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224)

고교 예비군

8월 끝 무렵의 강원도.

세월이 갈수록 여름이 점점 길어지는 모양이다. 장마가 끝나고 시작된 폭염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착착착착.

요란한 발소리. 인적이 뜸한 강원도 산간에서 이런 경우는 몇 가지뿐이다. 피서 철이 끝났으니 군인들의 산악 훈련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착착착착.

예상은 적중했다. 묵직한 전투화를 신은 군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지만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험준한 산세를 거침없이 올랐고 동작 또한 기민했다. 속력을 더 높이는 것 같더니 이내 흙먼지를 풍기며 사라졌다.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육군 부대.

위병소를 지키는 보초병들은 폭염 때문에 지쳐있었다. 고참의 눈을 피해서 진하게 하품을 했던 병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김 상병님, 뭔 동원 아저씨들이 저리도 열심히 훈련을 합니까?”

잠시 후에 나타난 군인들은 다루기 힘들다고 소문난 동원 예비군이었다. 보통은 훈련조차 받지 않으려 아우성쳤지만 이번 예비군은 상당히 달랐다. 현역들도 이런 날씨면 외부 훈련을 꺼리건만, 그들은 완전군장에 산악 구보까지 끝내고 돌아왔다.

“이놈아, 저 아저씨들은 보통 동원이 아니다.”

“네? 처음 듣는 말입니다. 동원 예비군도 종류가 있습니까?”

“나도 인사계한테 들었는데… 모두가 특수부대 무술 교관 출신이라고 하더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예비군의 훈련량은 엄청났다. 20킬로미터 구보로 아침을 시작했고, 산악 훈련도 거르지 않았다. 특수 사격은 기본이었고 밤늦게까지 무술 연습에 매진했다.

“뭔가 이상하긴 했습니다. 보름이나 훈련을 받는 것도 이상했고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야. 청와대 경호원이나 경찰 대테러 요원, 그리고 국정원 특수부대 등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문이지.”

위병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동원 예비군은 더욱 속도를 높여 뛰어왔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풍기는 인상 또한 그들의 강인함을 대변했다.

“저런 사람들이 왜 여기서 동원을 받습니까?”

“나도 모르지. 아무리 봐도 군 생활을 오래 했던 사람들이야. 저 아저씨들 얼굴 좀 봐라. 진짜 동원을 받기에는 한참이나 늦은 나이잖아. 실전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훈련을 받는 것이 확실해.”

“김 상병님, 그런데 말입니다. 저 예비군은 우리보다 더 어린 것 같은데요?”

“그, 그러게? 아무리 보아도 고등학생 정도네?”

착착착착.

정체 모를 동원 예비군은 빠른 속도로 위병소를 통과했다. 대부분이 30대였지만 유독 한 명만은 눈에 띄게 어려 보였다. 아무리 잘 봐도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 특수부대를 제대했다면 도대체 몇 살에 군에 입대한 것인가? 위병들은 눈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저녁 무렵, 20여 명의 동원 예비군이 낡은 도장으로 들어섰다.

완벽한 건물은 아니었다. 비닐하우스 외벽을 치고 낡은 매트리스로 바닥을 만든 가건물이었다.

“모두 몸을 푸십시오. 대련을 갖겠습니다.”

교관의 지시가 끝나자 예비군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익힌 무술이 다른지 푸는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다치지 않게 살살 합시다.”

“맞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더욱 조심합시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합니다.”

장난스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팽팽한 긴장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모두가 특수부대 무술 교관 출신이라 자존심이 걸린 대련이었다.

“첫 번째 대련입니다. 9번과 20번 나와 주십시오.”

두 명의 예비군이 중앙으로 걸어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교관이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승패는 스스로 판단해주십시오. 상대방이 큰 부상을 입지 않도록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심판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싸우고 승패는 각자가 판단했다. 모두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와! 재미있겠는데? 막내하고 깜씨가 붙는구나.”

“마지막이라 이거지. 첫판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네.”

막내는 척 보기에도 어린 인상이었고 깜씨는 까무잡잡한 피부가 특징적이었다. 체격은 서로 엇비슷했지만 10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느껴졌다. 나머지 인원들은 계속 몸을 풀거나 가장자리에 앉아서 구경할 준비를 했다.

“막내하고 깜씨, 둘 다 특공 무술의 달인이지?”

“위험해… 살인 기계끼리 붙었잖아.”

특공 무술은 실전 무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반인에게 많이 보급되었지만 예전에는 북한의 격술을 능가하는 것이 목표였다. 북한의 격술은 태권도와 유도, 권투, 레슬링 등의 장점만 취하여 만든 실전 무술이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자네는 둘 다 붙어봤잖아?”

“글쎄? 온몸이 무기인 놈들이라 누가 앞선다고 할 수 없지. 결국은 붙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말밖에 못하겠네.”

1977년 인민군 격술 고수가 귀순하면서 특공 무술은 탄생하게 되었다. 귀순한 인민군은 한국군 특공 요원들과 대련했는데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당시 발차기 위주의 태권도로는 손기술을 자유자재로 쓰는 격술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에 발끈한 박정희 대통령은 격술을 능가할 수 있는 무예를 만들라고 명령하였고 전국의 무술 대가들을 초청하여 특수 임무 수행에 적합한 무술을 연구하게 하였다.

“잘못하면 한 명 죽겠는데?”

“대결이 치열해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

특공 무술은 태권도, 유도, 합기도, 쿵푸, 태극권, 킥복싱, 레슬링, 권투, 북한의 격술 등 다양한 무술과 격투기를 종합하여 만들어졌다. 나중에 북한의 남파 간첩과 대련을 하여 격술을 능가하는 위력을 보여줬다. 지금 대련을 펼치는 두 명은 특공 무술의 고수로 손꼽히는 인물들이었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끝나면 곧바로 시작입니다.”

“좋아, 마침내 시작이군.”

꾸벅.

막내와 깜씨가 인사를 끝내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단순한 대련이 아니었다. 특공 무술의 최고가 누군지 가리는 중요한 대결이었다.

사삭사삭-.

동빈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기에 막내라는 별명이 붙었다.

촤악!

빠르게 날아오는 주먹. 동빈은 재빨리 상체를 뒤로 젖히며 피했다. 뒤따라오는 공격을 대비했지만 상대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돌아가는군.”

“어쩔 수 없지. 비슷한 체격이고 똑같은 기술을 쓰잖아.”

대결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공격에 실패한 깜씨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완벽한 기회를 노렸다. 느릿한 행동이지만 감춰진 파괴력을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무예를 배웠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촤악! 착착.

이번에는 동빈이 선제공격을 취했다. 연속적인 발차기. 대단한 빠르기였지만 실속은 없어 보였다.

“막내의 동작이 너무 큰 거 아니야? 혹시 상대를 유인하는 것인가?”

“유인할 상대가 따로 있지… 저러다 태클이라도 당하면…….”

동빈의 공격은 시범 동작을 보는 듯했다. 실전에는 도움이 안 되는 불필요한 동작의 연속이었다. 자칫하면 상대의 역공을 허용할 수 있었다.

“이상하네? 단순한 동작인데 깜씨가 반격을 못 하네? 막내가 너무 빨라서 그런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깜씨도 얼마나 빠르고 눈이 좋은데. 조금만 틈을 보여도 끝장이야.”

“설마, 깜씨가 반격도 못 할 정도로 당하는 거야?”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당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동빈의 공격에 맥을 못 추는 깜씨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틈, 틈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내가 아는 동작인데…….’

깜씨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뻔히 알고도 당하는 심정이었다. 자신이 체득한 특공 무술과 흡사했지만 뭔가 달랐다. 아주 미세한 차이. 그 차이로 인해 형편없이 밀리는 것이었다.

퍼억.

상당히 둔탁한 소리. 발차기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깜씨의 중심은 심하게 흔들렸다.

‘괴물인가? 저런 자세에서 나오는 공격이 뭐 이리 강하지?’

파괴력이 다르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적인 실력 차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사삭.

깜씨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타격에서 밀리니 접근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꺾기나 관절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기에 가능했다.

투웅.

동빈의 주먹을 피한 깜씨는 몸으로 밀어붙였다. 이만하면 중심이 흩어질 만도 하건만 동빈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노, 놓쳤다. 내 움직임을 예상했단 뜻인가?’

자신의 실수인가? 아니면 상대가 한 수 위인가? 깜씨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막내가 뒤로 빠진 것이 확실했다.

후웅.

깜씨는 몸을 틀면서 수평으로 뻗은 주먹을 휘둘렀다. 무언가 걸려야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느낌밖에 없었다. 재빨리 뒤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투욱.

어느새 동빈의 손끝이 깜씨의 목 부근에 닿았다. 만약 동빈이 힘을 주어 찔렀다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축하한다, 막내야. 내가 패했다.”

깜씨는 일찍 패배를 시인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아주 미세한 차이.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네가 잘해서 이겼는데?”

동빈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승리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패배를 시인했던 깜씨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은 얼굴이었다.

‘막내가 쓰는 무예가 무엇이지? 특공 무술과 비슷하지만 뭔가 달라. 확실히 달라…….’

아직도 패배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비슷한 체격과 비슷한 무예. 도대체 어떤 차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깜씨는 천천히 멀어지는 동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977년 귀순한 인민군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격술 고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또 한 명의 귀순자가 있었음은 일급비밀로 취급되었다. 북한 격술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존재. 북한 최고의 무도가였다.

특공 무술은 실전 무예였지만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보급형에 가까웠다. 또한 남북한의 대치 상태가 탄생의 배경이었지만 동빈이 배운 무예는 달랐다.

살극무殺極武.

매우 특별한 소수만이 배울 수 있는 무예였다. 신체적인 조건이 중요했고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 했다. 북한에서 귀순한 최고의 무도가와 남한의 무도가들이 합심하여 만든 진짜 실전 무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