지?”
동빈은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정한수와 그의 패거리가 의기양양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고자질이라니?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동빈의 얼굴에는 난감한 빛이 역력했다. 지금은 쉬는 시간. 복도가 분주하여 도망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 아니면 다행이고… 잠깐 이리 좀 와볼래?”
‘이놈은 왜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한 대 칠 수도 없고 말이야.’
무서워서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군의 당부가 마음에 걸렸고 괜한 말썽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지? 오늘은 도망치기 힘들 텐데… 순순히 항복하든가 아니면…….”
“에이… 씨!”
후앙.
정한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빈이 내달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도망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뭐, 뭐 해! 빨리 잡아!”
“졸라 빠른 새끼를 어떻게 잡아!”
정한수가 주춤하는 사이 동빈은 점점 멀어졌다.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뛰어갔다. 정한수는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패거리는 이미 포기한 듯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쫓았지만 단 한 번도 잡은 기억이 없었다.
“시팔! 오늘을 반드시 잡고 만다. 빨리 따라와.”
“아, 알았어.”
정한수가 뛰자 패거리는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동빈의 모습은 이미 2층 복도에서 사라졌다.
우당탕탕.
2층 계단을 급히 내려온 동빈은 더욱 속력을 높였다.
아직 쉬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우선은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교실로 들어가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웅.
“도, 동빈아, 어디 가?”
부반장인 유나가 불렀다. 교실을 그냥 지나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됐다.”
“수업 시간 얼마 남지 않았잖아!”
“나, 나중에 말해줄게. 나 급해!”
동빈은 계속 뛰면서 대답했고 급한 사정은 곧 밝혀졌다. 정한수 패거리가 악을 쓰면서 뒤따라왔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졸라 빠른 새끼! 잡히면 뒤질지 알아!”
정한수 패거리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동빈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이제는 낯선 광경이 아니다. 개학을 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머, 동빈이 쟤는 왜 만날 쫓기냐?”
“그냥 놔둬. 다 사정이 있겠지.”
정한수 패거리가 요란스럽게 지나가자 선혜가 물었다. 그녀는 유나의 단짝이었다.
“정말 덩치가 아깝다.”
뭐가 부족해서 쫓기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동빈의 체격은 운동선수 못지않았다. 아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완벽한 근육질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선혜야, 그냥 그러려니 해라.”
“아깝잖아. 처음 볼 때는 정말 괜찮았는데 말이야.”
선혜의 푸념은 다 이유가 있었다. 동빈은 전학 초기에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었다. 운동 잘하고 얼굴도 준수한 편이라 인기가 좋았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말썽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 같은데?”
“넌 뭔가 알고 있지? 너희 집에서 레슨 받는다며?”
“그냥 조금…….”
“혹시, 재미로 쫓기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엄마한테 들었는데… 아, 아니다.”
유나는 뭔가를 말하려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혜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뭔데 그래? 너희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
“아니라니까 왜 자꾸 이래?”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말해봐.”
선혜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매달리자 유나도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다 말해줄 수는 없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말이야, 동빈이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거야. 진짜로 싸운다면 정한수 패거리는 상대도 안 될걸? 귀찮아서 봐준다고 보면 정답이지.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그, 그래? 조금 의외다.”
선혜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과연 사실일까?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어서 만날 도망치는 것일까?
부슥.
그녀는 복도에 있는 창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쫓겨 다니는 동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리얼하게 쫓겨 다닌다.’
저것이 연기라면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진 욕설과 구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도망만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