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사는 회귀해도 개고생이네-199화 (199/200)

[199] 199화.

종착지, 끝은 끝이 아니다

뭐야, 웃어?

“허, 누구랑 비슷한데? 흐흐. 그렇지 않나?”

이한일이 옆에서 눈치 없게 떠들었다.

나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문자의 여파가 크긴 하겠지만 이 정도 가지고 실성을 할 정도는 아닐 텐데…….

난 얼떨결에 다시 내 휴대폰으로 방금 온 문자들을 확인했다.

[삼전 그룹의 합병이 성사되면 박재용 사장이 피할 수 있는 세금은 수조 원 대로 추산.]

[왜 국민연금은 불법적 재벌 승계에 찬성하는가.]

[국민연금공단,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 합병 건에 대하여 긴급회의 소집.]

실성인가? 아니면 여유라고 해야 할까.

“자, 30분 간 정회하겠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들이 있으실 테니 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가 아니었다. 연단 위로 올라간 박재용 사장이 직접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한 내용이었다.

박승재 회장의 아우라에 가려 그저 그런 재벌 3세라고 생각했건만 완전히 다른 모습에 나도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한일은 그런 나를 보며 또 즐거워하는 중이었고.

나는 회의장을 빠져나오며 국민연금공단의 김학의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두 번의 수신음이 들리고 바로 건너편에서 잔뜩 흥분한 김학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사장님. 삼전 전자나 물산을 뺏을 생각도 없고요. 다만 연기금이 가진 재벌 지분을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자네가 세운 회사도 아니고, 자기 자식에게 회사 넘기겠다는데 외부에서 개입을 할 여지가 어디 있다고!

방금 전 말한 것처럼 딱 여기까지이다. 김학의란 사람의 그릇도.

“세금 때문에 그렇죠. 원래대로라면 박재용 사장이 내야 했을 천문학적 액수의 증여세 말입니다.”

-자넨 돈도 많은 사람이…….

“어쨌든 말씀 드린 대로 여기까지 하고 발 뺄 생각입니다. 연금은 국민을 위해 움직여 주십쇼. 재벌 자식에게 부를 대물림하는 것에 지원하지 마시고요. 끊겠습니다.”

이걸로 연금 쪽에는 한 방을 날렸고.

이제 다시 총회장으로 들어갔다. 박재용 사장은 내가 들어가자 바로 알아보고는 다시 미소를 날렸다.

뭐? 미소를 날려?

말 그대로다. 남자가 다른 남자로부터 미소를 받는 것은 절대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박재용 사장은 처음 보지, 유 대표는?”

인파를 뚫고 이한일이 앉아 있는 곳까지 도착하자 그가 말했다.

“네. 어떤 사람이에요?”

“허허.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선 덤빈 거야?”

이한일은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서로 이를 갈던 우리 둘이 어쩌다 이렇게 가까워진 거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원재 실장이 중간에 끼어 곽한영과 이한일을 대 박승재 라인에 합류시킨 후, 우리 셋이 만나야만 할 일이 종종 있었다. 예컨대 나를 제거하라는 박승재의 지시를 어길 때처럼 말이다.

사실 그와 내가 서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 만나게 된 것은 유미진과 박승재의 영향이 컸다. 조폭 같은 성미의 이한일이 나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적도 있었지만 어딜 다치거나 하진 않았고.

박승재가 나를 가둔 상황에서 벌인 테러 행위? 김승주 회장과 지원재 둘 모두 무사한 상황에서 박승재 타도에 손을 잡기로 한 그와 부딪힐 이유는 더 이상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김승주 회장이나 이미도 원장, 오광필 할아버지와 윤지 누나 같은 사람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철저히 일로 만난 사이이고, 일 이외에는 가까워질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박재용 사장. 재벌 3세. 어렸을 때는 이것저것 말아먹기도 많이 말아먹었지. 흐흐.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 그러니까 지금 유 대표 나이를 딱 지나면서부터는 착실히 후계자가 되기 위해 준비한 사람이야. 박승재 쓰러지면 언제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말이야.”

“그걸 왜 지금 말씀해 주고 그러십니까. 전에 여쭤봤을 때는 잘 모른다고 하시고선.”

“그건 물어보질 않았으니깐. 허허.”

잠시 뒤, 총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웅성거림은 많이 줄었지만 시작할 때와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각자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불편함이 서려 있었고, 그건 총회를 진행하는 회사 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결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언론 속보로 인해 불의의 일격을 받긴 했으나 국민연금공단이 공식적으로 반대를 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미 총회에 참석한 공단 대리인들은 찬성 표를 던진 것 같고, 7%의 멀라인과 나와 이한일의 7%는 반대.

나머지는 대부분 찬성이었다. 소액 주주들은 참석이 불가했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합병안이 가결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가시죠.”

“조금만 기다려 봐. 아마 우리 쪽 확인했으니 곧…….”

그리고 이한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진행요원 중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내 회사도 아닌데 무슨 인사를 받느냐 싶겠지만 그래도 대주주다. 모르는 사람의 인사를 받고 안내를 받는 이런 일도 이제는 익숙해진 듯 싶었다.

“박재용 사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왜요? 이제 지분 다 팔 건데?”

“네?”

엉뚱한 내 장난에 마치 로봇같이 무표정했던 이 사람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장난 하고는. 허허. 알겠습니다. 가 보시죠.”

이한일이 정리를 하면서 먼저 앞서나갔고,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총회장이 삼전 물산 본사였기에 박재용 사장의 사무실은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진짜 크네요.”

“이 건물의 7%는 우리 거야.”

“달라고 해 볼까요? S 아카데미 본사를 이쪽으로?”

“그거 이제 자네 것도 아니잖은가. 해신 자동차 본사로 들어가는 것이 더 빠를 걸?”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떠드는 사이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비서 두 명이 반겼는데 미모가 상당했다.

생각해보면 정현수 회장이나 김승주 회장도 비서를 외모로 보고 뽑았는지 미인들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냥 입구고 간판이다 보니 채용에 있어 외모도 보는 건지, 아니면 돈이고 권력이고 다 가진 노인들의 자부심인지는 모르겠다.

심지어 대부업체라고 볼 수도 있는 이한일의 퓨처 금융투자까지도…….

똑똑

“회장님, 손님들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마치 왕궁 입구 같은 거대한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나자 입이 떡 벌어졌다.

해신 그룹 회장실도, 한성 그룹 회장실도 여기에는 못 미칠 것 같았다.

뻥 뚫린 공간이 족히 백 평은 되어 보이는데다 벽 사방은 미술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과 사진들이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박재용입니다.”

그가 내 쪽으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연장자인 이한일이 있었으나 우리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리라.

이한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보였는데…….

“안녕하세요. 유현덕입니다.”

“형님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형님이라니요. 아무튼 건강해 보이시네요.”

둘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물론 ‘호형’은 맞고 ‘호제’는 아니겠지. 이한일은 이 집에서 집사와 같은 역할일 뿐이었겠지.

박재용은 우리를 소파로 안내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거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박승재 회장도 재벌 2세이기는 했으나, 그는 이미 회장이 된 지 오래 지나 만난 것이었다.

박재용 사장은 이제 올라가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그의 성정을 영화에서 보던 망나니 재벌 3세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일까?

그런 성격이었으면 아마 이 자리에 오자마자 멱살부터 잡혔을지도 모른다.

‘어디 남의 잔칫집에 재를 뿌려!’ 하고 말이지.

“듣던 것처럼 승부를 잘 거네요, 유 대표는.”

미소를 짓고는 있으나 도무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짓는 미소인지 모르겠다. 비열한? 아니면 뭔가 속내를 숨기는 그런 미소인가?

내가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유능한데 골치 아플 것 같은 친구가 있다고요.”

“저는 박승재 회장님께서 골치가 아프실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하.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시고요. 아버지는 어떻게 대하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실례를 하셨다면 제가 먼저 사과드립니다.”

진심인가?

“그리고 저희 총회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이곳에서 나가면 곧바로 기자들이 달려들겠죠? 증여세 문제 때문에 그런 것도 있으시겠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버지가 하고 다니신 수많은 실례들, 제가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증여세 부분도 기자회견을 한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이걸로 삼전 그룹에 빅 엿을 먹일 수 있겠다 생각을 했는데 내 판단이 이번에는 틀렸던 것일까?

박승재는 이미 병상에 누워 있는 상황이고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과오들을 처리하고 다닌다?

그는 내가 전생부터 기억하는 재벌가 후계자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유 대표와 한일 형님 지분은 제가 제값 주고 다시 받겠습니다. 제값은 물론 사셨던 금액보다 훨씬 높을 거고요.”

“삼전을 물려받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럼 비용이 너무 크게 들지 않나요?”

내가 딱히 통 크게 움직여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내 앞에 이 사람은 나보다 한두 수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 같았다.

참, 내가 무슨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따끔할 정도로 찔러 보겠다고 준비한 일인데 상대방이 다 받아들이니 허무했다.

박승재 회장이었다면 달랐겠지. 목숨을 걸고 벌여야 했을 것이다.

이한일이 내 등을 툭 쳤다.

“어떡할 거야, 유 대표? 이 상황이라면 실익이 따로 없지 않겠어?”

마치 일이 이렇게 되리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양 말하는 이한일. 그의 말이 옳았다. 갈고 갈은 내 칼날이 가로지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계셨어요?”

“응. 이 친구는 대화가 조금 통하거든. 그리고 사실 양다리를 걸쳐야 했던 내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고.”

“양다리요? 박승재 회장과…….”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방식이 있으셨지만, 제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한일 형님과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 결과적으로 다행이긴 합니다만, 지인이신 김승주 회장님과 직원 분의 사고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용서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드릴 생각입니다.”

허무했다.

이것만을 보고 달려온 세월은 아니었지만, 막상 하나의 목표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후련했다.

내 목숨에 위협을 느낄 상황은 조규만 때도, 강민호 때도 있었다.

특히 강민호가 산장에서 나와 윤지 누나를 공격했을 때는 정말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나 하나 다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겠지.

박승재에 대한 악감정도 그래서 더 컸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나는 죽었다 다시 사는 목숨이다. 그런데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몇 번 다시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소중함이 희석되는 것도 아니다.

“허, 이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되기 전에 몇 번을 찾아뵈려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한들 믿지 않으시리라 생각했거든요. 흔히 상상하는 재벌 3세의 모습에 지금 제 말을 대입하면 ‘사기꾼’ 이란 단어가 떠오르겠죠. 하하.”

“잠깐만요. 근데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뭘 말씀이신가요?”

“왜 이렇게…… 그러니깐 박승재 회장님의 모든 잘못을 정리하면서 착한…….”

이 부분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나이 마흔이 넘은 사람에게 착하다고 표현하다니. 뭐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적절한 단어는 아니었다.

“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나고, 다 누리고 살면서 착하기까지 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하하. 그리고 답은 질문을 하시면서 찾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용이란 사람은 오히려 나이 많은 회장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그래, 그의 말마따나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삼전 그룹의 성공적 승계. 창업주에서 재벌 2세, 그리고 3세로 넘어오면 이런저런 때가 많이 묻기 마련이다. 그리고 창업주가 가진 강력한 실권을 3세가 고스란히 이어받는 경우도 드물다.

거대한 그룹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권과 사정 기관에 다양한 형태로 거래가 들어가게 되고, 이것들은 결국 3세와 4세에 이르러서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날아온다.

착하든 착하지 않든, 어쨌든 간에 그가 지금 나에게 한 말로 미루어 본다면 그는 외부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승계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출혈이 상당하겠으나, 출혈 외에 얻어지는 기업 이미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할 일은 없었다.

그의 포부를 듣고 판단하는 것?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의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그것은 나름대로 계속 이어나가겠지만, 방금 박재용 사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는 내가 기자회견을 하면 곧바로 그 대응책을 내놓을 것이다.

허무, 허탈, 그리고, 어울리진 않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마음속을 채우는 듯 했다.

“박승재 회장님께서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던 그도 박승재란 이름이 나오자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이내 회복한 듯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이제 못 일어나십니다.”

그날 내가 박재용 사장과 만난 이후 생각보다 내 삶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박승재 회장을 상대하기 위해 끌어모은 돈의 액수는 상당히 컸고, 거기에 아직 비트코인에 남아 있는 돈도 꽤 많았다.

물론 삼전 물산으로부터 지분 가치만큼 현금으로 돌려받은 이후에는 에듀코인과 온라인 교육 사업의 연계를 위해 상당히 많은 돈이 또다시 들어갔다.

박승재 회장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언론에서도 깊이 다루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박재용 사장의 그룹 장악 이후에 사망 소식을 전할 거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극소수의 직접적인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이한일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거의 끝.

어차피 단발성의 만남이었고, 유미진이란 존재가 그의 곁에 있는 이상 관계는 달라지기 어려웠다.

사실 그녀 때문에 처음부터 얽히게 된 것이라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2017년이 되고 암호화폐 붐이 대한민국에 찾아왔다.

아니, 딱 대한민국만 그랬다고 보긴 어려웠다.

한국과 일본발 암호화폐 가격 상승은 2017년 내내 이어지다가 연말에 꺾이기 시작한다.

과도한 등락폭과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알트코인들의 난립으로 시장은 투기판이 되고, 비트코인의 가격은 1년도 되지 않아 10배가 뜬다.

비트코인 외에도 이더리움 등 각 암호화폐의 대표자들은 붐을 일으키기도, 꺼뜨리기도 하는데 그중 나도 한몫을 담당했다.

물론 내가 붐을 더 이상 끌어올릴 이유는 없었다. 나에게 있어 이 판은 맹목적 투기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돈? 어차피 지금 당장 암호화폐 없이도 수천 억, 그리고 비트코인을 현금화시킨다면 가늠하기도 어려운 돈이 생긴다.

전생처럼 돈에 쪼들리는 삶에서 벗어난 지 오래. 그때는 로또 대박을 꿈꿨으나, 막상 가진 이후에는 누릴 방법을 몰라 그저 금융사에 들어가 있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 돈이다.

“정말 안 빼실 겁니까?”

이충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애초부터 나는 이쪽 사업에 관심이 없었는데 오히려 나를 꼬신 그가 불안해한다. 그 정도로 과열 조짐은 여러 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네. 제 것 빼면 순식간에 무너져요. 그냥 위험하다는 기고문만 계속 보내게요.”

“빠지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에듀코인이 있잖아요. 흐흐.”

“그건 그렇지만…….”

에듀코인의 가격은 그리 크게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다만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많이 올랐지.

만 원의 가치를 에듀코인 본사가 보증한다고 했는데 지금 시장에서는 10만 원 정도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 인센티브는 충분히 강사들에게 부여할 만하다.

그래야 더 질 좋은 강의들이 우리 사업에 참여할 것이고,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전 세계 유명 석학들의 강의부터 시험용 강의까지 들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목적인 이상 이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

가격이 오름과 동시에 에듀코인에서 보증하는 1에듀코인당 보증 금액도 5만 원으로 올렸다. 물론 현재 회사 돈으로 가능한 액수를 철저히 계산한 결과다.

“시스템 운영만 힘써 주세요. 잘하면 교육방송도 우리 사업에 참여할 것 같으니까요.”

“교육방송도요? 하긴, 이미 연락이 왔어야 했는데 왜 안 오나 했습니다.”

오히려 교육방송의 관심이 꽤나 늦은 것이었다.

푸글과 제플에서 에듀코인과 합작으로 온라인 강의 서비스를 런칭하고, 새로 설립한 중국 지사에서도 이런저런 강의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전 세계의 교육 시장의 중심이 단순한 컴퓨터 시스템인 에듀코인으로 묶인 것이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세월이 금세 지나갔다.

원래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릴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들 하지만, 막상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때나 동일하다.

신성 학원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의 얼굴에도 주름이 꽤나 많이 생겼다.

둘은 정말 왜 관계가 진전이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미도 원장의 아버지인 강재훈 원장도 딸 걱정을 하지만 딱히 결혼해라 마라 할 처지가 아니기에 속만 끓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오늘은 원재 형이 정말 오랜만에 우리 회의에 함께하는 날이다.

“햐,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나왔어?”

“아쉬워하시는 눈치이신데요?”

“아냐, 아냐. 절대 그럴 리가 없지. 하하. 다행이야, 다행.”

사실 지원재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것은 좀 된 일이다.

박승재 회장이 쓰러지고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의 인수합병 건에서 내가 이한일 회장과 함께 그에게 빅 엿을 먹이려고 했을 때도 나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박재용 사장을 만나고 박승재 회장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표가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위험천만한 목표였고, 피해자였던 지원재와 김승주 회장이 더 이상의 위험 감수를 원치 않는 상황이었기에 복수극은 거기에서 막을 내렸다.

일이 종료되고 지원재는 그가 죽음에서 돌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그랬기에 이 멤버로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이다.

“건강은? 그때 많이 다치긴 한 거지?”

오광필 할아버지가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그가 죽은 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사고였다. 건물 한 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아뇨. 멀쩡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지, 그것도. 기적이야, 기적. 살아 있단 소리 듣고 놀랐어, 엄청.”

대화의 화두는 역시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지원재. 그리고 이어서 박승재 회장의 장례식으로 이어졌다.

“그 사람이 그렇게 가다니…….”

“복수도 당하지 않고 가는 분이시더라고요.”

“허허. 결국 승리만 하다가 떠나는 셈인가? 나쁘지 않은걸?”

“부러우십니까, 회장님?”

“뭐야?”

김승주 회장의 입장에선 기분이 오묘했으리라.

함께 대한민국의 재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도된 차량 사고라는 급에 맞지 않는 공격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박승재 회장에 대한 대화는 아주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은 나와 지원재, 김승주 회장 정도였다.

앞으로의 사업 이야기. 교육 이야기. 그리고 김승주 회장의 경제 교육 시간이 되자 몇몇은 슬슬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에 회의실에 어울리지 않는 맥주잔이 놓여 있긴 했지만, 피로함은 결국 술이 아니라 커피로 풀어야 한다.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고, 김윤지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참! 유 대표는 결혼 언제 해?”

“네?”

오광필 할아버지가 나와 김윤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속 보이는 질문을 했다.

“이제 슬슬 해야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김윤지가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빨개져 있었다.

“누나!”

“허허. 얼른 해, 얼른. 사람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조용하세요, 좀!”

나도 그녀를 따라 회의실을 나갔다.

문을 닫자마자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커피포트로 다가가니 김승주 회장을 따라온 수행원들 둘이 대화를 나누다 우릴 보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김윤지가 먼저 와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있었고.

“누나…….”

“쉿!”

손가락까지 입에 대며 조용하라는 그녀.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그리고 커피가 향긋한 향을 내며 완성될 쯤, 이제 됐겠다 싶어 포트에 손을 갖다 대었다.

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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